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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찾아서

과거의 철학자들이 남긴 책을 읽을 때는 그들이 시대의 한계 안에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칸트는 단 하나의 기하학(유클리드 기하학)만 있고, 그 기하학에 기반한 물리학만 존재하던 시대의 사람이었다. 칸트는 계산이론이나 추상대수,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상대성이론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의 논증에도 당연히 이에 해당하는 부분들이 빠져있다. 따라서 그의 시대에는 빈틈없는 논증도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구멍 투성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칸트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C1. 경험 이전에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있다.
C2. 그런 조건 중에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있다.
C3. 공간의 형식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다.

"책상 위에 고양이가 있다"는 진술만 보면 이 주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보인다. 일상적 공간은 3차원 유클리드 기하학에 근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 이후에 이뤄진 수학과 과학의 발전을 고려하면 이 논증에는 문제가 많다.

우선 C1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여전히 옳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철학적 질문은 "인공지능을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공학적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을 다른 종류의 물리적 장치에 실현하면 그게 바로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한 분야인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에는 '귀납 편향(inductive bias)"라는 용어가 있다.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알고리듬에 따라 똑같은 경험을 해도 다른 학습을 하게 된다는 걸 말한다. 칸트와 현대의 인공지능 연구자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이 질문이 "철학의 문제"이기는 하나 "철학'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이제 C2로 넘어가자.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구별한다. 현대 물리학에서 시공간(spacetime)이라고 할 때는 시간과 공간을 단순히 줄여서 부르는 게 아니다. 시공간은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하나의 공간(?)을 말한다. 똑같은 현상도 관찰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은 갈릴레이에 의해 밝혀졌다. 한 관찰자의 관점을 다른 관찰자의 관점으로 바꾸는 수학적 방법인 갈릴레이 변환은 공간을 회전시키는 것과 동등하다. 현대 물리학에서 이에 대응하는 것이 로렌츠 변환인데 여기서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공간'을 회전시킨다. 즉, 경험을 가능케하는 조건으로서 시간과 공간이 반드시 구분되어야할 이유는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기하학이 단 하나만 있던 시절에는 그 기하학이 미리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칸트 사후에 다양한 기하학들이 탄생했다. 그래서 푸앵카레는 칸트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C2'. 모든 가능한 기하학을 산출할 수 있는 체계가 공간의 형식을 산출한다.

기하학은 여러 가지지만 이런 기하학들은 하나의 체계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 따라서 푸앵카레는 공간의 형식이 아니라 이런 공간의 형식을 산출할 수 있는 체계가 경험을 가능케하는 조건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어떤 기하학이 적절한지 선택해야 한다. 이와 함께 푸앵카레는 칸트의 질문을 심리학적 질문으로 바꾼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공간에 대한 직관을 얻는가? 피아제는 발달심리학 실험을 통해 푸앵카레의 질문에 답하려고 했다. 이 블로그에서는 perceive to act, act to perceive(제목은 영어지만 내용은 한국어니 걱정말고 클릭!)에서 피아제의 연구와 후속 연구들을 소개한 적이 있다.

푸앵카레와 피아제에서 이어지는 연구의 한 사례를 보자. 아래 그림은 예전에도 한 번 소개했던(지식체계의 발견) 탄넨바움과 켄트의 논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단순한 조작을 통해 partition, chain, order, ring, hierarchy, tree, grid, cylinder 등 다양한 공간의 형식을 산출할 수 있다. 탄넨바움과 켄트는 이러한 조작과 베이지언 통계학을 가진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 프로그램에 데이터를 줘서 각각의 지식에 적합한 공간의 형식을 찾아낸다.



아래 그림은 이러한 프로그램에 도시들 간의 거리를 데이터로 주었을 때 찾아낸 지구 표면의 공간적 형식이다. 이 프로그램은 원통(cylinder)의 형식은 산출하지만 구(sphere)의 형식은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구가 원통 모양이 되었지만 어쨌든 칸트의 C2 없이 푸앵카레의 C2'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덧붙여 거리를 측정하려면 어쨌든 기하학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 설명하긴 복잡하기 때문에 일단 넘어가자.


