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심리학

스트룹 효과는 어디에서 오는가

스트룹 검사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 분트의 제자였던 카텔은 1886년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빨강'이라는 글자를 읽는 것이 빨간색을 보고 '빨강'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빠르다는 사실을 보고한다. 카텔은 이것이 글자를 읽는 것이 색깔을 읽는 것보다 더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게 100년짜리 떡밥이라는 걸 그때 카텔은 알았을까?

카텔의 논문 이후 50년간 여러 연구자들이 카텔의 설명을 두고 반박에 재반박을 거듭한다. 그러다 1935년 스트룹은 색깔과 글자를 합쳐서 하나의 자극으로 만든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그래서 파랑처럼 글자의 뜻과 색깔이 서로 불일치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본 것이다. 그 결과는 흥미롭게도 '파랑'이라고 글자를 읽을 때는 색이 간섭을 하지 않지만, '빨강'이라고 색깔을 읽을 때는 글자가 간섭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를 스트룹 효과(Stroop effect)라고 한다.

다시 50년이 흘러 1991년 맥클레오드는 스트룹 이후 50년간의 연구를 정리하는데 그가 인용하고 있는 논문만 물경 400편에 달한다. 논문 하나에 실험 두셋은 실리는 게 통례이니 스트룹 효과를 두고 이뤄진 실험은 최소 1천가지가 넘는다는 얘기가 된다. 참고로 맥클레오드는 응용 연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이런 실험 중에 재미있는 것을 한 가지 인용하자면 이런 게 있다. 색깔과 글자 대신 그림과 글자로 자극을 제시해도 여전히 스트룹 효과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사과 그림을보면 "사과"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그림에 '사과'라고 써놓으면 더 빨라지고(촉진), '책상'이라고 써놓으면 더 느려진다(간섭).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림이 쥐일 때 청와대'치즈'라고 써놓는다고 해서 더 많이 간섭을 일으키진 않는데, 그림이 손일 때 '발목'이라고 써놓으면 더 많이 간섭을 일으킨다. 다시 말해 의미상 연결된 단어라고 해서 더 간섭을 일으키진 않는데 의미상 같은 범주에 속하는 단어는 더 간섭을 일으킨다.

맥클레오드는 그 이전까지 나온 연구들을 종합해서 스트룹 효과에 대한 이론이 만족해야할 18개의 조건을 제시한다. 처리 속도의 차이에 대한 카텔의 주장은 이 조건들 중 15개 밖에 만족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카텔의 주장대로 글자가 색깔보다 빨리 처리되기 때문이라면 글자와 색깔의 자극제시시차(stimulus onset asynchrony. SOA)를 조작하여 간섭을 늘이거나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SOA를 조작해도 색깔이 글자 읽기엔 영향을 주지 않는 반면, 글자는 여전히 색깔 읽기에 영향을 준다. 게다가 글자가 색깔보다 빨리 처리되기 때문에 간섭이 나타난다면 글자를 먼저 제시하면 더욱 더 빨리 처리될테니 간섭이 더 커져야하지만 글자를 색깔보다 100밀리초 늦게 제시하는 게 200밀리초 먼저 제시하는 것보다 간섭이 더 크다.

카텔의 또 다른 주장은 글자를 읽는 것은 주의를 요구하지 않는 자동적(automatic) 과정인 반면에 색깔을 읽는 것은 수의적(voluntary) 과정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수의적(voluntary)' 대신 '통제적(controlled)'이라고 한다. 이 자동성 가설(automaticity hypothesis) 또한 맥클레오드의 18개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한다.

한 가지 예를 보자. "       파랑"과 같이 글자와 색깔을 따로 제시해도 크기는 좀 작지만 스트룹 효과는 나타난다. 그런데 "헐퀴        파랑" 뭐 이런식으로 아무 관련이 없는 단어를 추가적으로 제시하면 스트룹 효과의 크기가 줄어든다. 자동성 가설에 따르면 글자 처리는 주의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추가적인 단어가 있다고 해서 스트룹 효과에 영향을 주어야할 이유가 없다.

이 실험을 수행한 카네만과 Chajczyk(뭐라고 읽는지 모르겠다)은 자동성 가설을 완전히 버리는 대신 자동적 과정과 통제적 과정이라는 이분법을 버리고 모든 과정에는 자동적인 정도가 있다는 방식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다시 말해 글자를 읽는 것은 색깔을 읽는 것보다 자동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주의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가설은 다른 종류의 실험들과도 잘 일치하는데 비록 글자와 색깔이 있을 때는 글자에서 색깔 쪽으로만 스트룹 효과가 생기지만, 글자 대신 이상한 기호를 주면 색깔에서 기호쪽으로 스트룹 효과가 생긴다.

