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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과학, 진학과 진로

방명록에 '동으로'님께서 질문을 하나 해주셨다. 요약하자면 대학원 진학과 이후 진로에 관한 것인데 마침 대학원 입시 시즌이기도 하니 다른 분들께도 도움이 될까해서 독립적인 포스팅으로 답변 드린다.

우선 대학원 진학. 인지과학은 단일 학문이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처럼 여러 분과학문을 묶어서 가리키는 말이다. 인지과학에 속하는 분과학문에는 심리학, 뇌과학, 인공지능, 언어학 및 인접 분야들이 있다. 따라서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하려면 인지과학협동과정이나 뇌인지과학과처럼 '인지과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학원 과정으로 들어가는 방법과 심리학과, 생물학과, 컴퓨터공학과, 언어학과 등 기존 학과의 대학원에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어차피 들어가면 똑같은 실험실에서 연구하기 때문에 어디로 들어가든 공부하는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행정적인 문제나 장학금 지원 등에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잘 찾아보고 결정하면 된다.

대학원 과정이 있는 학교는 별로 없는데 부산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에 인지과학 협동과정이 있고, 올해 고려대, 서울대, 이화여대에 뇌인지과학/공학과가 생겼다. 고려대와 서울대의 뇌인지과학/공학과는 WCU 사업으로 신설된 것이다. 서울대에는 뇌과학협동과정, 인지과학협동과정, 뇌인지과학과 이렇게 비슷한 이름의 세 가지 대학원 과정이 있는데 내용이야 다 비슷하지만 행정적으로 다 다른 과정이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대학원 과정들은 기존 학과보다 역사가 짧고, 체제가 잘 안 잡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인지과학'이라는 이름만 보고 지원하지 말고 여러 모로 잘 비교해봐야 한다.

이런 학과들은 실험실 체제로 되어 있고, 학생도 실제로는 실험실 단위로 뽑기 때문에 지도 교수를 잘 고르는 게 중요하다. 관심있는 연구 주제를 다루는 교수를 찾아서 직접 만나도 보고, 대학원생들이나 조교 등을 통해 그 교수의 성격 등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참고로 대학원생에게는 연구 주제보다는 교수의 성격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강조해둔다. 그 이유는.. 겪어보면 안다. ㅋㅋ

인지과학은 대단히 넓은 분야기 때문에 진로문제는 학교나 전공에 따라 천차만별라서 자세히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대체로 세부전공이 심리학이나 뇌과학 쪽이라면 주로 학계로 간다. 인공지능이나 HCI 쪽이라면 기업 쪽으로 갈 수도 있겠다. 심리학이나 뇌과학 쪽을 전공하고 기업 쪽에 자리잡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많지도 않다. 가끔은 우주비행사(?)가 되는 사람도 있다. 이 부분은 직접 자세히 알아보는 수 밖에 없다.

일단 관심이 있다면 석사과정을 다니면서 탐색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기 학교 자기 전공의 선배들은 어떤 쪽으로 진출하는지, 자기가 연구에 적성이 맞는지 등등은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특히 많은 학생들이 의외로 연구라는 게 삽질의 연속이라는데 좌절한다.

개인적으로는 인지과학을 공부한 사람이 전공을 살리는 방법은 직무가 꼭 전공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아도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지과학은 사람에 관한 것이고, 무슨 일을 하든 결국 사람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다 때려치우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더라도 학습과 기억에 대한 인지심리학을 활용할 수 있고, 사기를 치려면 지각심리학이나 사회심리학을.. (쿨럭) 그래서 인지과학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꼭 전공하지 않고 취미로 공부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 써놓고 보니 별 얘기는 없는데 혹시 인지과학 쪽으로 대학원에 진학하시려는 분들 중에 궁금한 점을 댓글로 달아주시면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몇 가지 더 얘기드리도록 하겠다. 일단은 여기까지.

by 아이추판다 | 2009/09/30 19:03 | 트랙백 | 덧글(14)

공간을 찾아서

과거의 철학자들이 남긴 책을 읽을 때는 그들이 시대의 한계 안에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칸트는 단 하나의 기하학(유클리드 기하학)만 있고, 그 기하학에 기반한 물리학만 존재하던 시대의 사람이었다. 칸트는 계산이론이나 추상대수,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상대성이론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의 논증에도 당연히 이에 해당하는 부분들이 빠져있다. 따라서 그의 시대에는 빈틈없는 논증도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구멍 투성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칸트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C1. 경험 이전에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있다.
C2. 그런 조건 중에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있다.
C3. 공간의 형식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다.

