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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대한 심오한 이해?

얼마 전에 언어는 마음을 결정한다?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Commented by 바람길 at 2009/06/08 06:34
언어학-문학 관련 전공자입니다만,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결정한다"라는 말에 대해서 너무 표층적으로 이해해서 말씀하시는건 아닌가 싶군요. 지금까지 언급하신 내용들은 언어가 아니면 무엇을 통해서 사고한 것인지도 궁금하고요.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건 어휘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닌, 언어가 만들어내는 체계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는게 좀 더 제대로 이해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어떤 개념이나 사물을 지칭하는 언어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재 언어로 존재하는 다른 개념이나 사물들과의 차이에 의해 그 개념이나 사물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도 결국 언어의 체계에의해 사고하게 되는 것이 되겠죠.

일반적으로 이런 쪽에서 언급되는 언어란, 단순한 어휘들이 아닌, 윗 분 말대로 차이에 의해 나타나는 어떤 체계를 지칭하는 말인거죠. 아이추판다님은 이 언어에 대한 인식을 언어가 표면적으로 갖는 어휘 등에만 한정해서 사용하셨는데, 이런 논의를해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언어 자체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할듯합니다.

아, 그리고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말을 언어학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건 어디에서 누가 그렇게 언급한건가요. 현대 언어학자중에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캐매장당할텐데...

생각은 언어로 하는 게 아니다. 뇌로 하는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들도 상당히 복잡한 판단을 하지만, 똑똑한 사람도 머리를 다치면 바보가 된다. 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병렬분산처리(parallel distributed processing)다. "개가 사람을 문다"라는 말에는 '개', '사람'과 같은 기호가 순서대로 나타난다. 만약 이 문장에서 한 부분, 예를 들어 '사람'을 지워버리면 개가 뭘 물었는지 알 수가 없다. 똑같이 직렬 처리를 하는 컴퓨터도 프로그램에서 한 부분을 잘라내면 작동을 멈춘다. 그러나 사람의 뇌에서는 여러 개념이 뉴런들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패턴 속에서 동시에 처리되기 때문에 이 네트워크의 일부가 손상되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래서 알츠하이머 같은 퇴행성 질환에 걸려도 초기에는 일상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는 것이다. 전체적인 패턴이 유지되는 이상 뇌의 기능은 그대로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아한 퇴행(graceful degradation)'이라 한다. 물론 신경망이 심하게 파괴되면 이런 패턴도 더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냥 에러 내고 멈춰버리는 컴퓨터와 달리 뇌는 비록 전혀 다른 방식이지만 계속 작동을 한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진 않더라도 도움을 주거나 방해를 하는 형태로 영향을 줄 수는 있다. 색 지각의 경우에 이를 입증하는 여러 가지 실험이 이뤄졌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에서는 영어나 한국어와 달리 밝은 파랑과 어두운 파랑을 다른 단어로 나타내고, 파랑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다. 그래서 실험을 해보면 러시아어 화자는 영어 화자나 한국어 화자보다 밝은 파랑과 어두운 파랑을 좀 더 빨리 구별한다. Siok 등 (2009)의 논문에 나온 실험 하나를 보자.

위의 그림을 보자. G1과 G2는 모두 영어에서 "green"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색이고, B1과 B2는 "blue"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색이다. 컴퓨터 화면에 위의 그림 오른쪽과 같이 모두 똑같은 색의 네모를 둥그렇게 배열하고 1,2,3,4 중에 한 위치에만 다른 색의 네모를 표시한다고 해보자. 사람들에게 다른 색 네모가 왼쪽(1 또는 2)에 나타났는지 오른쪽(3 또는 4)에 나타났는지 버튼을 눌러 대답하게 해보면 영어로 똑같이 초록(green)인 G1, G2나 똑같이 파랑(blue)인 B1, B2의 경우보다 G2, B1의 경우에 더 빨리 버튼을 누른다.

위의 그래프는 그 실험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Between-category는 다른 범주의 색, 즉 초록(G2)과 파랑(B1)을 구별하는 경우다. Within-category는 같은 범주의 색, 즉 같은 초록인 G1과 G2 또는 같은 파랑인 B1과 B2를 구별하는 경우다. 화면에 그림이 나타난 순간부터 버튼을 누르는데 걸리는 평균적인 시간은 다른 범주의 경우 468.80밀리초, 같은 범주의 경우는 507.89밀리초가 걸렸다. 평균적으로 거의 40밀리초나 빠른 것이다. 밀리초는 1000분의 1초로 40밀리초는 0.04초다. 너무 큰 차이라 손발이 다 오그라든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에 이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는 어마어마한 무엇이 아니라 뇌의 일부분이 담당하는 기능이다. 90%의 사람들은 좌뇌에서 언어를 처리한다. 그런데 왼쪽 시야에 비친 영상은 우뇌, 오른쪽 시야에 비친 영상은 좌뇌에서 처리한다. 따라서 오른쪽 시야에 비친 영상은 언어의 도움을 받기가 좀 더 쉽다. 위의 그래프에서 LVF((Left Visual Field)와 RVF(Right Visual Field)는 각각 시야의 왼쪽과 오른쪽을 가리킨다. 다른 범주의 경우에는 오른쪽 시야가 좀 더 빠르다. 같은 범주의 경우에도 오른쪽 시야가 좀 더 빠르지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다. 이 실험과 동시에 fMRI로 촬영한 뇌영상에서도 시각 영역의 반응이 다른 언어 관련 영역의 반응에 동반해서 강화되는 것이 관찰된다.