C2가 유효하지 않다면 당연히 C3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푸앵카레는 여기서 다시 한 발 물러나 칸트의 손을 들어준다. 푸앵카레 역시 상대성 이론 이전 시대의 사람이라는 걸 염두에 두자. 푸앵카레는 어떤 공간 형식을 선택하든 근본적인 차이는 없고, 유클리드 기하학이 가장 단순하기 때문에 결국엔 유클리드 기하학을 선택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주장은 나중에 다 뒤집힌다.

이제 C3로 가보자. 다양한 기하학이 있다면, 선험적 공간의 형식이 반드시 유클리드 기하학일 필요가 없다는 건 이미 지적했다. 게다가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물리적 공간의 형식은 유클리드 기하학도 아니다. 게다가 전통적 공간관에서는 공간이 있고 물질이 그거에 놓여있지만, 상대성 이론의 공간관에서는 시공간과 물질이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물리학자들은 공간의 형식을 먼저 가지고 데이터를 그 형식에 맞추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가지고 공간의 형식을 찾아내야 한다.

그건 물리학의 얘기고 일상적 경험은 다르지 않을까? 이것은 다시 심리학의 문제가 된다. 푸앵카레와 피아제는 공간의 형식을 경험적으로 찾아낸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은 거기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마술이 흥미로운 건 우리가 직관적으로 가진 공간의 형식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기들이 오로지 경험으로만 공간의 형식을 발견한다면 마술을 보여주더라도 별로 놀라워하지 않겠지만 어떤 마술에는 아기들도 놀란다. 따라서 인간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응하는 전체적인 공간의 형식은 아니더라도 공간의 형식 중 일부는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아기들은 어떻게 그런 형식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을까? 그런 형식은 아마도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유전자의 프로그래밍은 누가 해놓은 것일까? 신이 아니라면 진화 밖에 없다. 진화도 넓게 보면 학습의 일종이므로 결국에는 개체 수준에서 선천적이지만 여전히 경험의 산물이다. 우리의 크기나 속도가 상대론적 효과를 관찰할 수 있을만큼 크거나 빠르지 않기 때문에 진화적 경험과 개인적 경험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슷한 기하학((실제 심리학 연구를 보면 정확히 같지는 않다)을 직관적인 공간의 형식으로 산출한다.

이제 정리해보자. 칸트의 주장 중에 C1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C2와 C3는 현대의 수학과 과학에 의해 타파된다. 선험적 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구분한다고 해도, 선험적 공간이 칸트가 주장한 바와 같아야할 논리적 이유도 없고 경험적으로도 그렇지 않다. 유일하게 남는 C1은 칸트의 시대에는 오로지 철학만의 문제였으나 이제는 과학과 공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기관은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라고 한다. 사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하나의 연구소가 아니라 여러 분과학문별 연구소의 집합체다. 60~70개쯤 된다고 한다. 심리학의 종주국인 독일답게 막스 플랑크 심리학 연구소도 있다. 아니 있었다. 이제는 막스 플랑크 인지 및 신경과학 연구소(Max Planck Institut für Kognitions- und Neurowissenschaften)이다. 심리학을 탄생시킨 나라가 자신의 대표적 연구소에서 심리학의 간판을 뗀 것이다. 이는 전통적 심리학이 이제 인지과학과 신경과학의 결합체로 재규정되고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모든 딱딱한 것은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칸트의 철학적 문제는 한때 물리학과 심리학의 문제이기도 했으며 이제는 인지과학과 뇌과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가 우리의 출발점이다. 이제 어디로 가볼까?

