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라캉

35년전

이상한 홍준기에서 언급했던 홍준기의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더 확실한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 생물학적, 생리학적 요인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도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인간의 '심리' 문제의 원인을 '육체'에서 찾는 것만큼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조작 가능한 기계로서의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인간의 존엄을 유린했는지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통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 혹은 심리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정신과 무의식이 어떤 '특정한 원인'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 달리 말하면 어떤 특정한 과학체계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라깡은 과학이나 보편적 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의 특수성, 개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주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라깡에게 주체는 근대의식철학에서처럼 과학적 진리, 절대적, 형이상학적 진리를 보증하는 '신적'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환원할 수 없는 인간의 특수성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중략)

왜 우리는 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학만큼 인간에 대해 철저하게 탐구했던 학문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독자적인 학문으로서 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학만큼 우리들의 삶과 학문,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깊은 영향을 끼친 분야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중략)

정신의학이나 심리학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의학 분야나 심리학과에서 정신분석학이론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최근에 국내의 정신의학 분야에서도 프로이트가 활용되기 시작했으나 출판된 저작들을 살펴보면 사실 제목만 프로이트이지 내용은 전혀 프로이트와 상관없는 책이 대다수이다. 심리학 분야에서 프로이트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내에 소개되었으나 구색을 맞추기 위해 형식적으로 몇 페이지 정도 지면을 할애해 도식적으로 소개할 뿐,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심리학 책은 찾아보기힘들다.

 ACT-R이라는 마음의 구조를 설명하는 모형이 있다. 이런 종류의 모형을 인지 아키텍처라고 한다. ACT-R을 돌리면 0.05초 간격으로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은 이 시뮬레이션 결과를 변환해서 뽑아낸 뇌 활동 예측(실선)과 fMRI로 촬영한 실제 뇌 활동(점을 연결한 선)을 비교한 그래프이다. 참고로 ACT-R은 1973년부터 개발된 뇌과학과는 전혀 무관한 순수한 심리학적 모형이고 그 시절에 fMRI 따윈 없었다.

Anderson, J. R.,  Finchama, J. M., Qina, Y., & Stoccoa, A. (2008). A central circuit of the mind.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12(4), 136-143 .

간단히 코멘트.

(1) 마음을 연구하는 것과 뇌를 연구하는 것은 다르지만 마음을 제대로 연구한다면 뇌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2) 1973년은 아직 라캉이 살아서 활동하던 시절이다. 그 시절에 이미 격차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지금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3) 언제부터 '철저하다'가 "말도 안되는 '은유'나 늘어놓으면서 사기나 친다"라는 뜻이었지?

(4) 나를 가르친 어느 교수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소리치곤 했다. "지식이 없는 열정은 쓰레기라고!" 백 번 맞는 말이다.

by 아이추판다 | 2008/10/11 03:30 | 트랙백 | 덧글(18)

이상한 홍준기

라캉주의식 설명법?

알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프로이트 당시 히스테리자들은 대부분 아버지 병간호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프로이트가 분석치료했던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 병간호를 오래하면 히스테리에 걸린다'고말하곤 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특정한' 원인을 찾으려는 사고방식이다. 즉 아버지 병간호라는 원인이 히스테리 발병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직선적 인과론'에 근거한 '단순한' 사고방식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생각을 비웃으면서 아버지 병간호를 했기 때문에 히스테리자가 된 것이 아니라,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병간호를 한다고 설명했다. 아주 단순한 예이지만 이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단순한 과학적, 상식적 사고는 어떤 '확실한' '특정한' 원인을 찾기를 원하므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다가 히스테리에 걸렸다고 말하지만, 정신분석학은 그들이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매력적인 남성'의 구애를 뿌리치고 아버지 병간호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뒤집어 말한다. 위의 예는 병간호라는 단순한 원인 - 혹은 어떤 다른 '특정한' 원인이라도 마찬가지인데 - 에 의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보았던 히스테리가 사실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상태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문제를 이해하기위해서는 상식적, 과학적 사고가 막연히 가정하는 '직선적 인과론'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글에는 무척 잘못된 점이 많다. 아버지 병간호 때문에 히스테리에 걸리는가 아니면 히스테리 때문에 아버지 병간호를 하는가? 이건 과학적 문제다. 과학적 문제를 과학적 사고로 풀면 안된다고 주장하니 이것부터 잘못이다. 과학적 사고가 '확실하고 특정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도 현대 과학의 확률론적 세계관과 방법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다. 게다가 프로이트야말로 실수 하나에도 원인을 일일이 찾아내려고 한 사람인데 도대체 누가 직선적 인과론에 빠져있다는 것인지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그런데 이런 잘못 쯤은 눈감고 넘어갈 수 있다. 나는 관대하다.