"책상 위에 고양이가 있다"는 진술만 보면 이 주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보인다. 일상적 공간은 3차원 유클리드 기하학에 근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 이후에 이뤄진 수학과 과학의 발전을 고려하면 이 논증에는 문제가 많다.

우선 C1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여전히 옳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철학적 질문은 "인공지능을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공학적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을 다른 종류의 물리적 장치에 실현하면 그게 바로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한 분야인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에는 '귀납 편향(inductive bias)"라는 용어가 있다.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알고리듬에 따라 똑같은 경험을 해도 다른 학습을 하게 된다는 걸 말한다. 칸트와 현대의 인공지능 연구자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이 질문이 "철학의 문제"이기는 하나 "철학'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이제 C2로 넘어가자.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구별한다. 현대 물리학에서 시공간(spacetime)이라고 할 때는 시간과 공간을 단순히 줄여서 부르는 게 아니다. 시공간은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하나의 공간(?)을 말한다. 똑같은 현상도 관찰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은 갈릴레이에 의해 밝혀졌다. 한 관찰자의 관점을 다른 관찰자의 관점으로 바꾸는 수학적 방법인 갈릴레이 변환은 공간을 회전시키는 것과 동등하다. 현대 물리학에서 이에 대응하는 것이 로렌츠 변환인데 여기서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공간'을 회전시킨다. 즉, 경험을 가능케하는 조건으로서 시간과 공간이 반드시 구분되어야할 이유는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기하학이 단 하나만 있던 시절에는 그 기하학이 미리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칸트 사후에 다양한 기하학들이 탄생했다. 그래서 푸앵카레는 칸트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C2'. 모든 가능한 기하학을 산출할 수 있는 체계가 공간의 형식을 산출한다.

기하학은 여러 가지지만 이런 기하학들은 하나의 체계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 따라서 푸앵카레는 공간의 형식이 아니라 이런 공간의 형식을 산출할 수 있는 체계가 경험을 가능케하는 조건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어떤 기하학이 적절한지 선택해야 한다. 이와 함께 푸앵카레는 칸트의 질문을 심리학적 질문으로 바꾼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공간에 대한 직관을 얻는가? 피아제는 발달심리학 실험을 통해 푸앵카레의 질문에 답하려고 했다. 이 블로그에서는 perceive to act, act to perceive(제목은 영어지만 내용은 한국어니 걱정말고 클릭!)에서 피아제의 연구와 후속 연구들을 소개한 적이 있다.

푸앵카레와 피아제에서 이어지는 연구의 한 사례를 보자. 아래 그림은 예전에도 한 번 소개했던(지식체계의 발견) 탄넨바움과 켄트의 논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단순한 조작을 통해 partition, chain, order, ring, hierarchy, tree, grid, cylinder 등 다양한 공간의 형식을 산출할 수 있다. 탄넨바움과 켄트는 이러한 조작과 베이지언 통계학을 가진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 프로그램에 데이터를 줘서 각각의 지식에 적합한 공간의 형식을 찾아낸다.



아래 그림은 이러한 프로그램에 도시들 간의 거리를 데이터로 주었을 때 찾아낸 지구 표면의 공간적 형식이다. 이 프로그램은 원통(cylinder)의 형식은 산출하지만 구(sphere)의 형식은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구가 원통 모양이 되었지만 어쨌든 칸트의 C2 없이 푸앵카레의 C2'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덧붙여 거리를 측정하려면 어쨌든 기하학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 설명하긴 복잡하기 때문에 일단 넘어가자.


