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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스님께

양자역학은 칸트의 시공간 개념을 반박하는가? (로보스님)

집에 오는 길에 핸드폰으로 RSS를 확인하는데 로보스님께서 글을 하나 쓰셨다. 그런데 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이해하기로 노정태님의 시각은 사물이 "이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실재하는 사물이라면 관념적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이 세계 안에 존재한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 '어딘가'라는 표현을 써서 어딘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이 세계 안에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의 위치 개념과 노정태님의 관점은 양립할 수 없는가? 난 충분히 양립한다고 생각한다. 양자역학이 특정 실재 입자가 이 세상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로보스님이 노정태님의 글을 너무 확장해서 해석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노정태님의 '어딘가'는 강조를 위한 수사적 표현아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뜻이기 때문이다.

가령 '내 책상 위에 고양이가 올라와서 자고 있다'는 인식을 내가 했다고 해보자. 이 인식에는 경험적인 요소와 선험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고양이와 책상을 경험의 개별적 대상이라고 해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A가 B의 위에 있다'같은 판단의 형식이 경험으로부터 주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판단을 위해서는 먼저 공간 개념이 주어져야 하고, A와 B가 같은 시간 안에 지속하고 있을 수 있도록 '동시성'이라는 개념이 주어져야 한다. '책상 위의 고양이'는 내게 지각되고 있는 경험이지만, 그 경험을 성립하게 해주는 요소들은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노정태, 칸트의 선험적 공간, 반과학주의와 반인문주의

그리고 좀 정리를 하자면 이 논쟁은 칸트의 공간 개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원래의 논점은 "철학적 까임방지권"에 대한 역사적 반박이였다. 19세기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둘러싼 갈등에 대한 내 언급을 노정태님이 칸트 철학은 그런게 아니라고 하면서 얘기가 곁다리로 샜는데, 내 생각엔 노정태님이 그 갈등에 대해 몰랐던게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철학자들은 오늘날의 라캉주의자들처럼 "이건 철학이거든요?"를 외치는 대신 칸트 철학에 대한 해석을 바꿨고, 그 덕분에 21세기의 철학도인 노정태님은 19세기 철학자들과 달리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당성은 원래부터 칸트 철학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님"이라고 쿨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라캉주의자들이 그렇게 쿨했다면야 이런 논쟁은 시작도 할 일이 없었을텐데, 라캉주의 자체의 내용으로 보나 오늘날 라캉주의자들 자신의 태도로 보나 아무리 봐도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것 같다.

by 아이추판다 | 2009/08/29 00:31 | 트랙백 | 덧글(1)

보어와 칸트

원래 저주받은 운명은 라캉주의자들처럼 증거가 없거나 증거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서도 이를 지적하면 "철학적 까임방지권"을 발동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여기서 19세기에 있었던 칸트 철학과 비유클리드 물리학의 갈등을 소개했는데(공간을 찾아서), 노정태님은 칸트의 공간 개념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면서 그런 갈등 자체를 부정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떤 사물을 어떤 식으로건 경험할 때, 그것으로부터 공간 개념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사물은 '어딘가'에 있다. '어딘가'에 있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사물이란 있을 수 없다. 칸트가 의미한 '선험적 공간'은 바로 이런 개념이다.

노정태, 근대 철학과 경험 개념

그런데 칸트의 공간 개념이 무엇이고, 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든 19세기에 칸트 철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갈등이 존재했던 것만큼은 사실이므로 노정태님의 이런 반박은 사후약방문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모든 사물은 '어딘가'에 있다"는 노정태님의 해석은 19세기 철학자들과 같은 종류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현대 과학에서 더이상 지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논쟁의 전체 맥락에서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일단 나온 얘기니 짚고 넘어가자.

우선 인지과학의 입장에서 세계를 인식하는데는 여러 가지 형식이 존재할 수 있고, 그런 형식에 따라 사물들은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자신만 하더라도 의식적 형식과 뇌의 정보처리형식은 서로 다르다(어딘가에 있지 않으면서 존재하기). 노정태님은 여기에 대해 "칸트 철학은 W1 차원[주: 의식적 형식]에서 적어도 일관성 있고 완성도를 갖춘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링크)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의 의식과 신경망을 포함해, 파리며 기계에 이르기까지 W1, W2, W3, W4 ... 등 수많은 형식을 알고 있다. 이중에는 인간의 의식적 형식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파리의 경우에는 아마도 직접적으로 번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파리의 경우). 왜냐하면 파리와 인간의 인지 시스템은 다른 목적에 대응하기 위해 진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형식들이 있다면 이런 형식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적절한 개념이 필요하다.