이런 실험 결과는 소박한 언어결정론과 실제로 과학적으로 연구된 사고와 언어의 관계가 안드로메다만큼 멀리 떨어져있다는 걸 보여준다. 색은 결국 후두엽의 시각영역이 구별하는 것이다. 좌뇌 측두엽과 전두엽에 퍼져있는 언어 관련 영역들은 시각 영역을 도울 수는 있지만 그건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우뇌의 경우엔 별 도움이 안된다. 그것 뿐이다.

이 정도가 현재의 과학계에서 사피어-워프 가설에 대한 최대한 우호적인 연구다. 엄격히 따지면 워프 가설하고는 별로 상관도 없다. 굳이 언어가 아니라도 저런 식으로 한 영역이 다른 영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밝은 초록을 보여줄 때마다 전기 충격이라도 준다면 밝은 초록과 어두운 초록을 귀신같이 빠르게 구별하겠지만 그렇다고 전기 충격이 사고를 결정하는 건 아니다.

언어는 마음을 결정한다?는 학부 교과서 수준의 내용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교과서 수준의 이해도 없는 사람들이 무려 '언어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자처하면서 댓글을 달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갑갑하다.

참고 문헌

Siok, W. T. et al. (2009). Language regions of brain are operative in color perception. PNAS, 106(20), 8140-8145.

by 아이추판다 | 2009/06/16 23:40 | 트랙백 | 핑백(2) | 덧글(19)

언어는 마음을 결정한다?

뜻을 이해하기 곤란한 리플 (어부님)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쉴데로 쉬어서 더이상 논의할 가치도 없는 떡밥이다. 우리가 사고를 언어로 표현하고 전달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만연한 게 아닌가 싶은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터무니 없는 생각이란 걸 알 수 있다.

개념은 머리에 떠오르는 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혀 끝에서 맴도는 현상을 설단현상(설단=혀 끝)이라고 한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 쯤 경험해봤을 이 현상은 언어와 사고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실어증 등의 언어장애가 있는 경우에도 다른 지능은 정상인 경우가 있다.

또, 만약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그 대상을 가리키는 새로운 말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그 대상에 대해 사고할 수가 없다. 그런데 가리키는 말이 없어 사고할 수 없다면 그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조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가? 천만에. 매년 수 십~수 백 개의 새로운 말들이 생겨나고 있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주장을 심리학이나 언어학에서는 주창자의 이름을 따서 사피어-워프 가설 또는 간단히 워프 가설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심리학자, 언어학자들은 워프 가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파푸아 뉴기니에 사는 한 부족은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을 나타내는 말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부족 사람들에게 색종이를 보여주고 잠시 후에 아까봤던 색종이를 골라보라고 하면 정확히 골라낸다.

아예 언어가 없는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동물들도 대상을 인식할 수 있고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다. 침팬지는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먹이가 있으면 받침대나 사다리를 가져오기도 하고, 입구가 오목해서 손이 들어가지 않는 병에 먹이가 있으면 물을 가져다 병에 부어 먹이가 떠오르게 한 다음 꺼내먹는다. 드 발의 책들을 보면 서열 2, 3위가 서열 1위를 몰아내기 위해 음모를 짜고 실행하는 것과 같은 사례들이 소개된다.

어부님 글에 달린 댓글 중에 보면 영어에 '고소하다'라는 뜻의 단어가 없으니 그들이 느끼는 고소한 맛과 우리가 느끼는 고소한 맛이 같은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논법인데 알 수 없기는 뭐가 없어. 앞의 문단에서 소개한 실험 절차에서 색종이를 식품으로만 바꾸면 된다.

아니 이건 실험을 해볼 것도 없다. 요리 만화를 보면 등장 인물들이 맛을 표현하기 위해 매우 장황한 비유를 사용한다. 이 사람들이 느낀 맛을 직접 표현할 어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휘가 없이도 우리는 맛을 느낄 수 있고, 일단 맛을 느낀 다음에는 어휘가 없으면 비유를 동원해서라도 전달하려고 시도 할 수 있다. 사고가 언어를 결정하지,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맛?

by 아이추판다 | 2009/03/30 11:05 | 트랙백(2) | 핑백(2) | 덧글(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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