C2가 유효하지 않다면 당연히 C3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푸앵카레는 여기서 다시 한 발 물러나 칸트의 손을 들어준다. 푸앵카레 역시 상대성 이론 이전 시대의 사람이라는 걸 염두에 두자. 푸앵카레는 어떤 공간 형식을 선택하든 근본적인 차이는 없고, 유클리드 기하학이 가장 단순하기 때문에 결국엔 유클리드 기하학을 선택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주장은 나중에 다 뒤집힌다.

이제 C3로 가보자. 다양한 기하학이 있다면, 선험적 공간의 형식이 반드시 유클리드 기하학일 필요가 없다는 건 이미 지적했다. 게다가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물리적 공간의 형식은 유클리드 기하학도 아니다. 게다가 전통적 공간관에서는 공간이 있고 물질이 그거에 놓여있지만, 상대성 이론의 공간관에서는 시공간과 물질이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물리학자들은 공간의 형식을 먼저 가지고 데이터를 그 형식에 맞추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가지고 공간의 형식을 찾아내야 한다.

그건 물리학의 얘기고 일상적 경험은 다르지 않을까? 이것은 다시 심리학의 문제가 된다. 푸앵카레와 피아제는 공간의 형식을 경험적으로 찾아낸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은 거기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마술이 흥미로운 건 우리가 직관적으로 가진 공간의 형식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기들이 오로지 경험으로만 공간의 형식을 발견한다면 마술을 보여주더라도 별로 놀라워하지 않겠지만 어떤 마술에는 아기들도 놀란다. 따라서 인간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응하는 전체적인 공간의 형식은 아니더라도 공간의 형식 중 일부는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아기들은 어떻게 그런 형식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을까? 그런 형식은 아마도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유전자의 프로그래밍은 누가 해놓은 것일까? 신이 아니라면 진화 밖에 없다. 진화도 넓게 보면 학습의 일종이므로 결국에는 개체 수준에서 선천적이지만 여전히 경험의 산물이다. 우리의 크기나 속도가 상대론적 효과를 관찰할 수 있을만큼 크거나 빠르지 않기 때문에 진화적 경험과 개인적 경험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슷한 기하학((실제 심리학 연구를 보면 정확히 같지는 않다)을 직관적인 공간의 형식으로 산출한다.

이제 정리해보자. 칸트의 주장 중에 C1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C2와 C3는 현대의 수학과 과학에 의해 타파된다. 선험적 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구분한다고 해도, 선험적 공간이 칸트가 주장한 바와 같아야할 논리적 이유도 없고 경험적으로도 그렇지 않다. 유일하게 남는 C1은 칸트의 시대에는 오로지 철학만의 문제였으나 이제는 과학과 공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기관은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라고 한다. 사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하나의 연구소가 아니라 여러 분과학문별 연구소의 집합체다. 60~70개쯤 된다고 한다. 심리학의 종주국인 독일답게 막스 플랑크 심리학 연구소도 있다. 아니 있었다. 이제는 막스 플랑크 인지 및 신경과학 연구소(Max Planck Institut für Kognitions- und Neurowissenschaften)이다. 심리학을 탄생시킨 나라가 자신의 대표적 연구소에서 심리학의 간판을 뗀 것이다. 이는 전통적 심리학이 이제 인지과학과 신경과학의 결합체로 재규정되고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모든 딱딱한 것은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칸트의 철학적 문제는 한때 물리학과 심리학의 문제이기도 했으며 이제는 인지과학과 뇌과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가 우리의 출발점이다. 이제 어디로 가볼까?

저주받은 운명 (아이추판다)
철학이라는 동네북 (노정태님)
기하학과 마음 이론 (아이추판다)
칸트의 선험적 공간, 반과학주의와 반인문주의 (노정태님)

by 아이추판다 | 2009/07/11 15:34 | 트랙백(1) | 핑백(2) | 덧글(25)

인지과학에 대한 책 몇 권

지난 주에 almor님이 인지과학에 대한 '쉬운' 책을 소개해달라고 하셔서 쓰는 포스팅.