저주받은 운명 (아이추판다)
철학이라는 동네북 (노정태님)
기하학과 마음 이론 (아이추판다)
칸트의 선험적 공간, 반과학주의와 반인문주의 (노정태님)

by 아이추판다 | 2009/07/11 15:34 | 트랙백(1) | 핑백(2) | 덧글(25)

라캉주의자들의 까임방지권

칸트와 상대론에 대한 글을 하나 쓰고 라캉주의자들의 논쟁 전략에 대한 글을 하나 썼다. 어느 쪽을 먼저 공개할까하다가 이쪽을 먼저 공개한다. 칸트와 상대론에 대한 글은 내일 공개할 것이다.

노정태님과 나는 라캉주의에 대해 같은 평가를 내린다. 문제는 그런 평가의 전제가 다르다는 건데, 내가 볼 때는 그 전제 중에 하나가 위험하다.


노정태님은 라캉주의자들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줘서는 안되고 라캉주의가 의학으로 인정받으려면 그만한 의학적 성과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노정태님과 나의 이러한 평가는 위와 같은 학문의 지형도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1년간 관찰해본 결과 라캉주의자들에게 이런 주장은 씨알도 안먹힌다.

왜냐하면 라캉주의자들은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로서 획정권을 발휘하여 지형도를 아래와 같이 고쳐 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캉주의자들은 "우리는 철학이지 의학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라 윤리와 욕망의 문제다"라고 간단히 피해버린다. 내버려두면 총기난사를 저지를 사람이 정신분석을 받고 공격성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면 그게 치료가 아니라 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라캉주의자들에 따르면 그건 치료가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 의학, 과학 그리고 철학의 범주를 재정의함으로써 외부의 비판을 간단히 무화시킨다. 누구 맘대로 재정의냐고 물어보면, 까임 방지권 "라캉은 철학이거든요?"를 발동한다.

그러면 라캉은 철학이나 과학이니 이렇게 획정하는 게 옳으니 그르니하고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 안에서 다투는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라캉주의자들과 과학의 정의가 뭐고 의학의 정의는 무엇이며 철학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 '철학적 논쟁'을 벌여야 한다. 이렇게 철학적 논쟁으로 끌고 들어가서 과학적 비판을 덮어버리는 게 라캉주의자들의 수법이다.

노정태님의 주장은 근본적으로는 '까임방지권'이 있고 칸트의 선험철학이나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의 경우에는 '까임방지권'이 정당하지만 라캉의 경우에는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당성은 철학적 판단에 따른다. 나도 과학적으로 비판할 여지가 없는 철학이나 또는 과학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비판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학적으로 볼 때' 얘기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노정태님의 주장은 철학의 어떤 부분이 과학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지 철학적으로 먼저 검토해보고 그 다음에 과학을 들이대야 한다는 거고, 내 생각은 일단 과학을 들이대서 비판을 해보고 비판이 되면 되는거고, 안되면 그건 철학적 문제다.

근대의 과학과 철학의 역사를 봐도 일단 과학을 들이대고 나중에 철학적으로 검토했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칸트는 마음이 시간에 따라서만 변하고 공간에 따라서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심리학은 과학이 될 수 없다고 논증했다. 과학적 심리학이 등장한 것은 칸트의 이 논증을 철학적으로 논파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연과학의 실험방법들을 사람에게도 적용해보니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초기 심리학의 실험들은 반응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걸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면 이렇다. 자료의 양이 늘어날 수록 자료를 처리하는 시간도 늘어나기 마련인데 알고리듬마다 늘어나는 양태가 다르다. 이걸 시간 복잡성(time complexity)이라고 한다. 사람의 경우 자극의 수를 바꿔가며 반응 시간을 측정해보면 시간 복잡성을 알 수 있고 이것으로부터 사람의 머리 속 알고리듬을 추정할 수 있다. 끝. 그런데 이런 정당화는 심리학의 초기에는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이런 개념을 다루는 계산이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당화는 못했지만 실험을 해보니 결과가 나오고 결과를 들여다보니 뭔가 설명할 건덕지가 보이고 그렇게 진행된 것이다.

