태그 : 프로이트

철학적 정신분석학과 평론

방명록에 어떤 분이 비밀글로 질문을 남겨주셨다.

아이추판다 님 안녕하십니까? 여쭤볼 게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에 관한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의 '학문'으로서 위치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치료법'인지 아니면 객관적으로 검증된 '학문'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고 싶구요.
요즈음 소설이나 영화 평론에서 정신분석을 들먹이는게 짜증이 나서요.
대부분의 필자들이 정신분석과 상관없는 비전공자(대부분 인문학)인데 평론마다 정신분석 안나오는데가 없으니 저 같은 무지렁이들은 읽기도 어렵고 평론에 신뢰를 가지기도 어렵습니다.
대부분 얼치기라는 심증이 있으나 객관적 물증이 없어서^^

우리는 아직 많은 정신장애의 원인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효과적인 몇 가지 치료법들이 있는데 정신분석학도 '그 중에 하나'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침소봉대해서 정신분석학 '이론'의 경험적 근거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건 잘못이다. 그건 정신분석학이 다른 치료법보다 더 효과적일 때나 가능한 소리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의 이론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그냥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효과적"이라는 게 정신분석학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가장 관대한 평가일 것이다. 이건 다른 치료법도 마찬가지다.

임상심리학이나 상담심리학과 같은 실천적 분야에서는 정신분석학이 치료법으로서 의의가 있지만 지각심리학이나 인지심리학과 같은 과학적 분야에서는 별 비중이 없다. 발달심리학 교과서에 프로이트의 발달 이론이 '잘못된' 이론으로 소개되고, 언어심리학 교과서에서 말실수에 대한 설명을 소개하면서 프로이트의 이름을 잠깐 언급하는 정도다.

프로이트는 원래 신경과학자였다가 먹고 살길이 없어서 의사로 개업을 한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학은 19세기판 이공계 위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뇌든 마음이든 거의 알려진게 없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당시의 과학적 지식과 자신의 임상적 경험을 버무려서 어떻게든 최선의 이론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1890년대에 카밀로 골지는 신경세포 주위의 돌기에는 표면막이 없어서 신경세포들은 거미줄처럼 연결된 신경망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은 골지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골지가 만든 은 염색법을 이용해 뇌가 독립된 신경세포들로 이뤄져있음을 보였다. 이 업적으로 1906년에 골지는 은 염색법을 만든 공로로, 카할은 신경망의 기본구조를 밝힌 공로로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다. 골지는 자신이 반대한 주장을 증명한 공로로 노벨상을 탄 셈인데, 그는 노벨상 수상연설에서도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면서 라몬 이 카할의 발견을 비난했다고 한다.

여기서 연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대표작인 "꿈의 해석"을 출간한 것은 1900년이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뇌의 기본단위가 신경세포라는 것조차 아직 확실치 않았던 시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프로이트의 오류에 대단히 관대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상대성 이론을 몰랐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게다가 프로이트는 라몬 이카할의 이론을 정신분석학과 조화시키기 위해 "과학적 심리학 초고"라는 논문을 쓴다. 여전히 말은 안되지만 나는 그가 노력이라도 했다는 데 크게 점수를 주고 싶다.

문제는 프로이트를 '철학'으로 재포장한 사람들에 있다. 이 사람들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 역사적 맥락과 마음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고 했던 그의 노력을 모두 날려버리고 정신분석학을 사변적 이론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그런 지적 난동을 "프로이트의 '생물학적 편향'을 제거했다"며 우쭐해한다. 밥벌이 때문에 생물학을 손에서 놓아야 했지만 끝까지 그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프로이트가 들으면 밥숟가락을 집어던질 일이다.

1880년대에 헤르만 에빙하우스는 PAQ와 같이 무의미한 철자들을 외우고 일정 시간 후에 시험을 보는 방식으로 망각의 속도를 측정했다. 그래서 망각이 초반에는 빨리 이뤄지지만 후반에는 천천히 이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890년대에 윌리엄 제임스는 이러한 발견으로부터 기억은 1차 기억과 2차 기억으로 구분된다는 주장을 펼쳤고, 1900년에 뮐러와 필체커는 에빙하우스가 사용한 것과 비슷한 실험을 통해 1차 기억에서 2차 기억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기억은 무척 취약해서 그 시점에 다른 정보를 학습시키면 1차 기억이 2차 기억으로 전환되지 못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후에 심리학자들은 1차 기억을 단기 기억, 2차 기억을 장기 기억,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고착화로 명명했다. 이제는 단기기억, 장기기억, 고착화에 대해 신경 수준에서 행동 수준까지 방대한 사실들이 밝혀져있다.

