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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것

지난 1년간 라캉주의자들은 수 많은 댓글과 트랙백을 이 블로그에 달아왔다. 나는 그들의 글을 볼 때마다 항상 놀랐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는 기분이랄까. 지금까지 그들이 보여온 행태들을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 읽지 않은 책 인용하기
  • 남이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우기면서 비난하기
  • 대중서 한 권 읽고 모든 걸 다 안다고 주장하기
  • 라캉 학회에나 오라고 대꾸하기
  • 기본적인 용어 틀리기
  • 맥락없이 사람 이름 잔뜩 늘어놓기
  • 등등
그들은 기본적인 소양이 결여되어 있음을 매우 다채로운 형태로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이 목록에 "자기 글 지우고 도망가기"라는 새로운 항목을 추가했다. 그렇게 하면 자기 글만이 아니라 그 밑에 달린 다른 사람들의 덧글까지 지워지기 때문에 아주 잘못된 행동이다. 라캉주의자들은 라캉식 정신분석이 대화고 윤리적인 것이라고 하던데 그들 자신에게는 대화의 윤리가 결여되어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알튀세'라는 이름으로 달리는 댓글과 트랙백은 차단시켰다. 어째서 라캉주의자들은 이런 자들 밖에 없는지 한심하고도 흥미롭다.

by 아이추판다 | 2009/01/25 16:24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3)

이상한 홍준기

라캉주의식 설명법?

알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프로이트 당시 히스테리자들은 대부분 아버지 병간호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프로이트가 분석치료했던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 병간호를 오래하면 히스테리에 걸린다'고말하곤 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특정한' 원인을 찾으려는 사고방식이다. 즉 아버지 병간호라는 원인이 히스테리 발병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직선적 인과론'에 근거한 '단순한' 사고방식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생각을 비웃으면서 아버지 병간호를 했기 때문에 히스테리자가 된 것이 아니라,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병간호를 한다고 설명했다. 아주 단순한 예이지만 이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단순한 과학적, 상식적 사고는 어떤 '확실한' '특정한' 원인을 찾기를 원하므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다가 히스테리에 걸렸다고 말하지만, 정신분석학은 그들이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매력적인 남성'의 구애를 뿌리치고 아버지 병간호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뒤집어 말한다. 위의 예는 병간호라는 단순한 원인 - 혹은 어떤 다른 '특정한' 원인이라도 마찬가지인데 - 에 의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보았던 히스테리가 사실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상태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문제를 이해하기위해서는 상식적, 과학적 사고가 막연히 가정하는 '직선적 인과론'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글에는 무척 잘못된 점이 많다. 아버지 병간호 때문에 히스테리에 걸리는가 아니면 히스테리 때문에 아버지 병간호를 하는가? 이건 과학적 문제다. 과학적 문제를 과학적 사고로 풀면 안된다고 주장하니 이것부터 잘못이다. 과학적 사고가 '확실하고 특정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도 현대 과학의 확률론적 세계관과 방법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다. 게다가 프로이트야말로 실수 하나에도 원인을 일일이 찾아내려고 한 사람인데 도대체 누가 직선적 인과론에 빠져있다는 것인지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그런데 이런 잘못 쯤은 눈감고 넘어갈 수 있다. 나는 관대하다.

댓글 중에 아버지 병간호가 히스테리를 일으킨다는 주장이나 히스테리가 있어서 아버지 병간호를 했다는 주장이나 그게 그거라는 의견을 주신 분이 많았다. 홍준기가 그만큼만 되었어도 내가 '이상하다'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홍준기가 쓴 문단만 근거로 한다면 프로이트의 주장은 아버지 병간호가 히스테리를 일으킨다는 주장보다 설명력이 떨어진다.

홍준기는 이 문단에서 제시하는 유일한 사실은 "프로이트 당시 히스테리자들은 대부분 아버지 병간호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프로이트가 분석치료했던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뿐이다. 홍준기도 그렇고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도 그렇지만 여기서 '대부분'이라는 말을 간과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아버지 병간호를 하려면 그 이전에 아버지가 병에 걸려야 한다. 병에 걸리지 않은 아버지를 간호할 수는 없다. 따라서 히스테리에 걸린 여성들의 '대부분'이 아버지 병간호에 많은 시간을 보내려면 먼저 그 이전에 히스테리에 걸린 여성들의 아버지 '대부분'이 병에 걸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병간호에 많은 시간이 필요할 정도의 그런 병에 걸려야 한다.

그렇다면 19세기말~20세기초 비엔나에 살던 결혼적령기 딸을 둔 남성들이 하나같이 중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있었거나 아니면 딸의 히스테리와 아버지의 발병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어야 한다. 당시 비엔나 중년남성의 건강상태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 없지만 아무래도 40~50대 남성들이 하나같이 병석에 누워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남는 가능성은 하나 뿐인데 히스테리와 아버지의 발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벌써 매우 이상하다.