왜 이게 중요한가? 우리는 모두 시대의 자식이고, 우리의 상상력은 시대의 한계에 갇혀있다. 아무리 과학을 괄호치고 순수하게 철학적으로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정말로 '순수한 철학'이 될 수는 없다. 칸트는 단 하나의 기하학만 존재하고, 물리학은 그 기하학에 의지며, 과학적 심리학은 존재하지도 않던 시대의 사람이다. 칸트는 심리학이 과학이 될 수 없다고 했지만 인지과학에는 칸트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여럿 있다.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인 호프스태터가 그렇다. 그런 시대의 한계를 고려하고 읽어보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은 여럿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통찰이 앞으로도 유효할지 어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의 그런 평가 역시 시대의 한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프로이트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라캉은 사기꾼 취급하고, 라캉주의자들은 반동으로 보는데 그건 그들이 산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칸트나 프로이트는 자기 시대를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라캉은 사기꾼이지만 동시대의 다른 정신분석학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면 라캉의 시대에 위궤양은 정신분석학의 대상이었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약간 봐줄 수 있다. 라캉주의자들은 그냥 답이 없다. 라캉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반동성을 철학으로 재포장하려고 발버둥친다. 이들과 진지하게 철학적 논의를 하는 것은 라캉주의자들의 수명을 연장시킬 뿐이고 똑같이 반동적이 될 뿐이다.

p.s. 세번째 짤방은 라캉주의자들을 위한 선물이다. 글을 쓸 때 첫페이지에 꼭 첨부하기 바란다.

by 아이추판다 | 2009/07/10 14:22 | 트랙백 | 핑백(3) | 덧글(29)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

결국 여기서 핵심은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이 글에서 계속 반복될 것이므로 T라고 하자. 노정태님의 주장은 이렇다.

주장1: T에 해당하는 주제가 있다. 인식 주체와 세계의 문제,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 형이상학적 주제 등
주장2: 어떤 주제가 T에 해당하는 지 판단하는 것 역시 T에 속한다. "철학적 주제가 과학적 대상으로 독립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철학적 질문'이다."

내 생각에 주장1은 확실치 않고, 주장 2는 잘못되었다. 주장2가 옳다면 칸트의 공간에 대한 논증은 물리학의 개입을 허용치 않으므로 여전히 옳고, 따라서 리만과 아인슈타인이 틀린 것이다. 게다가 주장2는 라캉주의자들에게 면죄부를 준다.

라캉주의자들에 따르면 라캉주의 역시 T에 속한다. "라캉주의는 철학이거든요??" 따라서 라캉주의는 과학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예전에 한 번 지적한 바 있는데 그 때 노정태님은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

개별적인 분과 학문이 과학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은 철학의 임무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판단이 이성적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은 철학의 임무가 맞습니다. 그리고 과학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의 부분집합일 뿐 두 가지가 서로 등가적인 것은 아니죠. 그런데 저는 정신분석의 논리가 이성적일 수는 있어도 과학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라캉주의에 대한 아이추판다님의 (심리학도로서의) 비판에 동의한 거고요.

노정태님은 '자신은' 라캉주의가 T에 속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라캉주의자들에게도 라캉주의가 T에 속한다고 판단할 권리는 여전히 있다. 노정태님은 이 권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라캉주의자들의 방어 자체도 정당한 것이다. 결국에는 평행선이다. 이것도 이미 한 번 한 얘기인데 노정태님은 이런 식으로 답변했다.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이 지닌 다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그러니까 라캉주의자들은 라캉주의가 T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라캉주의가 T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둘 다 철학적으로는 정당하지만 서로 비판과 견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이것은 문제를 철학적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밖에 안된다. 라캉주의자들의 전략도 결국 그것이다. 환각의 원인을 묻는데 환각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따지는 게 가능하냐는 둥 마냐는 둥 이런 식의 끝도 없는 소릴하면서 대답을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택광은 조승희가 정신분석을 받았으면 총기 난사 안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좁게 잡아도 보건 정책에 상당한 이슈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의 의료보험과 같은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이런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도대체 그런 증거가 어디있나. 이렇게 말하면 이택광은 다시 자신이 얘기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라 윤리나 욕망과 같은 문제이며 따라서 과학적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떠들 것이다. 이렇게 철학적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노정태님은 이게 지금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니 비판과 견제 다 좋은데 그래서 정신분석에 의료보험 혜택을 줘야하나 말아야하나?