프로이트는 1925년 "신비스런 글쓰기판에 대한 소고"라는 글에서 당시 유행하던 '신비스런 글쓰기판'이라는 장난감을 비유로 들어 기억의 이런 이중적 구조를 설명한다. 이 글은 프로이트의 대표적인 저작 중에 하나이고 철학적 정신분석학자들이 많이 인용하는 글이다. 그런데 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프로이트의 이 글을 읽기 전에 에빙하우스로부터 시작되어서 프로이트를 지나 현대에 이르는 기억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대해 먼저 공부할 것이다. 아마 프로이트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안 한다. 아마 에빙하우스나 제임스의 이름도 모를 것이다.

서울대 철학과의 김상환 교수는 라캉과 같은 철학적 정신분석학을 한국에 퍼트리려고 애쓰는 사람인데 기본적인 기억의 원리도 모르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라캉주의적 오바질) 이건 김상환이 한국의 얼치기라서 그런 게 아니다. 프랑스 '본토'에 가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는 맹정현도 마찬가지의 헛소리를 한 적이 있다. (환각의 생리학) 역시 프랑스에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김석은 심지어 학부 발달교과서에 있는 내용도 모른다. (18개월) 이들의 글을 읽어보면 기본 지식이 없다는 게 지나치게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읽는 내가 당황스럽다.

고등학교 때 배우기로 평론은 시, 소설, 수필, 희곡과 함께 문학의 장르 중에 하나라고 한다. 평론에서 정신분석학을 동원하는 것, 문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평론도 어렵고 소설도 어려운데 평론과 환타지 소설을 크로스오버하니 얼마나 어렵겠나. 학부 교과서 수준의 지식도 없는 분들이 무의미한 단어만 조합해서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글을 쓰니 그야말로 예술이다. 대단한 분들이다. 그러니 이런 분들의 글을 읽거든 짜증내지 말고, 도장 하나 파서 꾸욱 찍어주자. "참 잘했어요"라고.

by 아이추판다 | 2009/06/25 22:55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9)

이상한 홍준기

라캉주의식 설명법?

알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프로이트 당시 히스테리자들은 대부분 아버지 병간호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프로이트가 분석치료했던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 병간호를 오래하면 히스테리에 걸린다'고말하곤 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특정한' 원인을 찾으려는 사고방식이다. 즉 아버지 병간호라는 원인이 히스테리 발병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직선적 인과론'에 근거한 '단순한' 사고방식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생각을 비웃으면서 아버지 병간호를 했기 때문에 히스테리자가 된 것이 아니라,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병간호를 한다고 설명했다. 아주 단순한 예이지만 이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단순한 과학적, 상식적 사고는 어떤 '확실한' '특정한' 원인을 찾기를 원하므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다가 히스테리에 걸렸다고 말하지만, 정신분석학은 그들이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매력적인 남성'의 구애를 뿌리치고 아버지 병간호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뒤집어 말한다. 위의 예는 병간호라는 단순한 원인 - 혹은 어떤 다른 '특정한' 원인이라도 마찬가지인데 - 에 의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보았던 히스테리가 사실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상태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문제를 이해하기위해서는 상식적, 과학적 사고가 막연히 가정하는 '직선적 인과론'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글에는 무척 잘못된 점이 많다. 아버지 병간호 때문에 히스테리에 걸리는가 아니면 히스테리 때문에 아버지 병간호를 하는가? 이건 과학적 문제다. 과학적 문제를 과학적 사고로 풀면 안된다고 주장하니 이것부터 잘못이다. 과학적 사고가 '확실하고 특정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도 현대 과학의 확률론적 세계관과 방법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다. 게다가 프로이트야말로 실수 하나에도 원인을 일일이 찾아내려고 한 사람인데 도대체 누가 직선적 인과론에 빠져있다는 것인지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그런데 이런 잘못 쯤은 눈감고 넘어갈 수 있다. 나는 관대하다.