Commented by almor at 2009/06/17 15:28 안녕하세요^^

최근 이 블로그를 알게되었는데, 좋은 글들이 많아서 잘 읽고 있습니다. 불쑥 이런 말씀 드리기 염치없지만, "인지과학"에 대한 쉬운 책을 추천받고 싶습니다.

인지과학에 대한 책을 읽고 싶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싶습니다.

"(하루밤에 읽는)진화심리학"과 같은 책을 읽으면서 인지심리학과 진화심리학의 개념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심화학습을위하여 "빈 서판", "황제의 새마음", "물리주의" 등을 읽어 보려고 했으나 너무 어려워서 손을 놓게 되었습니다. 그 두간극을 메워줄 수 있는 좋은 책은 없을까요? 저는 번역투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국인이 지은 책을 읽고 싶은데가능할까요?

(중략)

그냥 염치없이 "책 좀 추천해 주세요!!"라고 말하기 민망해서 이런저런 심정을 써보았습니다.

기본서 한두권 정도 추천해 주시면 열심히 읽고 또 배움을 청하겠습니다.^^

인지과학이란 마음, 뇌, 계산(computation)에 대한 철학, 심리학, 언어학, 컴퓨터과학, 뇌과학, 인류학 등의 학제적 연구를 말한다. almor님은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책을 잡으셨던 것 같다. 일단 이 세 권의 책에 대해 먼저 설명하겠다.

"황제의 새마음"은 인지과학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인지과학, 좀 더 좁게는 인공지능에 반대하는 책이다. 저자인 로저 펜로즈도 대단한 수리물리학자고 책의 내용도 상당히 풍부하지만,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난 좀 우월한 듯 ㄲㄲ"라서 좀 황당하다.

황제의 새마음 -상
로저 펜로즈/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황제의 새마음 -하
로저 펜로즈/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빈 서판"은 "언어 본능",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이은 스티븐 핑커의 삼부작(?) 마지막편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순서대로 읽어야 하느냐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리고 핑커의 관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개설서로는 '약간' 무리가 있다. 특히 핑커는 인지과학에서 가장 강한 선천론자(nativist)라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다 두껍고 어려운 책이므로 중간에 나오는 재미있는 실험이나 사례들만 골라 봐도 괜찮다.

언어본능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문미선.신효식 옮김/동녘사이언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옮김/소소
빈 서판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옮김/사이언스북스

"물리주의"는 아마 김재권의 책일 것 같은데 이건 대중서가 아니므로 가급적이면 손을 안대시는 쪽이 바람직하다. 심리철학적 주제에 흥미가 있다면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 더글라스 호프스태터가 편집한 "이런, 이게 바로 나야"를 추천한다. 소설가, 철학자, 과학자들이 마음의 문제에 대해 쓴 단편소설과 에세이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재밌다.

물리주의
김재권 지음, 하종호 옮김/아카넷
이런, 이게 바로 나야! 1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외 엮고지음, 김동광 옮김/사이언스북스
이런, 이게 바로 나야! 2
대니얼 C. 데닛/사이언스북스

인지과학이 뭔지 궁금한 사람이 제일 쉽게 기댈 수 있는 책은 성균관대 심리학과 이정모 교수의 "인지과학"이다. 인지과학의 역사, 개념, 각 분과 학문의 역할, 최근 동향까지 자세하게 알려준다.

인지과학
이정모 지음/성균관대학교출판부

다만 대중서라기보다 교과서에 가깝기 때문에 재미있는 사례도 들거나 농담을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7백쪽이 넘는 두께 때문에 호기심으로 접근하기에는 좀 질릴 수도 있다. 이런 분들은 1부 "인지과학의 기초" 정도만 읽어도 된다. 2부 "인지과학의 제영역"은 철학, 뇌과학, 인공지능, 심리학의 영역에서 인지과학과 관련된 지식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심심할 때마다 아무데나 펼쳐서 읽어도 좋고 해당 내용을 다루는 다른 책은 많이 있으니까 굳이 다 보지 않아도 괜찮다.