노정태님은 "과학이 오직 경험 가능한 대상에 대해서만 성립하는 지적 활동"이라는 칸트의 규정 자체는 옳다고 하지만 이 규정은 별 쓸모가 없다. 어떤 것이 경험 가능한 대상인지 아닌지는 불변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사람의 뇌활동은 얼마 전까지만해도 경험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어떤 것이 경험 가능한지 아닌지는 당대의 과학에 의존한다. 라캉주의가 T가 아니라고 하기 위해서는 라캉주의의 내용 중 적어도 일부는 현대 과학에서 경험가능한 대상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과학의 개입을 허용한다. 주장2를 적용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라캉주의를 반박할 수 없다.

노정태님은 "나는 라캉주의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이라고 말하면서 라캉주의나 그와 유사한 온갖 반과학주의에 뒷문을 열어준다.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 그것은 뒷문이다. 우리는 그 문을 대못으로 두드려 막아야 한다.

by 아이추판다 | 2009/07/09 14:37 | 트랙백(1) | 핑백(2) | 덧글(22)

반란과 찬탈

철학이라는 동네북

1) 공간 개념 얘기 나오고 나서 수학이 반란을 일으키고 물리학이 찬탈했다는 말이 나오면 이거 밖에 없다.

1804년 칸트 사망
1868년 리만, "기하학의 기초에 대해서"
1916년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


2) 형이상학이 '본성적으로' 다른 모든 것에 선행하는 것과 '인식의 순서'에서 앞서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자연에 대한 탐구가 먼저지 존재와 같은 추상적 질문이 먼저가 아니다.


3)
철학적 주제가 과학적 대상으로 독립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철학적 질문'이다. 칸트 같은 경우 인간은 '소질로서의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 한들 '나는 왜 사는가?', '신이 이 세계를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냥 생겨났는가?' 따위 질문을 머리에서 떨쳐낼 수 없다고 논증한 바 있다. 즉 칸트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주제'들은 철학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1) 어떤 것이 철학인지 아닌지는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이지 본성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철학'이라는 말의 의미는 천년전, 백년전, 그리고 지금이 모두 다르다. 동양에는 근대 이전에 아예 그런 말도 없었다. 미래에 과학철학이 철학의 한 분과가 아니라 과학학의 한 분과로 편입된다면 그때는 더이상 '철학적 질문'이 아니다.
3-2) 인간이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질문을 하는지는 이제 심리학적 검증의 대상이지 철학적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하루에 토마토 세 개씩 먹으면 비타민C가 측두엽의 활동을 억제해서 그런 생각 안든다.(물론 뻥)
3-3) 그 칸트가 공간 개념은 철학의 주제라고 '논증'했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4) 말을 꼬아 쓰는 건 내 취향이지만,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서 반박하면 피곤하다.

by 아이추판다 | 2009/07/08 03:09 | 트랙백 | 핑백(3) | 덧글(11)