이러 수 많은 실험 결과와 가설들에 힘입어 스트룹 효과를 설명하는 모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스트룹 효과가 발생하는 과정을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기술해서 이 현상을 자세히 이해하고자하는 시도가 이뤄진 것이다. 앞에서 말한 처리속도 차이 가설이나 자동성 가설은 후기 선택 이론이라고 해서 모두 공통적인 가정을 포함하는 데 그 중에 하나가 반응 채널의 제한적 용량(limited capacity of response channel)이다. 설명하긴 좀 복잡하지만 수학적 모형 연구는 이런 가정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스트룹 효과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까지가 1991년까지 스트룹 효과에 대한 연구의 상황이다. 이후로도 사이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또 다른 실험들과 또 다른 이론들이 제안되었다. 내가 만든 스트룹 검사는 2003년 발표된 케인과 엥글의 연구에 바탕을 두는데 이들은 글자와 색깔 사이의 자동성 차이에 덧붙여 실행 통제의 실패 또한 스트룹 효과의 한 원인이라고 제안한다. 나는 이들의 주장이 그럴싸하다고 보았는데 실제로 축적되고 있는 데이터를 보면 이들이 수행한 실험 결과와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원인을 살펴보는 중이다. 하여간 이 문제는 또 나중에..

by 아이추판다 | 2008/10/12 21:43 | 트랙백 | 핑백(1) | 덧글(3)

뇌는 단련할 수 있을까?

닌텐도DS용 게임 뇌단련이 히트를 친 이후 그와 비슷한 게임들이 여럿있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오락실 문에는 "지능개발"이라는 네 글자가 어김없이 써 있었다. 과연 게임으로 뇌를 단련하거나 지능을 계발하는 것이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적어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는 단련되지 않는다.

이해하기 쉽게 지능을 운동 능력에 빗대어 생각해보자. 어느 종목이든 대부분의 운동 선수들은 심장이 튼튼하고, 폐활량이 크고, 유연하고, 반사 속도가 빠르고, 균형 감각이 뛰어날 것이다. 반면 종목에 따라 고유한 특징도 있어서 김연아에게 역도를 시키거나 장미란에게 피겨스케이팅을 시킨다고 지금처럼 세계적인 수준을 유지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김연아든 장미란이든 기본적인 운동 능력이 있기 때문에 웬만한 운동은 보통 사람보다는 잘 할 것이다. 지능도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능력과 특수한 능력이 있다.

일반적인 지능을 보통 g라고 부르는 데 이것은 스피어만의 '일반 지능(general intelligence)'을 나타내는 기호로 g를 쓴데서 유래한다. 스피어만은 여러 가지 지능 검사에서 공통적인 경향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일반 지능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언어 검사에 점수가 높은 사람은 대체로 수리 검사에서도 점수가 높다는 것이다. g가 분명한 실체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최근에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g의 차이의 절반 정도는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의 차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기억에는 크게 장기기억과 작업기억이 있는데 장기기억이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 같은 것이라면 작업기억은 램과 같다. 컴퓨터에서 작업을 할 때 하드디스크에 있는 파일을 불러들여서 작업을 하듯이 사람들도 감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와 장기기억에 저장된 정보를 작업 기억에서 처리한다. 당연히 작업기억이 큰 사람은 한꺼번에 더 많은 정보를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복잡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

작업 기억을 측정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다. 아래의 문장들을 순서대로 소리내서 읽은 다음에 빨간색으로 표시한 마지막 단어를 외워서 말하는 것이다.

내 취미는 별미를 찾는 것인데, 오늘의 메뉴는 빈대떡이다.
경제부 기자는 오늘도 무역 회사 몇 군데를 방문하여 취재한다.
네가 항상 마음에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은 양심이다.
나는 어린 시절 친구와 다툴 때심하게 그들을 구타했다.
그는 겉으로는 활달한 모습이지만, 마음은 어두운 동굴이다.
그가 만지작 거리는 것은 오래전에 애인에게 선물 받은 라이터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빈대떡이다"를 머리 속에 계속 담아둔채로 "경제부 기자는.."을 읽기가 은근히 어렵다. 이런 식으로 복잡한 문장을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한테 테스트를 해보면.. 짜증나게 이상한 짓 시킨다고 맞을 수도 있으니 조심.