인지과학을 한 권으로 욕심이 없다면 "우리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할까"를 권하고 싶다. 기억에 대한 심리학과 뇌과학의 연구성과들을 100쪽 정도로 간단히 소개하는 책이다. 전공자라면 개론서부터 읽어나가는 게 맞겠지만, 그냥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이렇게 구체적인 주제를 다루는 책들을 보는 게 더 흥미를 돋울 수 있겠다.

우리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할까
프란시스 위스타슈 지음, 이효숙 옮김/알마

위스타슈의 책을 읽고 땡기면 기억에 대한 심리학 책 세 권에 소개한 책들을 보는 것도 좋겠다.

by 아이추판다 | 2009/06/21 22:56 | 트랙백 | 핑백(2) | 덧글(14)

업데이트 프로이트 :: 모듈

초심리학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의식이 <의식Bw.>이라고 기술되는 특수한 조직의 한 기능이라고주장한다. 의식이 산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의 지각과 정신 기관 내부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쾌와 불쾌의감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각-의식W-Bw>의 조직에 공간 속에서의 한 위치를 할당하는 것이 가능할것이다. 그것은 외부와 내부 사이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외부 세계를 향하고 있고 다른 정신 조직들을 에워싸고 있을것이다.

(중략)

자극에 <대한 보호>는 자극<의 수용>보다 유기적 생명체에 더 중요한 기능이다. 보호적 방패는 그 나름의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으며, 외부 세계에서 작동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위협적 산물에 대항해서 그 보호막 속에서 작동하는 에너지의특수한 변형의 틀을 보존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쏟는다. 그 위협적 산물은 그 변형의 틀을 깨부수려 하고 따라서 그것은 파괴를향해서 움직인다. 자극 <수용>의 주된 목표는 외부 자극의 방향과 성격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외부세계의 작은 표본을 채취해서 그것을 작은 양으로 견본처리하는 것으로 족하다. 고도로 발달된 유기체의 경우 이전 소포의 수용적외피층은 신체 내부의 심층으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물론 그것의 일부가 자극에 대항하는 방패 바로 밑에 있는 표면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것이 감각 기관들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열린책들. 292-297.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프로이트보다 한 세대 전에 헤르만 폰 헬름홀츠(1821~1894)에 의해 시작되었다. 인지과학에 계승된 무의식 개념은 프로이트보다 헬름홀츠 쪽에 더 가깝다.

헤르만 폰 헬름홀츠


잠깐 얘기를 돌려 사람의 눈에 대해 얘기해보자. 우리는 눈이 대단히 정교한 기관이라고 알고 있다. 가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사람의 눈을 근거로 신에 의한 창조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사람의 눈을 신이 창조했다면 신은 변태가 틀림없다. 눈으로 들어온 빛은 망막에 물체의 이미지를 맺는다. 그러면 이 이미지를 망막에서 뇌로 전달하는 신경은 망막 앞쪽에 있어야 할까, 아니면 뒤쪽에 있어야 할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당연히 망막 뒤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디지털 카메라도 그런 식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인간의 신경이 망막 앞에 있다. 이러다보니 신경이 망막을 가려서 상이 맺히는 걸 방해할 뿐만 아니라 어쨌든 뇌로 연결되어야 하니 망막을 뚫고 지나가서 맹점이 생긴다. 신은 변태가 확실하다.