물리학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현대의 물리학은 우리의 의식적 형식으로 세계를 다루지 않는다. 이점은 세리자와님께서 어딘가에 있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들에서 잘 지적해주셨는데,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사례를 덧붙이고자 한다. 아래 사진은 노정태님이 '지금 여기'에서 철학하기에서 예시로 사용한 1927년 솔베이 학회의 사진이다.

이 학회는 양자역학을 둘러싼 논쟁으로 유명한데, 아인슈타인의 "신의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는 말이나, 이를 두고 보어가 "아인슈타인, 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시오."라고 했다는 말이나 모두 이 학회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브라이언 그린의 설명을 들어보자.

물질파의 개념이 한창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을 무렵인 1926년에, 독일의 물리학자였던 막스 본(Max Born)은 전자의 파동에 대한 슈뢰딩거의 설명을 수정 보완하여 독창적인 해석을 내렸는데, 이는 보어 학파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면서 오늘날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본의 해석은 양자역학이 갖고 있는 가장 기이한 특성 중 하나이지만, 지금까지 실행된 수많은 실험들로 미루어볼 때, 그의 해석이 옳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막스 본은 전자의 파동을 '확률'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동의 진폭이 큰 곳은 전자가 발견될 확률이 큰 곳임을 의미하고, 반대로 진폭이 작은 곳은 전자가 그곳에서 발견될 확률이 작다는 것이 본의 해석이었다(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자가 특정지역에서 발견될 확률은 그곳에 존재하는 파동 진폭의 제곱에 비례한다).

(중략)

그러나 미시적 스케일로 들어가면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우리는 '전자가 이곳에 있다'는 확신에 찬 표현을 포기하고 '전자가 이곳에 존재할 확률은 XX%이다'라는 확률적 서술을 택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중략)

파인만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된다 - "개개의 전자들은 두 개의 슬릿을 '모두' 통과한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당장 반박하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아주기 바란다. 앞으로 나올 이야기들은 훨씬 더 황당하다. 파인만의 설명은 계속된다. - "총에서 발산된 전자는 스크린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가능한 경로'들을 동시에 지나간다." 그림 4.10에는 모든 가능한 경로들 중 몇 개가 그려있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전자는 왼쪽 슬릿을 통과하면서, 동시에 오른쪽 슬릿을 통과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는 왼쪽 슬릿을 향해 가다가 도중에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오른쪽 슬릿을 통과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발사된 뒤에 머나먼 안드로메다 성운을 한바퀴 돌고 와서 왼쪽 슬릿을 통과하는 경로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보다 더 먼 경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파인만의 설명에 의하면, 전자는 출발 -> 도착지점 사이에 놓여있는 모든 가능한 경로들을 동시에 다 지나간다.

이런 논리를 이용하면 파인만은 확률파동을 전자에 일일이 대응시킬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언가 그럴듯한 대용품을 찾아야한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하나의 전자가 스크린 상의 특정 지점에 도달할 확률은, 중간에 있는 '모든 가능한 경로'의 확률을 더하여 구해진다고 이해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파인만의 "경로합(sum-over-path; 또는 경로적분, integral-over-path)"이론이다.

아무리 양자역학이 기이하다 해도, 이건 너무 심한 것 같다. 어떻게 단 하나의 전자가 무한히 많은 경로들을 '동시에' 지나갈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일리 있는 항변이다. 그리고 독자들을 납득시킬 만한 논리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양자역학은 이런 질문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고 있다. 파인만 식의 계산은 파동함수를 이용한 계산과 마찬가지로 실험결과와 너무나도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여기서 파인만의 말을 들어보자 - "양자역학은 우리의 상식적 관점에서 볼 때,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자연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들은 실험치와 잘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 자체가 원래 터무니없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중략)

아인슈타인은 고전물리학과 양자역학의 괴리를 막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 "불확정성원리는 우리가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전자가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속도를 갖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그 값을 알아내지 못한다 해도, 속도와 위치의 정확한 값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아일랜드 출신의 존 벨(John Bell)을 선두로 한 이론물리학자들과 앨라이언 애스펙트(Alain Aspect)가 이끄는 실험물리 팀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아인슈타인이 틀렸음을 역설하고 있다. 전자를 비롯한 모든 물체들은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속도를 결코 동시에 가질 수 없다.