또다른 방법은 n-back task라고 하는데 단어나 숫자, 글자 따위를 순서대로 빨리 불러주다가 멈추면 n번 전에 불러준 걸 기억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K-D-X-Y-B-U-E-C-H-E-N-A-J-F라고 불러줬으면 3-back일 경우 3글자 전인 N을 떠올려야 한다. 이것은 K-D-X를 듣고 그 다음에 Y을 들었을 때 K를 버리고 D-X-Y로 목록을 바꿔주는 작업을 머리 속에서 계속 해내야 하는데 글자들을 빨리 불러버리면 보기와 다르게 만만치 않다.

운동을 반복하면 머리가 좋아지듯이 머리도 자꾸 쓰면 지능도 높아질까? 이것은 지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적어도 일반지능은 높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머리를 많이 써야하면 가능한 덜 쓰기 위해 여러 가지 전략들을 발달시키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때 "활석많은 방형이 인정없는 석황을 강금했다" 같은 방식으로 모스 경도계를 외워본 사람이 많을텐데 이런 종류의 기억술은 한정된 기억용량을 가지고 많은 정보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전략이지만 기억용량 자체가 늘어나게 해주진 않는다.

게임도 자꾸하면 늘지만 이것은 지능 자체가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전략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들은 게임을 하는데는 유용하지만 다른 종류의 문제에는 별로 적용하기 어렵다. 이것은 게임이 아니라 고전이나 수학처럼 사고력이나 논리력을 키워준다고 알려진 교육 방법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뇌단련 같은 게임을 열심히 해서 점수가 상당히 오르더라도 형태가 전혀 다른 지능검사를 시켜보면 점수가 전혀 오르지 않는다.

물론 형태가 비슷하다면 게임으로 지능을 향상시킬 수도 있다. 여학생들에게 일인칭 시점 총쏘기 게임(FPS)을 시키면 수학 점수가 향상된다. FPS랑 수학 특히 기하 문제들을 풀 때 모두 공간 속에 있는 대상들을 마음 속에서 회전 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보고 아 수학 공부 안하고 게임만 해도 되겠군..하고 생각할 남학생들이 있다면 마음을 고쳐먹으시길. FPS는 남학생들에겐 효과가 없다. 아마도 FPS로 향상시킬 수 있는 회전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운동 선수들이 자기 종목 외에 달리기나 근력 운동을 해서 기초 체력을 키우듯이 지능 자체를 늘리려면 다른 전략을 개입시키지 않고 지능만 증가시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훈련을 하기란 매우 어렵다. 뇌는 굉장히 많은 자원을 소모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가능한 사용량을 줄이려는 경향이 있어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같은 일을 최소한의 노력을 할 수 있는 전략을 자꾸 찾아내기 때문이다.

화면 상에서 점의 위치를 기억하는 n-back task와 알파벳을 소리로 듣고 기억하는 n-back task를 동시에 하면 지능 자체를 증가시킬 수도 있다는 얘기도 있다. 작업기억은 음성 기억과 공간 기억 두 가지로 나눠져있는데 양쪽에 동시에 무리를 주면 전략이고 뭐고 할만한 여지가 없어서 지능이 증가하는 게 아닌가 한다. 2주정도 훈련을 하고 전혀 다른 지능 검사를 해보면 점수가 대폭 상승한다. 그런데 이것도 정말로 지능이 향상되는 것인지 아니면 지능검사가 n-back task와 겉보기엔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지 알 수 없고, 효과가 얼마나 지속되는지도 아직 밝혀지진 않았다.

그렇다고 머리가 좋아질 수 없다고 좌절하진 말길. 앞에서 말했듯이 전략은 훈련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상황에서 능력의 차이는 대부분 개인이 구사할 수 있는 전략의 양과 질에 좌우되는 것이지 타고난 지능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결론은.. 공부합시다.

by 아이추판다 | 2008/09/11 21:12 | 트랙백(1) | 핑백(3) | 덧글(22)

업데이트 프로이트 :: 인지

프로이트의 책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고전이다. 그런 의미들 중에 하나는 낡고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만약 "정신분석학 강의"나 "꿈의 해석"이 철학이나 문학에 속한다면 오래되었다는 것이 아무 문제가 안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이 여러 번 강조했다시피 정신분석학은 마음의 문제를 탐구하는 과학적 작업이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 스의 자연학을 지금에 와서 읽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한 관찰이나 놀라운 통찰에 감탄하기도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 나온 내용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이후로 과학과 담을 쌓고 지낸 사람이라도 그 후로 많은 과학적 발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경우엔 그 내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좀 많은 듯 하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현대 과학의 발전을 염두에 둔 경우는 흔치 않다. 솔직히 심리학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외부에는 거의 잘 알려져있지 않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책을 넘겨가면서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어디까지 와있는지 살펴보는 몇 편의 글을 써보려고 한다.