눈이 이렇게 엉터리로 생겨먹었는데도 정작 우리는 그걸 전혀 느끼지 못한다. 망막을 가린 신경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맹점도 느낄 수가 없다. 단순히 느낄 수없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정확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렌즈 앞에 그물을 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물은 커녕 오히려 사진이 더 좋아졌다면 누군가 포샵질을 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헬름홀츠가 내린 결론이었다. 헬름홀츠는 이 '포샵질'을 무의식적 추론(unconscious inference)라고 불렀다. 감각 기관으로부터 들어온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원래의 정보를 추론해서 복원하는 무의식적 과정이 의식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적 추론의 결과만 의식에 떠오르기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적 추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가 쉽지 않다. 이것을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이 착시 현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 추론은 불완전한 정보를 복원해서 완전한 정보로 만들어주지만, 가끔은 더 엉터리 정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추론은 추론일 뿐이기 때문에 항상 맞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래 그림은 유명한 뮐러-라이어 착시다. 붉은 색으로 칠한 표시를 보면 알 수 있자만 세 선분의 길이는 모두 똑같다. 그렇지만 가운데 선분이 위나 아래의 선분보다 더 길어보인다. 분명히 세 선분의 실제 길이도 같고 아마 망막에 맺히는 상도 같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보가 의식에 도달할 때는 가운데 선분보다 긴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분명히 세 선분의 길이가 같다고 알고 있더라도, 이런 의식적 생각은 무의식적 추론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여기서 무의식적 추론의 중요한 성질을 알 수 있다. 무의식적 추론은 그 추론 과정을 의식에게 드러내지도 않을 뿐만아니라 의식의 개입을 받지도 않는다. 의식은 무의식적 추론이 내놓은 결과만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헬름홀츠의 무의식 개념은 현대의 모듈 이론으로 이어진다. 모듈(module)은 컴퓨터과학에서 넘어온 용어인데 커다란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독립적인 작은 부분들을 말한다. 윈도에서 파일을 열거나 저장할 때 뜨는 창의 모양은 어느 프로그램에서나 다 똑같다. 윈도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모듈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모듈 이론은 마음이 여러 개의 모듈로 되어 있다고 본다. 이 모듈을은 헬름홀츠의 무의식적 추론과 마찬가지로 의식이나 다른 모듈이 그 내부에 접근하거나 개입할 수 없다. 각각의 모듈은 시각 정보를 처리한다든지,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다든지, 남이 나한테 사기치는 게 아닌지 판단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고유한 자기 영역이 있다. 마음은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인지적 기능들이 모듈의 형태로 하나씩 덧붙는 식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에 이런 모듈은 선천적인 것이기도 하다.

모듈 이론과 대립하는 입장은 뇌나 마음이 하나의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시스템이라는 전일론(holism)인데 역사적으로 축적된 증거는 대체로 모듈 이론의 손을 들어준다. 전일론은 이제 이 모듈들을 통제하는 중앙처리장치가 있다는 정도의 주장으로 많이 후퇴했다.

이제 프로이트와 헬름홀츠의 주장을 비교해보자. 프로이트는 감각 기관이 자극의 일부만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헬름홀츠에게이것은 감각 기관의 한계인 반면 프로이트에게는 이것이 감각 기관의 목적이다. 왜냐하면 자극의 수용보다 자극에 대한 보호가 더중요한 문제기 때문이다. 또 헬름홀츠는 감각 기관과 의식 사이에 있는 무의식에 관심을 둔 반면, 프로이트는 의식의 뒤편에 있는무의식에 관심을 두었다.

지성사에 프로이트가 준 가장 큰 충격을 꼽는다면 무의식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와 내부의 경계선에 위치한 의식의 역할은 남겨 두었다. 그러나 이미 헬름홀츠에게서 의식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선은 무의식에게 자리를 비워주었고 모듈 이론에 와서는 마음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런데 모듈 이론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좀 더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난다. (계속)

by 아이추판다 | 2008/08/26 16:30 | 트랙백 | 덧글(11)

업데이트 프로이트 :: 인지

프로이트의 책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고전이다. 그런 의미들 중에 하나는 낡고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만약 "정신분석학 강의"나 "꿈의 해석"이 철학이나 문학에 속한다면 오래되었다는 것이 아무 문제가 안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이 여러 번 강조했다시피 정신분석학은 마음의 문제를 탐구하는 과학적 작업이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 스의 자연학을 지금에 와서 읽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한 관찰이나 놀라운 통찰에 감탄하기도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 나온 내용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이후로 과학과 담을 쌓고 지낸 사람이라도 그 후로 많은 과학적 발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경우엔 그 내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좀 많은 듯 하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현대 과학의 발전을 염두에 둔 경우는 흔치 않다. 솔직히 심리학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외부에는 거의 잘 알려져있지 않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책을 넘겨가면서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어디까지 와있는지 살펴보는 몇 편의 글을 써보려고 한다.