댓글 중에 아버지 병간호가 히스테리를 일으킨다는 주장이나 히스테리가 있어서 아버지 병간호를 했다는 주장이나 그게 그거라는 의견을 주신 분이 많았다. 홍준기가 그만큼만 되었어도 내가 '이상하다'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홍준기가 쓴 문단만 근거로 한다면 프로이트의 주장은 아버지 병간호가 히스테리를 일으킨다는 주장보다 설명력이 떨어진다.

홍준기는 이 문단에서 제시하는 유일한 사실은 "프로이트 당시 히스테리자들은 대부분 아버지 병간호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프로이트가 분석치료했던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뿐이다. 홍준기도 그렇고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도 그렇지만 여기서 '대부분'이라는 말을 간과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아버지 병간호를 하려면 그 이전에 아버지가 병에 걸려야 한다. 병에 걸리지 않은 아버지를 간호할 수는 없다. 따라서 히스테리에 걸린 여성들의 '대부분'이 아버지 병간호에 많은 시간을 보내려면 먼저 그 이전에 히스테리에 걸린 여성들의 아버지 '대부분'이 병에 걸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병간호에 많은 시간이 필요할 정도의 그런 병에 걸려야 한다.

그렇다면 19세기말~20세기초 비엔나에 살던 결혼적령기 딸을 둔 남성들이 하나같이 중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있었거나 아니면 딸의 히스테리와 아버지의 발병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어야 한다. 당시 비엔나 중년남성의 건강상태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 없지만 아무래도 40~50대 남성들이 하나같이 병석에 누워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남는 가능성은 하나 뿐인데 히스테리와 아버지의 발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벌써 매우 이상하다.

아버지의 발병 때문에 히스테리에 걸렸다고 하면 아버지 병간호가 히스테리를 일으켰다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그러면 딸의 히스테리 때문에 아버지가 병에 걸렸거나 아니면 제3의 원인이 딸의 히스테리와 아버지의 발병에 관계해야 한다. 그런데 딸의 히스테리 때문에 아버지들이 중병에 걸려 픽픽 쓰러진다는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하필 히스테리에만 아버지가 발병하는 것도 이상하고, 어머니는 어쩌고 아버지만 병에 걸리는 것도 이상하다.

제3의 원인이라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딸에게 동시에 전혀 다른 질병을 발병시키는 그런 원인이 뭐가 있을까? 유전이라고 해도 이상하고 환경적 요인에서 찾기에도 이상하다. 아버지와 딸에게는 영향을 미치는데 어머니와 아들에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가장 이상한 건 홍준기다. 히스테리자 대부분이 아버지 병간호에 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아버지 병간호가 히스테리를 일으킨다고 말하기엔 증거가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건 아니다. 그런데 홍준기는 영 딴 소릴 하고 있다. 만약 히스테리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 병간호를 했다고 말하려면 당대 비엔나에서는 아버지가 병에 걸려도 딸들이 오랜 기간 병간호 하는 일은 드물었다든지 그런 얘기를하든지 아니면 아버지와 딸이 동시에 다른 병에 걸리는 이상한 현상에 대해 뭔가 설명을 해야 한다. 홍준기는 자신이 반대하는 가설에 유리한 증거만을 내놓고 자신이 지지하는 가설에 유리한 증거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홍준기가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를 줄곧 비판하다보니 비과학적이고 몰상식적인 사고를 하게된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실수 행위들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을 따라 홍준기의 무의식 속에 프로이트에 대한 적대감이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홍준기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프로이트의 주장에 반대되는 글을 쓴다. 정말 이상하다.

