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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제어론 (2)

인문학적 제어론
과학과 철학은 대립하는가 (노정태님)

'인문학적 제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이란 그 자체로 옳고 바르고 합리적이며 다른 종류의 지식에 대해 교정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어떤 문제가 인문학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똑같은 전제를 공유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도 아니고 가능하지도 않으며 옳지도 않다.

인문학은 단수가 아니다. 정치철학에는 레오 슈트라우스에서 안토니오 네그리까지 다양한 입장들이 있다. 네오콘은 무식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문학적 교양과 지식을 풍부하게 갖춘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 교양과 지식의 내용이 어떻냐 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인문학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런 각각의 인문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게 된다.

노정태님은 제어론자들이나 견제론자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노정태님이 동의하건 말건 그들 또한 인문학의 일부다. 그들을 그렇게 간단히 배제할 수는 없다.

게다가 '과학과 조화로운 인문학'조차 의도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칸트는 수학과 자연과학이 안전한 지식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도리어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등장에 장애물이 되었다. 과학의 경계는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과학은 XX다"라는 언명은 한동안은 과학을 정당화할 수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구속이 된다. 창조론과 과학을 구분하려는 현재로선 건전한 철학적 시도가 미래의 과학에 대해 이런 반동적 기능을 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또, 인문학으로 창조론에 대응하는 건 현실정치적으로도 별로 바람직한 시도는 아니다. 다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칸트라고 딱히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고, 이쪽에서 칸트를 내세우면 저쪽에선 중세철학의 온갖 변신론이나 아니면 다른 상대주의 철학들을 들이댈텐데 이런 끝나지 않을 싸움에 빠져드는 게 과연 '해결책'일까?

칸트를 빌어 창조론을 과학에서 추방할 수 있다면, 역시 심리학 또한 추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못할 이유라면 과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애초에 과학자들의 결정에 따르면 되지 칸트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 내 기억으로 테리 이글턴은 "문학이론입문"에서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들이 현실의 문학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후 "문학이란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문학에 대해 정의를 포기한다면 굳이 과학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과학이란 과학자들이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과학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제어하려고 하지 말라는 얘기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교과서 뒤에 있는 연습문제를 푸는 게 단순히 학생들을 괴롭히기 위한 교수의 악취미가 아니라 과학자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쿤을 읽든 말든 숙제는 해야겠지만. "라캉도 패러다임이다!"와 같은 소릴하기 위해서 쿤이 존재한다면 그거야 말로 인문학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by 아이추판다 | 2008/11/11 16:18 | 트랙백 | 핑백(1) | 덧글(8)

인문학적 제어론

저의에서 노정태님이 단 댓글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창조과학같은 사이비 과학이 미국에서 판치는이유는, 과학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부 복음주의 기독교단의 '열심'을 제어할만한 인문학적 소양이 그 사회에 부족하기때문이라고. 창세기의 창조 설화가 '우화'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아우구스티누스 시대부터 상식이 되어있습니다만, 그게 진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면 '현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학의 유물'로 취급되느냐는 다른 문제죠.

이와 같이 인문학이 무엇을 제어해야 한다 또는 제어할 수 있다는 관점을 '인문학적 제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제어대상으로 손꼽히는 것이 아마 과학일 것이다.

이런 제어론에는 인문학이 '해독제'라는 발상이 깔려있다. 그런데 인문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그것이 과학 스스로 주장하는 것만큼 무색무취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그 잣대를 인문학에 그대로 되돌린다면 인문학은 과학보다 더욱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이 조롱하곤 하는 프랑스 철학 특유의 문장에 대해 얘기해보자. 프랑스 철학의 옹호자들은 이런 '스타일'에 대한 집착이 프랑스 철학의 고유한 전통이며 프랑스 철학의 생산성을 가능케하는 특징이라고 변명하곤 한다. 이 변명을 받아들이더라도 이 '스타일'에는 아주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있다.

예전에 천규석이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을 썼을 때 이정우는 "프랑스어로 읽어보고 찌질대시지?"로 요약할 수 있는 신랄한 서평을 썼다. 이정우가 싸가지가 없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을 제대로 읽으려면 프랑스어로 읽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그들의 '스타일'이 대단히 번역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 '스타일'은 프랑스 철학의 옹호자들이 말하는 대로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핵심 요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용과 스타일을 엮어버림으로써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프랑스 철학에 대해 논의할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것도 그냥 조금 하는 수준으로는 안된다. 미묘한 뉘앙스를 읽어낼 정도로 잘하지 않으면 안된다. 네이처나 사이언스에서 매주 발행하는 파드캐스트를 들어보면 도저히 듣기 힘든 영어로 말하는 비영어권 과학자들의 인터뷰가 빠지지 않는다. 세계 수준의 학술지에 실릴만한 과학 논문을 쓰기 위한 영어 수준은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스타일이 중요하게 되고 나면 역시 엄청난 프랑스어 실력을 갖추지 않고서야 저 바닥에는 낄 수 없다.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쯤되면 프랑스 철학에서 말하는 급진적 내용들에 대해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말하는데로 언어가 모든 것이라면 "그들의 언어"에 철저히 굴종할 것을 강요하는 철학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이 그렇게도 "서구-백인-남성-중산층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해 마지않는 과학판에는 동양인이 버글거려서 "M.I.T.는 Made In Taiwan의 약자"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판국이다. 정작 철학판이야말로 "서구-백인-남성-중산층"의 전유물로 남아있다.

사정이 이쯤되고 보면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느니 과학에도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하다느니하는 '인문학적 제어론'에 대해서 "이쪽은 됐으니, 니들 앞가림이나 잘하라."는 말 밖에는 더 할 얘기가 없는 것이다.

by 아이추판다 | 2008/11/04 15:43 | 트랙백 | 핑백(2) | 덧글(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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