프로이트는 정신과 의사고 현대 심리학의 분과 체계에 따라 구분하자면 임상심리학에 속하는 연구를 했지만 그 외에도 인지심리학, 발달심리학, 언어심리학 등에 해당하는 저술도 많이 남겼다. 여기서 살펴보려는 내용은 특히 인지심리학에 해당하는 부분들이다.

인지(cognition)란 좁게는 지각, 판단, 기억, 의사결정, 언어, 학습 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기억과 언어는 특히 프로이트가 많은 관심을 가진 문제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인지는 계산(computation)과 같은 말이다.

계산을 엄격하게 정의하자면 그것만으로도 책 한 권이니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자. 계산은 영어로 calculation과 computation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말의 차이는 calculator와 computer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calculator는 흔히 볼 수 있는 덧셈 뺄셈하는 계산기고 computer는 뭐 말 그대로 컴퓨터다. 우리가 컴퓨터로 덧셈 뺄셈만 하는 게 아니라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블로그도 읽고, 악플도 달고 온갖 일들을 하는 데 이런 일들을 모두 계산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계산=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이다.

프로이트의 시대에 마음에 대한 과학적 연구란 곧 뇌 연구를 말했다. 정신분석학이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은데에는 사례의 해석이라는 연구방법론의 문제도 있지만 마음의 내용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는데 거부감이 컸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은 많은데 예전에 라캉과 관련한 토론에서 어떤 분은 "심리학은 물리주의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다"라고 했고(물리주의란 간단히 말해 마음=뇌라는 것), 또 어떤 분은 "뇌를 뒤져본다고 의식이 어디있는지 알 수 없다" 했는데 모두 이런 태도를 반영한다.

그런데 잠시 컴퓨터를 생각해보자. 컴퓨터에서 가장 기초적인 부품은 트랜지스터다. 트랜지스터는 들어오는 전기 신호가 일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전기 신호를 방출한다. 트랜지스터로 이뤄진 회로는 이런 조건들을 조합해서 복잡한 처리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컴퓨터를 연구한다고 하면 이런 트랜지스터 회로보다(이건 차라리 전자공학과에서 많이 한다) 그 회로를 통해 하는 계산이 관심사다. 결국에는 그 계산도 회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지만 같은 계산이라도 컴퓨터 칩 회사마다 다른 방식으로 회로를 만들기 때문에 계산의 문제는 회로의 문제와 독자적인 영역이다.

뇌는 뉴런이라고 부르는 신경세포들로 이뤄져있다. 뉴런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트랜지스터와 똑같다. 전기 신호를 받고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전기 신호를 방출한다. 세부적인 작동방식은 물론 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뉴런들로 이뤄진 회로가 바로 뇌이다. 우리가 뇌를 컴퓨터와 같은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뇌에서 이뤄지는 계산이 바로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인지다.

요즘 같으면 뇌가 멀쩡하더라도 마음에 문제가 생긴 경우를 "하드웨어는 멀쩡한데 소프트웨어에 바이러스에 걸리거나 버그가 생긴 경우"라고 비유하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시대에는 컴퓨터가 없었고 늘 비유들기를 좋아했던 프로이트도 이렇게 마춤한 비유를 들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마음을 분석한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얼마 전 대통령 기록물을 두고 일어났던 소란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여전히 소프트웨어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2008년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소프트웨어는 매우 자연스러운 개념이다. 그리고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구분에 따라 뇌/마음의 관계를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다. 즉 컴퓨터를 경험하고 나서 우리가 뇌와 마음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이 근본적인 변화를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라고 한다.

인지혁명으로 마음은 뇌와 구분되는 과학적 대상으로 성립할 수 있었다. 또, 마음=계산이라는 관점은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론적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이 결과 심리학, 컴퓨터과학, 뇌과학, 언어학, 인류학 등 여러 학문들이 마음의 문제를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틀이 만들어졌는데 이 틀을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라고 한다.

그렇다면 프로이트가 던졌던 의식/무의식, 기억, 전이 등의 문제에 대해 인지과학은 어떤 대답을 내놓고 있을까? 다음 글에서는 여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by 아이추판다 | 2008/08/25 15:05 | 트랙백(1)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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