댓글 중에 아버지 병간호가 히스테리를 일으킨다는 주장이나 히스테리가 있어서 아버지 병간호를 했다는 주장이나 그게 그거라는 의견을 주신 분이 많았다. 홍준기가 그만큼만 되었어도 내가 '이상하다'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홍준기가 쓴 문단만 근거로 한다면 프로이트의 주장은 아버지 병간호가 히스테리를 일으킨다는 주장보다 설명력이 떨어진다.

홍준기는 이 문단에서 제시하는 유일한 사실은 "프로이트 당시 히스테리자들은 대부분 아버지 병간호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프로이트가 분석치료했던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뿐이다. 홍준기도 그렇고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도 그렇지만 여기서 '대부분'이라는 말을 간과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아버지 병간호를 하려면 그 이전에 아버지가 병에 걸려야 한다. 병에 걸리지 않은 아버지를 간호할 수는 없다. 따라서 히스테리에 걸린 여성들의 '대부분'이 아버지 병간호에 많은 시간을 보내려면 먼저 그 이전에 히스테리에 걸린 여성들의 아버지 '대부분'이 병에 걸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병간호에 많은 시간이 필요할 정도의 그런 병에 걸려야 한다.

그렇다면 19세기말~20세기초 비엔나에 살던 결혼적령기 딸을 둔 남성들이 하나같이 중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있었거나 아니면 딸의 히스테리와 아버지의 발병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어야 한다. 당시 비엔나 중년남성의 건강상태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 없지만 아무래도 40~50대 남성들이 하나같이 병석에 누워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남는 가능성은 하나 뿐인데 히스테리와 아버지의 발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벌써 매우 이상하다.

아버지의 발병 때문에 히스테리에 걸렸다고 하면 아버지 병간호가 히스테리를 일으켰다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그러면 딸의 히스테리 때문에 아버지가 병에 걸렸거나 아니면 제3의 원인이 딸의 히스테리와 아버지의 발병에 관계해야 한다. 그런데 딸의 히스테리 때문에 아버지들이 중병에 걸려 픽픽 쓰러진다는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하필 히스테리에만 아버지가 발병하는 것도 이상하고, 어머니는 어쩌고 아버지만 병에 걸리는 것도 이상하다.

제3의 원인이라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딸에게 동시에 전혀 다른 질병을 발병시키는 그런 원인이 뭐가 있을까? 유전이라고 해도 이상하고 환경적 요인에서 찾기에도 이상하다. 아버지와 딸에게는 영향을 미치는데 어머니와 아들에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가장 이상한 건 홍준기다. 히스테리자 대부분이 아버지 병간호에 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아버지 병간호가 히스테리를 일으킨다고 말하기엔 증거가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건 아니다. 그런데 홍준기는 영 딴 소릴 하고 있다. 만약 히스테리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 병간호를 했다고 말하려면 당대 비엔나에서는 아버지가 병에 걸려도 딸들이 오랜 기간 병간호 하는 일은 드물었다든지 그런 얘기를하든지 아니면 아버지와 딸이 동시에 다른 병에 걸리는 이상한 현상에 대해 뭔가 설명을 해야 한다. 홍준기는 자신이 반대하는 가설에 유리한 증거만을 내놓고 자신이 지지하는 가설에 유리한 증거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홍준기가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를 줄곧 비판하다보니 비과학적이고 몰상식적인 사고를 하게된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실수 행위들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을 따라 홍준기의 무의식 속에 프로이트에 대한 적대감이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홍준기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프로이트의 주장에 반대되는 글을 쓴다. 정말 이상하다.

덧. 프로이트의 첫 히스테리 환자로 유명한 안나 O.의 아버지는 1880년 7월에 늑막 주변 농양에 걸려 10개월 이후인 1881년 4월에 죽었다. 안나 O.도 아버지 병간호를 했으나 1개월만에 히스테리가 도져 병간호를 그만두었다. 10개월이든 1개월이든 어느 쪽이나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매력적인 남성'의 구애를 뿌리치고 아버지 병간호를 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말할만한 '오랜 세월'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홍준기가 인용한 프로이트의 주장이 어디에 나오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 프로이트 자신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했을까?

by 아이추판다 | 2008/10/04 18:45 | 트랙백(3) | 핑백(6) | 덧글(13)

라캉주의식 설명법?

옆 사람 자리에 "라깡의 재탄생"이라는 책이 있어서 몇 쪽을 슬쩍 넘겨봤다.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어서 여기에 옮겨본다. 다음은 편자인 홍준기가 책의 서론에 해당하는 글로 쓴 '자크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의 한 문단이다. 강조는 원문 그대로 옮겼다.