브라이언 그린, 박병철 옮김, "엘러건트 유니버스", 승산, 175-189쪽.

양자역학에서 하나의 계의 상태는 파동함수로 기술된다. 우리가 이 계의 상태를 측정하면, 파동함수가 붕괴해서 확률적으로 고유함수 중에 하나가 된다. 그때야 비로소 위치나 운동량과 같은 물리량들이 고유함수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노정태님이 말하는 "모든 사물은 '어딘가'에 있다. '어딘가'에 있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사물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양자역학과 맞지 않는다. 위치를 측정하지 않은 전자는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표준 해석을 주도한 보어의 입장을 칸트 철학적 맥락에서 해석한 헨리 크립스(Henry Krips)의 글에서도 그런 입장을 취한다(번역은 필자).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그런[역자주: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에 반대했다. 보어는 관찰과 좀 더 넓게는 측정을 현상의 구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자신을 칸트적 관점에 더 가깝게 위치시켰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어는 그것을 "측정은 질문된 물리적 양의 정의가 의존하는 조건에 본질적인[저자주: 나는 이를 '구성적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영향을 미친다."(Bohr 1935, 1025)고 표현했다.

하지만 헨리 폴스(Henry Folse)가 지적하듯이 보어와 칸트의 차이점을 간과할 수 없다(Folse 1985, 49 and 217-221). 예를 들어, 보어는 "인과율은 물론 시간과 공간은 모든 지식의 이해에 대한 a priori한 범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칸트의 입장에 의견을 달리했다(Folse 1985, 218). 이런 불일치는 보어와 칸트 사이에 놓인 깊은 틈을 반영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칸트가 “개념은 경험에 앞서는 역할을 하고, 경험된 것에 형식을 부여한다”고 보았던 것과 달리(Folse, 220), 보어는 반대로 관찰의 조건과 같은 객관적 현실이 개념의 적용가능성을 결정한다. 따라서 보어도 칸트와 마찬가지로 관찰이 보이는 대상의 세계를 구조화할 형식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지만, 그 역할이 수행되는 방식을 매우 다르게 생각한다. 칸트에게 주관적 경험은 어떤 선험적 형식으로 구조화되지만, 보어는 현상의 영역에서 숨겨진 관계주의(relationalism)를 옹호했고, 특히 한 시스템이 기술되는 방식은 측정의 조건에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다.

보어와 칸트의 이런 차이는 19세기 시각 개념의 더 일반적인 변화의 한 측면, 더 정확히 말하면 급진화로 볼 수 있다. 이런 변화의 예로 요하네스 뮐러의 당대 생리학에 대한 간명한 요약인 "인간 생리학 핸드북(Handbuch der Physiologie des Menschen ,1833)"을 들 수 있다. 영향력 있는 물리학자인 헤르만 폰 헬름홀츠의 지도교수였던 뮐러는 관찰에 대한 칸트적 개념을 생리학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조나선 크레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뮐러]의 저작은 칸트에 대한 찬양에도 불구하고 칸트와 매우 다른 것을 함의한다. 시간과 공간의 '안경'처럼 자연에서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것과 동떨어져서, 우리의 생리적 장치는 결함이 있고, 비일관적이며, 착각의 먹이이며, 주체에게 경험을 산출하는 필수적 역할을 하는 조작과 자극의 외적 절차에 민감하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Crary 1995, 92)

크레이는 여기서 19세기동안 관찰, 특히 시각이 칸트의 보편적 능력이 아니라 지각적 과정으로 재개념화되었다는 것을 함의한다. 특히 관찰된 현상과 우리가 그것들을 보고하는 방식은 감각 직관의 보편적 형식이 아니라 몸과 좀 더 일반적으로는 생리적 과정에 영향을 주는 외적인 물리적 요소의 종류에 따라 조건지워진다고 가정되었다.

보어는 감각 직관의 형식에 영향을 미치는 "외적 절차"에 관찰의 과정 그 자체를 포함시킬 것을 제안함으로써 이러한 입장을 확장한다. 따라서 보어는 긴 역사적 과정의 끝에 서있다. 칸트는 관찰 장치를 직접적 감각 인상을 매개하고, 형식을 부여하고, 해석하는 안경에 비유되는 내적인 심적 능력으로 보았다. 신칸트주의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시각의 영역 바깥에 적용하여, 그것을 몸과 생리학적 과정에 대한 것으로 재개념화했다. 보어는 관찰을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는지에 영향을 주는 많은 "외적 절차" 중 하나로 포함시킴으로서 이를 더욱 확장했다.