아버지의 발병 때문에 히스테리에 걸렸다고 하면 아버지 병간호가 히스테리를 일으켰다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그러면 딸의 히스테리 때문에 아버지가 병에 걸렸거나 아니면 제3의 원인이 딸의 히스테리와 아버지의 발병에 관계해야 한다. 그런데 딸의 히스테리 때문에 아버지들이 중병에 걸려 픽픽 쓰러진다는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하필 히스테리에만 아버지가 발병하는 것도 이상하고, 어머니는 어쩌고 아버지만 병에 걸리는 것도 이상하다.

제3의 원인이라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딸에게 동시에 전혀 다른 질병을 발병시키는 그런 원인이 뭐가 있을까? 유전이라고 해도 이상하고 환경적 요인에서 찾기에도 이상하다. 아버지와 딸에게는 영향을 미치는데 어머니와 아들에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가장 이상한 건 홍준기다. 히스테리자 대부분이 아버지 병간호에 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아버지 병간호가 히스테리를 일으킨다고 말하기엔 증거가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건 아니다. 그런데 홍준기는 영 딴 소릴 하고 있다. 만약 히스테리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 병간호를 했다고 말하려면 당대 비엔나에서는 아버지가 병에 걸려도 딸들이 오랜 기간 병간호 하는 일은 드물었다든지 그런 얘기를하든지 아니면 아버지와 딸이 동시에 다른 병에 걸리는 이상한 현상에 대해 뭔가 설명을 해야 한다. 홍준기는 자신이 반대하는 가설에 유리한 증거만을 내놓고 자신이 지지하는 가설에 유리한 증거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홍준기가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를 줄곧 비판하다보니 비과학적이고 몰상식적인 사고를 하게된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실수 행위들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을 따라 홍준기의 무의식 속에 프로이트에 대한 적대감이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홍준기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프로이트의 주장에 반대되는 글을 쓴다. 정말 이상하다.

덧. 프로이트의 첫 히스테리 환자로 유명한 안나 O.의 아버지는 1880년 7월에 늑막 주변 농양에 걸려 10개월 이후인 1881년 4월에 죽었다. 안나 O.도 아버지 병간호를 했으나 1개월만에 히스테리가 도져 병간호를 그만두었다. 10개월이든 1개월이든 어느 쪽이나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매력적인 남성'의 구애를 뿌리치고 아버지 병간호를 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말할만한 '오랜 세월'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홍준기가 인용한 프로이트의 주장이 어디에 나오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 프로이트 자신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했을까?

by 아이추판다 | 2008/10/04 18:45 | 트랙백(3) | 핑백(6) | 덧글(13)

집안의 희망

추씨종친회 "추부길, 10만 추 씨 희망이었다" (프레시안)

조선일보에서 가장 해괴한 코너인 '조용헌 살롱'은 조선일보에서 가장 훌륭한 코너이던 '이규태 칼럼'을 잇는 코너인데 이규태 칼럼이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해부하던 코너라면 조용헌 살롱은 그 자체로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까발려 보여주는 자료다. 이 칼럼의 어제자 제목은 "수재 집안"이다. 내 생각에 18세기 스위스의 베르누이 일가쯤 되어야 이런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칼럼은 "근래에 학벌 좋은 집안으로는 인동 장씨인 장재식(張在植·73) 집안을 들 수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청포도를 마가린에 비벼먹는 듯한 부조화. 내가 이 맛에 이 칼럼을 끊질 못한다. 나 정신적으로 좀 M인 듯.

장재식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김대중 정부에서 산자부 장관을 지냈다. "사다리 걷어차기"의 장하준이 그의 아들이고, 고려대 교수인 장하성과 노무현 정부에서 여성부 장관을 한 장하진이 그의 조카다. 확실히 학벌이 좋다거나 출세를 했다고 하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베르누이 일가처럼 베르누이 법칙, 베르누이 분포, 베르누이 정리 이런 게 줄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울대 많이 보내고 교수, 장관 많이 냈다고 '수재'라고 하면 이 단어가 좀 아깝다.

게다가 조선일보와 정치적 대척점에 선 인물들을 단지 출세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칭찬하는 칼럼을 쓰다니 이게 무슨 농담 같은 소리인지. 어느 정권에서건 높은 자리만 지내면 그걸로 땡큐라는 건데 사적으로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신문지상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출세는 지위와 경력, 성공은 업적과 성취이다. 이 둘은 대체로 함께 가지만 어느 정도는 따로 놀 수도 있다. 하지만 출세는 곧 성공이고, 출세 이외에는 성공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는 조용헌 외에도 좀 많은 듯. 그러니까 코흘리개들이 일 년에 수천 명씩 합격하는 대학에 입학한 걸 자랑이라고 자기 얼굴 박아서 책 내고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지.

