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주의자들과 조중동에 달린
라임님의
댓글 중
라캉 관련 담론을 얼마나 접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캉이 주로 인문학 담론 내에서 다뤄지고 있는 것은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데 라캉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죠. 아이추판다님은 라캉이 "과학적으로 대답되어야 할 영역"에 끼어든다고 적으셨는데, 적어도 이 진술은 마음에 대해서 과학의 진술만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상을 남깁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라캉의 이론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인문학적 사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원칙적으로 하나의 사태에 대해 무한히 많은 설명을 내놓을 수 있다"면 인문학이 자기 나름의 전통 속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처음부터 과학적 방법론이 적용될 수 없는 영역에 해당하는 경우고, 또 하나는 당장 현재 가지고 있는 수준의 과학으로는 이렇다할 대답을 내놓을 수 없는 경우다. 많은 사람들이 후자의 경우를 전자의 경우로 오인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FOX TV 인터뷰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전체 동영상은
여기 (주의: 복장이 터질 수 있음).
이 동영상에서 빌 오라일리(진행자)가 보여주는 태도는 라캉주의자나 또는 라캉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와 정확히 똑같다.
바로 이런 병리적 상태는 MRI로 나타나지 않으니, 주인공이 쓰고 있는 언어와 과학과 맺는 위상학적 태도속에 주인장의 강박증을 드러내는건 정신분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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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썩은 상자인가에 '알튀세'가 단
댓글이들의 문제점은 두 가지다. 첫째, 모든 마음의 상태는 그에 대응하는 두뇌의 상태를 가진다. 이건 심리철학의 ABC다. 역시나 이들이 즐겨하는 표현법을 빌리자면 "김재권만 읽었어도 알 것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에게 마음에 대한 완전한 이론과 뇌에 대한 완전한 관찰 수단이 주어진다면 뇌를 뒤져보면 뭐가 의식인지 뭐가 무의식인지 알 수 있다. 물론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르는 게 많고 관찰 수단도 허접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참고:
뇌 영상에서 시각 영상을) 이것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는 것은 100년이나 200년 후에는 우스개소리가 될 것이다.
둘째,
라캉주의자들과 조중동에서 예로든 "안드로메다에 사는 외계인의 화장실 사용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수백광년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우주선이 주어진다면 안드로메다에 가서 확인해볼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철학적 문제로 돌변하지는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마음과 뇌에 대한 이해가 일천하다고 해서 이것이 철학적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나는 라캉을 옹호하기 위해 과학철학을 서슴없이 빌려오는 사람들을 보면 좀 의아한게 이들은 과학철학의 자매분과라고 할 수있는 심리철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심리철학자들은 그야말로 '메타'적 문제에만 집중하지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심리학, 뇌과학, 인지과학 등의 결과에 의존한다. 이런 것이 올바른 학문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의 문제는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 대한 설명을 근거없이 주장한다는 데 있다.
다시 라임님의 댓글로 돌아가자. 라임님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우선 이것이다. 하나의 사태에 대해 무한히 많은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은 이런 설명들이 모두 가치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추판다가 블로그를 쓰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지구상에 있는 모든 책을 채울만큼의 설명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인문학이 그런 종류의 활동이라면 그건 그냥 종이 낭비 밖에 안된다.
또, 내가 라캉주의자에게 맞은 적이 있어서 원한을 품고 라캉을 공격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설명이지만 나는 라캉주의자에게 맞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무가치하다. 인문학이든 과학이든 모든 학문은 수 많은 설명 중에 더 나은 설명을 고르는 과정이다. 만약 그런 과정이 없다면 그건 학문이 아니다.
내가 라캉주의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마음에 대한 수많은 존재가능한 설명들 대신에 라캉의 설명을 취해야할 이유를 대라는 것이다. 상상계-상징계-실재의 구도를 밝혀낸 라캉의 공적 운운하기 전에 그 구도가 어떻게 도출되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게 필요없다면 나도 당장 그런 구도 100만개는 만들 수 있다. 그럼 아이추판다가 라캉보다 100만배 더 위대하다고 인정해줄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라캉이 과학이 아니고 철학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종류의 근거가 필요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대지 않는 이유는 개별 분과학문에서 이미 그러한 과정을 거쳐 올라온 내용을 바탕으로 논지를 전개하기 때문이지 '철학'이라는 타이틀이 무슨 '무료통행증'이기 때문이 아니다. 라캉은 개별 분과학문에서 검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도 않고, 그걸 인용할 때도 자의적으로 변형시킨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입증책임은 온전히 그와 그의 추종들에게 돌아간다.
둘째, 라캉이 철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라캉이 다루는 마음에 대한 내용은 대단히 구체적인 수준의 내용이다. 다시 말해 철학에서 다룰 수준의 얘기들이 아니다. 라캉주의자들은 라캉을 통해 인간의 구체적 행동을 설명하고 예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심리학에서 하는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 분석 수준에서 라캉주의는 심리학과 전혀 다른 층위를 갖지 않는다. 그런데 라캉주의가 철학이 되고 심리학은 과학이 된다면 우리는 동일한 영역에 동일한 수준의 분석에 대해 전혀 다른 두 가지 답을 가지게 된다.
종종 인문학 전공자들은 "답이 다양하면 좋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여러 가지 관점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이런 여러 가지 관점이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성차는 존재하는가? 또 존재한다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내어놓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정책적 의사결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에 "성차는 존재한다"라는 답과 "성차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답을 다양한 관점으로 모두 포용할 수는 없다.
게다가 더 문제는 라캉주의자들은 이렇게 구체적인 충돌이 발생할 경우에 서슴없이 과학을 버리고 라캉을 선택한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성차 문제에 대한 그들의 논의를 읽어보면 경험적인 근거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다. 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를 몇몇 사람들의 독단에 맹종하려고 하는 이런 무모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라임님은 국내에 라캉주의적 임상을 수행하는 사람이 한 명 밖에 없고 그나마도 개인적 친분의 범위에 국한되기 때문에 윤리적 단죄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적 제한 때문이지 그들 자신의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런 논의를 연장하면 라캉을 어떤 종류의 실천적 영역에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이 결론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라캉과 같은 그런 것들을 인문학으로 포함시킨다면 우리는 인문학을 현실과 무관한 독단적 논의들의 모음으로 격하시키고 그 실천성을 거세해야 한다. 과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을 인문학에 포용할만한 가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