덧. 프로이트의 첫 히스테리 환자로 유명한 안나 O.의 아버지는 1880년 7월에 늑막 주변 농양에 걸려 10개월 이후인 1881년 4월에 죽었다. 안나 O.도 아버지 병간호를 했으나 1개월만에 히스테리가 도져 병간호를 그만두었다. 10개월이든 1개월이든 어느 쪽이나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매력적인 남성'의 구애를 뿌리치고 아버지 병간호를 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말할만한 '오랜 세월'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홍준기가 인용한 프로이트의 주장이 어디에 나오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 프로이트 자신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했을까?

by 아이추판다 | 2008/10/04 18:45 | 트랙백(3) | 핑백(4) | 덧글(12)

라캉주의식 설명법?

옆 사람 자리에 "라깡의 재탄생"이라는 책이 있어서 몇 쪽을 슬쩍 넘겨봤다.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어서 여기에 옮겨본다. 다음은 편자인 홍준기가 책의 서론에 해당하는 글로 쓴 '자크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의 한 문단이다. 강조는 원문 그대로 옮겼다.

알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프로이트 당시 히스테리자들은 대부분 아버지 병간호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프로이트가 분석치료했던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 병간호를 오래하면 히스테리에 걸린다'고말하곤 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특정한' 원인을 찾으려는 사고방식이다. 즉 아버지 병간호라는 원인이 히스테리 발병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직선적 인과론'에 근거한 '단순한' 사고방식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생각을 비웃으면서 아버지 병간호를 했기 때문에 히스테리자가 된 것이 아니라,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병간호를 한다고 설명했다. 아주 단순한 예이지만 이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단순한 과학적, 상식적 사고는 어떤 '확실한' '특정한' 원인을 찾기를 원하므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다가 히스테리에 걸렸다고 말하지만, 정신분석학은 그들이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매력적인 남성'의 구애를 뿌리치고 아버지 병간호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뒤집어 말한다. 위의 예는 병간호라는 단순한 원인 - 혹은 어떤 다른 '특정한' 원인이라도 마찬가지인데 - 에 의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보았던 히스테리가 사실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상태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문제를 이해하기위해서는 상식적, 과학적 사고가 막연히 가정하는 '직선적 인과론'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문단엔 단순히 틀렸거나 잘못된 걸 넘어서 아주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다. 찾아들보세요! (정답은 내일)

by 아이추판다 | 2008/10/03 15:54 | 트랙백 | 핑백(1) | 덧글(10)

사전예방의 원칙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대상은 일단 금지시키고보자는 입장을 "사전예방의 원칙"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안전성과 위험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니까 충분한 연구결과가 나올 때까지 생산과 유통을 금지하자는 것이다. 이 '원칙'에 대해서는 찬반이 분분하지만 환경 관련 문제 등에서는 많이 적용되는 원칙이다.

어느 문화평론가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가보니 "이런 소를 먹자는 것인가"라는 글을 맨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미국에서 '그런 소'를 먹고도 인간광우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지금까지 3명이었다. 어쨌든 사전예방의 원칙을 따른다면 미국 소도 수입 안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참 묘한 게 이 문화평론가는 몇 년 전 조승희 사건 때 같은 블로그에서 조승희가 심리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이 사건이 미국 정신의학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며, 조승희가 제때 라캉식 정신분석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분열병으로 발전해서 그런 사건이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을 자기 블로그에서 올렸다.