알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프로이트 당시 히스테리자들은 대부분 아버지 병간호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프로이트가 분석치료했던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 병간호를 오래하면 히스테리에 걸린다'고말하곤 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특정한' 원인을 찾으려는 사고방식이다. 즉 아버지 병간호라는 원인이 히스테리 발병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직선적 인과론'에 근거한 '단순한' 사고방식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생각을 비웃으면서 아버지 병간호를 했기 때문에 히스테리자가 된 것이 아니라,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병간호를 한다고 설명했다. 아주 단순한 예이지만 이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단순한 과학적, 상식적 사고는 어떤 '확실한' '특정한' 원인을 찾기를 원하므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다가 히스테리에 걸렸다고 말하지만, 정신분석학은 그들이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매력적인 남성'의 구애를 뿌리치고 아버지 병간호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뒤집어 말한다. 위의 예는 병간호라는 단순한 원인 - 혹은 어떤 다른 '특정한' 원인이라도 마찬가지인데 - 에 의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보았던 히스테리가 사실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상태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문제를 이해하기위해서는 상식적, 과학적 사고가 막연히 가정하는 '직선적 인과론'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문단엔 단순히 틀렸거나 잘못된 걸 넘어서 아주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다. 찾아들보세요! (정답은 내일)

by 아이추판다 | 2008/10/03 15:54 | 트랙백 | 핑백(2) | 덧글(10)

업데이트 프로이트 :: 모듈

초심리학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의식이 <의식Bw.>이라고 기술되는 특수한 조직의 한 기능이라고주장한다. 의식이 산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의 지각과 정신 기관 내부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쾌와 불쾌의감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각-의식W-Bw>의 조직에 공간 속에서의 한 위치를 할당하는 것이 가능할것이다. 그것은 외부와 내부 사이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외부 세계를 향하고 있고 다른 정신 조직들을 에워싸고 있을것이다.

(중략)

자극에 <대한 보호>는 자극<의 수용>보다 유기적 생명체에 더 중요한 기능이다. 보호적 방패는 그 나름의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으며, 외부 세계에서 작동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위협적 산물에 대항해서 그 보호막 속에서 작동하는 에너지의특수한 변형의 틀을 보존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쏟는다. 그 위협적 산물은 그 변형의 틀을 깨부수려 하고 따라서 그것은 파괴를향해서 움직인다. 자극 <수용>의 주된 목표는 외부 자극의 방향과 성격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외부세계의 작은 표본을 채취해서 그것을 작은 양으로 견본처리하는 것으로 족하다. 고도로 발달된 유기체의 경우 이전 소포의 수용적외피층은 신체 내부의 심층으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물론 그것의 일부가 자극에 대항하는 방패 바로 밑에 있는 표면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것이 감각 기관들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열린책들. 292-297.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프로이트보다 한 세대 전에 헤르만 폰 헬름홀츠(1821~1894)에 의해 시작되었다. 인지과학에 계승된 무의식 개념은 프로이트보다 헬름홀츠 쪽에 더 가깝다.

헤르만 폰 헬름홀츠


잠깐 얘기를 돌려 사람의 눈에 대해 얘기해보자. 우리는 눈이 대단히 정교한 기관이라고 알고 있다. 가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사람의 눈을 근거로 신에 의한 창조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사람의 눈을 신이 창조했다면 신은 변태가 틀림없다. 눈으로 들어온 빛은 망막에 물체의 이미지를 맺는다. 그러면 이 이미지를 망막에서 뇌로 전달하는 신경은 망막 앞쪽에 있어야 할까, 아니면 뒤쪽에 있어야 할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당연히 망막 뒤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디지털 카메라도 그런 식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인간의 신경이 망막 앞에 있다. 이러다보니 신경이 망막을 가려서 상이 맺히는 걸 방해할 뿐만 아니라 어쨌든 뇌로 연결되어야 하니 망막을 뚫고 지나가서 맹점이 생긴다. 신은 변태가 확실하다.