프로이트는 정신과 의사고 현대 심리학의 분과 체계에 따라 구분하자면 임상심리학에 속하는 연구를 했지만 그 외에도 인지심리학, 발달심리학, 언어심리학 등에 해당하는 저술도 많이 남겼다. 여기서 살펴보려는 내용은 특히 인지심리학에 해당하는 부분들이다.

인지(cognition)란 좁게는 지각, 판단, 기억, 의사결정, 언어, 학습 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기억과 언어는 특히 프로이트가 많은 관심을 가진 문제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인지는 계산(computation)과 같은 말이다.

계산을 엄격하게 정의하자면 그것만으로도 책 한 권이니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자. 계산은 영어로 calculation과 computation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말의 차이는 calculator와 computer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calculator는 흔히 볼 수 있는 덧셈 뺄셈하는 계산기고 computer는 뭐 말 그대로 컴퓨터다. 우리가 컴퓨터로 덧셈 뺄셈만 하는 게 아니라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블로그도 읽고, 악플도 달고 온갖 일들을 하는 데 이런 일들을 모두 계산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계산=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이다.

프로이트의 시대에 마음에 대한 과학적 연구란 곧 뇌 연구를 말했다. 정신분석학이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은데에는 사례의 해석이라는 연구방법론의 문제도 있지만 마음의 내용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는데 거부감이 컸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은 많은데 예전에 라캉과 관련한 토론에서 어떤 분은 "심리학은 물리주의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다"라고 했고(물리주의란 간단히 말해 마음=뇌라는 것), 또 어떤 분은 "뇌를 뒤져본다고 의식이 어디있는지 알 수 없다" 했는데 모두 이런 태도를 반영한다.

그런데 잠시 컴퓨터를 생각해보자. 컴퓨터에서 가장 기초적인 부품은 트랜지스터다. 트랜지스터는 들어오는 전기 신호가 일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전기 신호를 방출한다. 트랜지스터로 이뤄진 회로는 이런 조건들을 조합해서 복잡한 처리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컴퓨터를 연구한다고 하면 이런 트랜지스터 회로보다(이건 차라리 전자공학과에서 많이 한다) 그 회로를 통해 하는 계산이 관심사다. 결국에는 그 계산도 회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지만 같은 계산이라도 컴퓨터 칩 회사마다 다른 방식으로 회로를 만들기 때문에 계산의 문제는 회로의 문제와 독자적인 영역이다.

뇌는 뉴런이라고 부르는 신경세포들로 이뤄져있다. 뉴런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트랜지스터와 똑같다. 전기 신호를 받고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전기 신호를 방출한다. 세부적인 작동방식은 물론 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뉴런들로 이뤄진 회로가 바로 뇌이다. 우리가 뇌를 컴퓨터와 같은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뇌에서 이뤄지는 계산이 바로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인지다.

요즘 같으면 뇌가 멀쩡하더라도 마음에 문제가 생긴 경우를 "하드웨어는 멀쩡한데 소프트웨어에 바이러스에 걸리거나 버그가 생긴 경우"라고 비유하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시대에는 컴퓨터가 없었고 늘 비유들기를 좋아했던 프로이트도 이렇게 마춤한 비유를 들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마음을 분석한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얼마 전 대통령 기록물을 두고 일어났던 소란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여전히 소프트웨어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2008년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소프트웨어는 매우 자연스러운 개념이다. 그리고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구분에 따라 뇌/마음의 관계를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다. 즉 컴퓨터를 경험하고 나서 우리가 뇌와 마음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이 근본적인 변화를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라고 한다.

인지혁명으로 마음은 뇌와 구분되는 과학적 대상으로 성립할 수 있었다. 또, 마음=계산이라는 관점은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론적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이 결과 심리학, 컴퓨터과학, 뇌과학, 언어학, 인류학 등 여러 학문들이 마음의 문제를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틀이 만들어졌는데 이 틀을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라고 한다.