정신분열병 자체로 죽음에 이르진 않는다. 그러나 정신분열병에 걸리면 뇌졸중이나 심장마비 같은 다른 질병에 걸릴 확률도 상승한다. 그리고 정신분열병 환자의 10%는 자살로 목숨을 잃는다. 이런 이유로 정신분열병 환자의 평균 수명은 일반인보다 10년 정도 짧다. 정신분열병의 발병률은 인간광우병보다 훨씬 높아서 현재 미국의 경우 3백만명의 정신분열병 환자가 있다. 광우병보다 정신분열병으로 죽은 사람이 수 천에서 수 만배는 많을 것이다. 하다못해 조승희가 죽인 사람만 33명으로 미국에서 광우병으로 죽은 사람 수보다 1100% 많다.

예전에 라캉 얘기를 한참할 때 찾아볼만큼 찾아봤지만 라캉식 정신분석이 무슨 효과가 있다는 연구는 찾지 못했다. 다른 치료법을 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라캉식 정신분석이 정신분열병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연구는 더더욱 찾지 못했다. 아니 라캉식 정신분석이 해롭지 않다는 연구조차 없더라. 라캉주의자들의 행태로봐서는 그런 연구를 할 것 같지도 않고. 라캉이 환자를 천명을 치료했네 어쩠네 하는 얘기를 들어본게 전부였다. 그 문화평론가도 특별히 근거를 내놓지는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그래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먹지 말아야 한다고 치자. 그런데 라캉식 정신분석. 이건 연구 안되어 있기로는 미국산 쇠고기보다 더 심하다. 이런 치료받고 환자가 자살이라도 할지 누가 아나.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대상은 연구가 충분히 이뤄질 때까지 일단 금지시키자는 사전예방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자면 미국산 쇠고기보다 라캉식 정신분석부터 수입을 막아야 한다.

by 아이추판다 | 2008/05/02 23:02 | 트랙백 | 핑백(1) | 덧글(17)

철학이 과학을 지배할 때

철학과 과학의 관계 설정을 둘러싼 논쟁은 근대에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그 중에서도 1920년대 소련에서 벌어진 논쟁은 가장 파국적인 결말로 치달았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자연과학 이론과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1920년대 이후 구소련에서 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즉 과학과 철학중에 어느 것을 우위에 놓을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는데, 이른바 '기계론자'와 '데보린주의자'들은 격렬한 논쟁을지속하였다.

초기에는 기계론자들이 우세하였는데, 기계론학파의 대표격인 스테파노프(I. I. Stepanov)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과학에서 분리된 철학 고유의 영역이란 없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란 현대과학의 최신의,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성과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기계론자들은, 변증법은 자연에서 도출된 것이고 정밀과학적 탐구에 의해 발견된 결과이므로 각 개별과학의 특수한 방법을 무시한 채 변증법적 법칙을 새로운 연구영역에 적용하여 탐구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데보린주의자들이 변증법을 선험적, 관념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처럼 과학을 철학의 우위에 두고 환원주의를 주장하던 기계론에 대한 격렬한 반격이 데보린(Abram M. Deborin;1881~1963)의 지도 하에 1925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데보린은 그 해에 발간된 엥겔스(F. Engels)의 저서 '자연변증법'을 근거로 하여 변증법을 과학의 지도원리로 내세우면서, 기계론자들이 철학을 무시하거나 독립적인 학문으로 인정하지않고 실증과학의 최종적 성과로만 파악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여타의 실증과학과 나란히 독립된 학문으로서 무엇보다도 과학 방법론과 과학적 인식의 이론으로 존재하고, 각 개별과학을 관통하여 그 내적 연관성을 회복시켜 준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의 우위성에 입각하여 변증법 법칙의 하나인 양질 전화의 법칙이 과학 연구에 관철되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 최성우, "구소련에서의 과학철학 논쟁"