눈이 이렇게 엉터리로 생겨먹었는데도 정작 우리는 그걸 전혀 느끼지 못한다. 망막을 가린 신경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맹점도 느낄 수가 없다. 단순히 느낄 수없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정확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렌즈 앞에 그물을 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물은 커녕 오히려 사진이 더 좋아졌다면 누군가 포샵질을 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헬름홀츠가 내린 결론이었다. 헬름홀츠는 이 '포샵질'을 무의식적 추론(unconscious inference)라고 불렀다. 감각 기관으로부터 들어온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원래의 정보를 추론해서 복원하는 무의식적 과정이 의식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적 추론의 결과만 의식에 떠오르기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적 추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가 쉽지 않다. 이것을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이 착시 현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 추론은 불완전한 정보를 복원해서 완전한 정보로 만들어주지만, 가끔은 더 엉터리 정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추론은 추론일 뿐이기 때문에 항상 맞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래 그림은 유명한 뮐러-라이어 착시다. 붉은 색으로 칠한 표시를 보면 알 수 있자만 세 선분의 길이는 모두 똑같다. 그렇지만 가운데 선분이 위나 아래의 선분보다 더 길어보인다. 분명히 세 선분의 실제 길이도 같고 아마 망막에 맺히는 상도 같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보가 의식에 도달할 때는 가운데 선분보다 긴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분명히 세 선분의 길이가 같다고 알고 있더라도, 이런 의식적 생각은 무의식적 추론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여기서 무의식적 추론의 중요한 성질을 알 수 있다. 무의식적 추론은 그 추론 과정을 의식에게 드러내지도 않을 뿐만아니라 의식의 개입을 받지도 않는다. 의식은 무의식적 추론이 내놓은 결과만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헬름홀츠의 무의식 개념은 현대의 모듈 이론으로 이어진다. 모듈(module)은 컴퓨터과학에서 넘어온 용어인데 커다란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독립적인 작은 부분들을 말한다. 윈도에서 파일을 열거나 저장할 때 뜨는 창의 모양은 어느 프로그램에서나 다 똑같다. 윈도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모듈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모듈 이론은 마음이 여러 개의 모듈로 되어 있다고 본다. 이 모듈을은 헬름홀츠의 무의식적 추론과 마찬가지로 의식이나 다른 모듈이 그 내부에 접근하거나 개입할 수 없다. 각각의 모듈은 시각 정보를 처리한다든지,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다든지, 남이 나한테 사기치는 게 아닌지 판단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고유한 자기 영역이 있다. 마음은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인지적 기능들이 모듈의 형태로 하나씩 덧붙는 식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에 이런 모듈은 선천적인 것이기도 하다.

모듈 이론과 대립하는 입장은 뇌나 마음이 하나의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시스템이라는 전일론(holism)인데 역사적으로 축적된 증거는 대체로 모듈 이론의 손을 들어준다. 전일론은 이제 이 모듈들을 통제하는 중앙처리장치가 있다는 정도의 주장으로 많이 후퇴했다.

이제 프로이트와 헬름홀츠의 주장을 비교해보자. 프로이트는 감각 기관이 자극의 일부만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헬름홀츠에게이것은 감각 기관의 한계인 반면 프로이트에게는 이것이 감각 기관의 목적이다. 왜냐하면 자극의 수용보다 자극에 대한 보호가 더중요한 문제기 때문이다. 또 헬름홀츠는 감각 기관과 의식 사이에 있는 무의식에 관심을 둔 반면, 프로이트는 의식의 뒤편에 있는무의식에 관심을 두었다.

지성사에 프로이트가 준 가장 큰 충격을 꼽는다면 무의식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와 내부의 경계선에 위치한 의식의 역할은 남겨 두었다. 그러나 이미 헬름홀츠에게서 의식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선은 무의식에게 자리를 비워주었고 모듈 이론에 와서는 마음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런데 모듈 이론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좀 더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난다. (계속)

by 아이추판다 | 2008/08/26 16:30 | 트랙백 | 덧글(11)

업데이트 프로이트 :: 인지

프로이트의 책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고전이다. 그런 의미들 중에 하나는 낡고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만약 "정신분석학 강의"나 "꿈의 해석"이 철학이나 문학에 속한다면 오래되었다는 것이 아무 문제가 안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이 여러 번 강조했다시피 정신분석학은 마음의 문제를 탐구하는 과학적 작업이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 스의 자연학을 지금에 와서 읽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한 관찰이나 놀라운 통찰에 감탄하기도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 나온 내용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이후로 과학과 담을 쌓고 지낸 사람이라도 그 후로 많은 과학적 발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경우엔 그 내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좀 많은 듯 하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현대 과학의 발전을 염두에 둔 경우는 흔치 않다. 솔직히 심리학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외부에는 거의 잘 알려져있지 않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책을 넘겨가면서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어디까지 와있는지 살펴보는 몇 편의 글을 써보려고 한다.