Henry Krips, Measurement in Quantum Theory, Stanford Encyclopaedia of Philosophy.

크립스의 해석에 따르면, 보어의 양자역학은 칸트의 공간론에 대한 부정이면서 동시에 칸트 철학에 대한 확장이기도 하다. 나는 이 해석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런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노정태님도 이미 유클리드 기하학 문제에서 보인 태도를 이어나간다면 여기에 동의할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양자역학과 "모든 사물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주장을 조화시킬 해석을 제시해야할 것이다.

라캉주의자들은 오늘도 "This! is! Philosophy!"를 외치면서 과학을 우물구덩이에 쳐넣고, "라캉은 이렇게 말했다. 라캉은 저렇게 보았다"라고 떠들며, "과학의 직선적 인과론을 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과 철학을 떠나서 이런 식의 주장은 학문의 영역 내에서 용인될 수 없다. 노정태님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태도나, 크립스의 양자역학에 대한 태도를 보면 철학에서도 이런 라캉주의자들의 태도는 그다지 상식적인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철학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이를 용인하거나 심지어 지지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 걸 보면 도대체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느 집 말썽쟁이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난동을 피우는데도 그 부모가 팔짱끼고 구경만 하고 있다면 누가 욕을 먹어야 할까?

by 아이추판다 | 2009/08/21 00:59 | 트랙백(1) | 핑백(2) | 덧글(13)

관찰불가능한 비결정론적 체계

마음은 오늘날 반과학주의자들에게 마지막 안식처와 같다. 반과학주의자들은 마음이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근거는 보통 두 가지다. 하나는 마음이 관찰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이 비결정론적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정말 비결정론적인지는 좀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그렇다치더라도 이 두 가지는 반과학주의자들의 무식함의 증거일 뿐이지 마음이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관찰불가능한 비결정론적 체계에 대해 훌륭한 과학 이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양자역학이다.

반과학주의자들도 이 공통점을 알고 있었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여기서 해괴한 '해석'으로 빠져든다. 앨런 소칼이 "소셜 텍스트"에 장난으로 냈던 논문의 제목이 "경계의 침범 : 양자 중력의 변형해석학을 위하여"였던 것은 이런 점을 조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걸 모르고 실어준 편집진만 바보가 됐지만.

심리학에서도 양자역학을 끌어오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뷰스마이어 등이 쓴 "인간 의사 결정의 양자 역학(Quantum dynamics in human decision-making)"이라는 논문이 그런 예다. 그런데 이 논문은 반과학주의자들이 늘상 하는 그런 방식과 달리 사실상 마음과 양자역학 사이에 어떤 억지스런 관계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냥 심리 과정을 모델링하는 데 양자역학에서 쓰는 수학적 기법을 써보자는 얘기다. 심리학에서 쓰는 많은 수학적 기법이 물리학에서 배워온 것이기 때문에 별난 일은 아니다.

엄밀히 얘기하면 심리학은 양자역학보다 기상학과 더 비슷하다. 일기예보가 자주 틀리는 건 물리학적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기상 현상의 배후에 있는 개별적인 물리 현상에 대해서는 충분히 잘 알고 있다. 다만 그걸 다 합쳐놓았을 때 문제가 엄청나게 복잡해져서 다루기가 어려울 뿐이다. 마음의 경우도 비슷한데 우리는 신경 하나나 아니면 여러 개의 신경들이 이루는 망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다. 다만 그것들이 모여 두뇌를 이루면 문제가 복잡해질 뿐이다. 기상학보다 사정이 나은 점이라면 기상학자들에게는 지구가 하나 뿐이지만 심리학자들에겐 두뇌/마음이 60억개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상 현상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게 많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모든 걸 밝힐 수 있는 건 아니잖아?"라면서 천연덕스럽게 기우제를 지내진 않는다. 청와대에 있는 모 씨가 청계천에 가서 기우제라도 지낸다면 온갖 현학적 언어를 동원해 비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반과학주의자들도 자신들이 마음에 대해서 그렇게 구는 것만은 용납되어야 한다고, 아니 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by 아이추판다 | 2008/10/14 13:56 | 트랙백(3)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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