어디서 많이 본 양상의 논쟁이다. 이 논쟁은 소련의 과학자들에게조차 아무런 직접적 영향을 주지 못했다. 대체로 '정치적' 논쟁에 불과했다. 문제는 정치가 과학을 지배하면서 이 문제는 곧 과학의 문제가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리센코는 자신의 이론이야말로 소련의 공식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념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즉, 획득형질의 유전은 ‘새로운 공산주의적 인간의 창조’라는 당의 정치적 입장과도 일치하는 것이라고 강변한 것이었다. 결국획득형질의 유전과 ‘식물의 위상적 발전’이라는 애매모호한 법칙을 주장한 리센코의 이론은 1948년 10월 당의 공식적 이론으로채택되었고, 이로 인하여 기존의 유전학, 식물학, 산림학 등은 ‘부르주아 과학’으로 비판받고 수많은 유능한 과학자들이 소련과학아카데미에서 쫓겨나는 사태를 빚었다.
더구나 리센코는 스탈린 시대에 소련과학 아카데미 유전학 연구소장 및 레닌 전연방 농업과학 아카데미 총재를 지냈기 때문에 정통유전학의 교육과 연구가 금지되었고, 그에 반대하는 이론을 펴는 유전학자들은 비밀리에 체포되거나 비공개재판으로 처형되는 경우까지있었다.

그 후 리센코는 자신의 이론에 따라 가능하다고 주장했던 곡물증산에 끝내 실패함으로써 흐루시초프의 실각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지만,오랫동안 리센코의 이론은 스탈린 추종자들에 의해 ‘부르주아 과학을 극복한 사회주의 과학의 탄생’이라고 널리 선전되었다. 반면에 냉전시대의 서구사회에서는 공산주의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허구성과 그것이 과학에 끼친 해악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얘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리센코 사건을 돌이켜 볼 때, 리센코의 이론 자체가 특정의 철학이념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과학의 독자적발전법칙이나 객관적 성격을 무시한 채 이데올로기적인 잣대를 멋대로 적용하여 과학이론을 단죄하려 한 것이 비극의 원인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리센코 사건은 단순히 과거 이데올로기 대립시대의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첨단과학기술의 시대에도 여전히 ‘리센코의 후계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기술이 파생하는 폐해와 문제점들을 고치자는 의도는 좋으나, 과학의 근본 성격에 대한 면밀한 고찰보다는 자신들의 편향된 이념성에 근거한 성급한 주장을 합리화시키기에 급급한 일부 급진적(Radical) 과학 사회학자들, 종교적 선입견으로 인하여 특정 과학이론에 반감을 지니고 ‘OO과학’이라는 사이비과학(Pseudo science)을 서슴없이 내세우는 일부 과학자들, 그저 서양과학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이라며 과학적 방법론과 검증보다는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잣대로 대중을 호도하려는 일부 '신과학'주의자들이 바로 리센코의 모습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 최성우, "다시 생각하는 리센코 사건의 교훈"

아인슈타인이 맨하탄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원자폭탄은 상대성 이론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라캉의 이론이 마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나타낸다면 그 자신이 치료에 대해 언급을 했건 말건 치료의 문제에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심리학은 의료 외에도 온갖 종류의 정책에 개입한다. 교육에서부터 경제, 복지, 공무원 채용 심지어 운전면허 발급에도 영향을 미친다. 라캉의 이론이 옳다면 이 모든 영역에 대해 라캉주의의 개입을 허용할 수 밖에 없다.

2차세계 대전 때 프랑스의 정신병원에서 굶어죽은 환자가 몇명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센코주의 농업정책으로 소련과 중국에서 굶어죽은 사람은 수천만명이다. 섣부른 반과학주의만큼 위험한것이 없다.

by 아이추판다 | 2008/04/13 19:01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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