프로이트는 정신과 의사고 현대 심리학의 분과 체계에 따라 구분하자면 임상심리학에 속하는 연구를 했지만 그 외에도 인지심리학, 발달심리학, 언어심리학 등에 해당하는 저술도 많이 남겼다. 여기서 살펴보려는 내용은 특히 인지심리학에 해당하는 부분들이다.

인지(cognition)란 좁게는 지각, 판단, 기억, 의사결정, 언어, 학습 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기억과 언어는 특히 프로이트가 많은 관심을 가진 문제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인지는 계산(computation)과 같은 말이다.

계산을 엄격하게 정의하자면 그것만으로도 책 한 권이니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자. 계산은 영어로 calculation과 computation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말의 차이는 calculator와 computer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calculator는 흔히 볼 수 있는 덧셈 뺄셈하는 계산기고 computer는 뭐 말 그대로 컴퓨터다. 우리가 컴퓨터로 덧셈 뺄셈만 하는 게 아니라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블로그도 읽고, 악플도 달고 온갖 일들을 하는 데 이런 일들을 모두 계산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계산=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이다.

프로이트의 시대에 마음에 대한 과학적 연구란 곧 뇌 연구를 말했다. 정신분석학이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은데에는 사례의 해석이라는 연구방법론의 문제도 있지만 마음의 내용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는데 거부감이 컸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은 많은데 예전에 라캉과 관련한 토론에서 어떤 분은 "심리학은 물리주의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다"라고 했고(물리주의란 간단히 말해 마음=뇌라는 것), 또 어떤 분은 "뇌를 뒤져본다고 의식이 어디있는지 알 수 없다" 했는데 모두 이런 태도를 반영한다.

그런데 잠시 컴퓨터를 생각해보자. 컴퓨터에서 가장 기초적인 부품은 트랜지스터다. 트랜지스터는 들어오는 전기 신호가 일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전기 신호를 방출한다. 트랜지스터로 이뤄진 회로는 이런 조건들을 조합해서 복잡한 처리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컴퓨터를 연구한다고 하면 이런 트랜지스터 회로보다(이건 차라리 전자공학과에서 많이 한다) 그 회로를 통해 하는 계산이 관심사다. 결국에는 그 계산도 회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지만 같은 계산이라도 컴퓨터 칩 회사마다 다른 방식으로 회로를 만들기 때문에 계산의 문제는 회로의 문제와 독자적인 영역이다.

뇌는 뉴런이라고 부르는 신경세포들로 이뤄져있다. 뉴런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트랜지스터와 똑같다. 전기 신호를 받고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전기 신호를 방출한다. 세부적인 작동방식은 물론 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뉴런들로 이뤄진 회로가 바로 뇌이다. 우리가 뇌를 컴퓨터와 같은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뇌에서 이뤄지는 계산이 바로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인지다.

요즘 같으면 뇌가 멀쩡하더라도 마음에 문제가 생긴 경우를 "하드웨어는 멀쩡한데 소프트웨어에 바이러스에 걸리거나 버그가 생긴 경우"라고 비유하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시대에는 컴퓨터가 없었고 늘 비유들기를 좋아했던 프로이트도 이렇게 마춤한 비유를 들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마음을 분석한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얼마 전 대통령 기록물을 두고 일어났던 소란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여전히 소프트웨어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2008년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소프트웨어는 매우 자연스러운 개념이다. 그리고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구분에 따라 뇌/마음의 관계를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다. 즉 컴퓨터를 경험하고 나서 우리가 뇌와 마음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이 근본적인 변화를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라고 한다.

인지혁명으로 마음은 뇌와 구분되는 과학적 대상으로 성립할 수 있었다. 또, 마음=계산이라는 관점은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론적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이 결과 심리학, 컴퓨터과학, 뇌과학, 언어학, 인류학 등 여러 학문들이 마음의 문제를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틀이 만들어졌는데 이 틀을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라고 한다.

그렇다면 프로이트가 던졌던 의식/무의식, 기억, 전이 등의 문제에 대해 인지과학은 어떤 대답을 내놓고 있을까? 다음 글에서는 여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by 아이추판다 | 2008/08/25 15:05 | 트랙백(1)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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