추부길이 실패한 청와대 비서관이라는 데는 좌우에 이견이 없을 듯하다. 이 사람이 무려 홍보기획비서관. 세상에 어느 홍보 담당자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국에 교회 가서 사탄의 무리 운운하고 앉아있냐? 무슨 부두교 신도라서 주말마다 인형에 칼을 꽂다가도 상황이 그러면 말 조심을 해야지. 추씨 종친회에 제 정신 박힌 사람이 셋만 있어도 족보에서 파냈겠고만. 정말 추씨 종친회에 인물이 없긴 없는 듯.

by 아이추판다 | 2008/06/22 23:21 | 트랙백 | 핑백(1) | 덧글(4)

인문학적 기본 소양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과학철학 책은 내가 알기로 카르납, 포퍼, 쿤, 해킹이 전부다. 라카토스는 수학사 책이 하나 번역되어 있고, 파이어아벤트는 이런 저런 편역서에 논문이 몇 편 번역되어 있다. 좀 넓게 봐서 콰인이나 툴민까지 치면 한 10권 정도 번역되어 있을 것이다. 해설서나 개론서까지 다 합치더라도 과학철학책은 썩 많은 편이 아니다.

알라딘에서 "과학철학"으로 검색하니 69권이 나온다. 판매량 순으로 정렬하니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가 1위인데 세일즈포인트가 1688이고, 대학교재로 널리 쓰이는 과학철학 개론서인 차머스의 "현대의 과학철학"이 5위로 세일즈포인트는 1251이다. 본격적인 학술서인 해킹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는 14위에 가야 나온다. 세일즈포인트는 221.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없는 게 이상해서 찾아보니 "청소년을 위한 과학"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다. "토마스 쿤"으로 검색하면 10권이 나오는데 그 중에 3권은 논술책이고 3권은 "과학혁명의 구조"의 까치판, 두산동아판, 이대출판부판이다. 해설서 1권, 쿤을 둘러싼 논쟁을 모은 논문집 1권, 전기 1권이 있다. 조인래 교수가 편역한 논문집은 절판된 모양이다.

한편 라캉으로 검색하면 52권이 나온다. 판매량 순으로 정렬하면 1위는 지젝이 쓴 "HOW TO READ 라캉"이다. 세일즈포인트는 2648. 과학철학 1위인 "악마의 사도"보다 잘 팔리는 책이 6권이나 있다. 해킹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보다 잘 팔리는 책은 34권이나 있다. 역자의 표현에 따르면 "현존하는 최상급 과학철학자"라는 해킹이 한국의 영어과 교수가 쓴 "라캉 장자 태극기"보다도 덜 팔리는 형편이다.

잠시 괴델의 불가능성 정리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책들도 찾아봤다. 논리학의 대가인 불로스가 쓰고 분석철학을 전공한 김영정이 번역한 "계산가능성과 논리"는 31이다. 오역이 심해 좀 걸리긴 하지만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는 상권이 1873, 하권이 1505다. 호프스태터의 책이 나름 베스트셀러란 걸 염두에 두도록 하자.

꼭 과학철학책이 많이 팔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라캉을 방어하기 위해 쿤이나 과학철학을 인용하고, 괴델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과학철학자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괴델의 정리가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했다면 그래서 라캉과 관련된 책을 사 읽는 사람들이 몇 권 되지도 않는 과학철학책이나 수리논리학책을 사 읽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안 읽었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백번 양보해서 안 읽는 것도 상관없다치자. 그런데 읽어보지도 않은 얘기를 아는 척 떠드는 이유가 뭔가? 논술학원에서 특강 하나 듣고 대입논술에서 쿤 가라사대 하는 고등학생이랑 다를바 없다. 그건 인문학적 자세가 아니다.

라캉은 자신의 거울단계 이론을 Henry Wallon의 실험에 근거해서 주장했으면서도 평생 Wallon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라캉'교도'들의 지적 불성실성은 그들의 교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인가보다. 과학의 영역을 넘보기 전에 인문학적 기본 소양부터 갖춰야 할 일이다.

by 아이추판다 | 2008/04/07 11:28 | 트랙백(1) | 핑백(1) | 덧글(9)

라캉을 모르면 막장인가효?

어느 게시판을 거닐다가 친구한테 라캉을 모른다고 면박을 받았다는 글을 보았다. 인문사회과학 쪽 사람들 중에 몇몇은 소위 '프랑스 철학'에 기이할 정도로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그건 뭐라고 할 건 아닌데 라캉이라면 사정이 좀 다르다. 라캉은 한계도 많이 지적되지만 나름대로 업적을 인정받는 프로이트나 융 같은 정신분석가들과 달리 심리학에서 완전 '듣보잡'이다. 어떤 사람은 라캉이 심리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라고 하겠지만, 철학은 메타 학문이기 때문에 개별 학문에서도 인정 받지 못하는 내용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라캉을 즐겨 입에 올리는 사람 중에 90%는 페히너나 에빙하우스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을 텐데 이것은 마치 양동봉은 아는데 뉴턴은 모르거나, 이재율은 아는데 페르마는 모르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로 매우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도 번역조차 제대로 안되어 있는 인물에 대해, 그렇다고 자신도 원서로 읽은 것도 아닐텐데, 남에게 모른다고 면박까지 줄 수 있다면 놀랄만큼 후안무치한 일이다.

by 아이추판다 | 2008/03/08 20:18 | 트랙백(1) | 핑백(6) | 덧글(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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