그렇다면 프로이트가 던졌던 의식/무의식, 기억, 전이 등의 문제에 대해 인지과학은 어떤 대답을 내놓고 있을까? 다음 글에서는 여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by 아이추판다 | 2008/08/25 15:05 | 트랙백(1) | 덧글(10)

심리적 테러

우리는 사악한 개인이 때로는 군대보다 더 많은 죽음과 파괴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국에 대항해 수백 대의 비행기와 미사일을 날려보낸다면 그 누구라도 미국을 쓰러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큰 규모로 들이닥치면 미국의 방어체계가 즉시 발동해 그 위협은 순식간에 해결될 것이다. 반면 적군이 7명에게 불룩한 바지와 농구 모자를 씌워 보낸다면, 그들은 아마도 목표물에 접근하여 폭탄을 투하하고 독성분을 방사하거나 아니면 비행기를 납치해 고층 빌딩으로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공격은 방어체계를 작동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테러다.

물론 작은 규모의 위협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방어체계를 설계할 수도 있지만(전기를 깔아 놓은 국경선, 여행 금지령, 각종 전자 감시 장치, 무작위 조사 등), 이 체계를 가동시킬 때 필요한 자원과 오작동의 경우를 계산해본다면 이 체계는 어마어마한 경비를 요구한다. 벼룩 잡자고 곳간을 태우는 셈이다. 어떤 방어체계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위협에도 반응해야 하지만, 동시에 현실성이 있으려면 어떤 역치 수준을 초과하는 위협에만 반응해야 한다. 결국 역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위협은 겉으로는 작은 규모지만 커다란 파괴력을 지닐 수도 있다. 대규모의 위협과 달리 작은 위협은 레이더망을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리적 면역체계 역시 일종의 방어체계로 위와 동일한 원리를 따른다. 우리의 감정이 몹시 상하면, 심리적 면역체계는 사실을 조작하고 비난의 대상을 바꾸는 방법 등을 동원해 우리로 하여금 긍정적인 관점을 유지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약간 슬프거나 질투 나거나 화가 나거나 좌절하는 모든 상황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결혼 실패와 실직은 우리의 심리적 방어체계를 발동시키기에 충분할만큼 우리의 행복에 대규모 공격을 가하는 일이다. 그러나 부러진 연펼, 구멍 난 양말, 또는 느린 엘리베이터 등은 방어체계를 작동시키지 않는다. 연필이 부러진 것은 짜증나는 일이 될 수는 있지만 심리적 안녕에는 그다지 중대한 위협을 가하지 않으므로 심리적 방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아주 나쁜 경험을 하고 나서는 긍정적인 관점을 지닐 수 있어도, 조금 나쁜 경험을 하고 나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한 연구에서 신고식으로 전기 충격 3회를 행하는 동아리에 가입한 학생들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매우 강한 전기충격을 받았고(심한 신고식 집단), 나머지는 상대적으로 경미한 충격을 받았다(경미한 신고식 집단). 그러자 심한 신고식 집단이 경미한 신고식 집단보다 그 동아리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극심한 고통이 방어체계를 작동시켜, 즉시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한 것이다. 물론 고통을 겪고 나서 그런 관점을 지닌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겪는 신체적 고통은 나쁜 것이지만("세상에, 이거 진짜 아프잖아!"), 그 고통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특별한 사람들만 오는 고귀한 집단에 들어온 거 아니겠어?") 그렇게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또 다른 연구에서 전기 충격을 받을 때 뭔가 가치 있는 일을 위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고통을 덜 느낀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강렬한 전기 충격은 심리적 방어를 일으켜 그 집단을 높이 평가하게 만들었지만, 경미한 충격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의 남편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용서했으면서도, 차고 문을 움푹 파이게 해놓거나 집안 여기저기에 지저분한 양말을 벗어놓으면 화가 났던 경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동일한 역설을 경험한 것이다.

대니얼 길버트,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김영사. 259-260쪽.


두 줄 감상
1. 때로는 귓가에 앵앵거리는 모기가 폭격기보다 무서운 법
2. 역시 전기 충격은 심리학의 로망~♡ (응?)

by 아이추판다 | 2008/08/13 00:35 | 트랙백 | 덧글(11)

변화맹

"괴짜심리학(Quirkology)"의 저자 스티브 와이즈만이 만든 동영상.





이어지는 내용

by 아이추판다 | 2008/06/08 18:30 | 트랙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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