저주받은 운명

과학철학자들 중에는 과학의 역사가 조금만 다르게 흘렀더라면 지금의 과학은 우리가 알고있는 그런 형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다른 학문에도 모두 마찬가지다. 철학의 경우도 역사가 어찌어찌 흐르다보니 고대 철학의 하위 분과 몇몇이 '철학'이라는 간판을 물려받고 인문대의 철학과라는 제도로 자리잡았을 뿐이다. 역사의 요동이 다른 방향으로 굽이쳤다면 오늘날의 철학은 지금과 사뭇 다른 범위의 영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수학은 자연을 다루지도 않고, 경험에 근거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따져 자연과학이라고 볼 수 없다. mathematics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를 가리키는 '마테마티코이'에서 온 것이다. 플라톤이 아카데메이아에 기하학을 모르는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지금도 논리학이나 수학기초론은 철학과와 수학과 양쪽에서 다룬다. 역사가 어떻게 요동쳤다면 수학과가 인문대에 있거나 철학과와 나눠지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리학도 그렇다. 물리학은 고대의 '자연학'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자연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중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분야다. 철학의 고유한 주제라고 여겨지는 '형이상학'은 영어로 metaphysics인데 이것은 안드로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편집하면서 이들 주제를 자연학(physics)의 뒤에 배치한데서 유래했는데, 힐쉬베르거의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한 도서분류가 아니라 자연학에서 형이상학으로 나아가는 인식의 순서를 함의한다.

서양철학에서 '공간'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플라톤과 기하학의 얘기도 했지만 고대철학에서 공간 개념은 여러 철학을 구별하는 중요한 지표다.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였던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차이도 결국 공간과 운동의 문제다. 이것은 근대철학에서도 이어진다. 데카르트나 칸트는 말할 나위도 없다. 화이트헤드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철학자라면 누구나 공간에 대해 한 마디씩은 던졌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공간이라는 주제는 물리학이 철학을 제치고 공간에 대한 논의에 주도권을 쥐면서, 이제는 공간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위해서는 물리학적 논의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금 자연학이 형이상학을 인식의 순서에서 앞서게 된 것이다.

생물학이나 심리학도 빠질 수 없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저작 중에는 오늘날로 치면 물리학보다 생물학이나 심리학에 속하는 것이 더 많다. 생물학에 속하는 걸로는 "동물지", "동물부분론", "동물이 걸어다니는 것에 관해서", "동물의 운동에 관해서", "동물의 생식에 관해서", "오래 사는 것과 짧게 사는 것", "삶과 죽음", "호흡"이 있고 심리학에 속하는 것으로는 "영혼에 관해서", "감각과 감각의 대상", "기억과 회상", "잠과 깸", "꿈", "잠잘 때의 예지"가 있다. 이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할만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 학문은 인식론과 같은 근대철학의 핵심적 주제에서도 주도권을 넘겨 받았다.

칸트는, 정치적 현실은 중세나 다름없었던 프로이센에서, 선행하는 근대의 유산들 즉 인문주의적 학문 태도, 계몽주의의 이성중심주의, 프랑스 혁명의 인간 해방 등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하나의 체계로 수렴하려 한다. 그의 중심은 '인간'이고, 이는 다시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로 나뉘어진다. 칸트를 비롯한 피히테, 셸링, 헤겔 등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은 철학적 체계 구축을 시도했고 이는 철학사의 위대한 업적의 하나로 남아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그들의 철학적 체계는 파탄을 맞이하였고, 이제 인간의 인식에 대한 탐구는 심리학과 자연과학에,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책 추구는 사회과학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마크 C. 헨리, 강유원 외 편역, "인문학 스터디", 라티오, 77-78쪽.

이러한 일련의 변환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며,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본성적으로 철학적일 주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주제가 끝내 그렇게 남을지는 알 수 없다. 칸트는 자기가 무덤에 묻힌지 몇 년 못가서 수학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물리학자들이 왕위를 찬탈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주제가 철학적이라고 단정짓고, 전통적인 철학의 범주 안에만 가두려는 발상은 반동적일 수 있다. 오히려 필요한 태도는 우리 앞에 나타난 사태를 바닥까지 철저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근대철학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것처럼 해당 주제를 철학으로부터 독립하게 만들 것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태도가 철학의 종말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철학자들은 오이디푸스의 저주받은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by 아이추판다 | 2009/07/07 23:51 | 트랙백(2) | 핑백(4)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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