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퍼즐"은 숫자판을 빈칸 쪽으로 밀어 옮겨서 숫자 순서대로 늘어놓는 퍼즐이다. 아래 그림과 같이 생겼는데 아마 다들 한 번 쯤 봤을 것이라 믿고 자세한 얘기는 생략.
퍼즐잡지를 만들어 파는 김사장은 어느날 15퍼즐 특집호를 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15퍼즐은 보통 순서대로 정렬된 상태에서 숫자판을 이리저리 섞어서 문제를 만드는 데 일일이 그렇게 하려니까 무척 귀찮았다. 김사장은 불현듯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냥 숫자를 아무렇게나 쓰면 되지 않겠는가! 앉은 자리에서 수 백개의 문제를 만든 김사장. 만족해하며 자신이 만든 문제를 하나 골라 풀어보는데 이거 왠걸. 좀처럼 풀리지가 않는 것이다.
| 13 | 10 | 11 | 6 |
| 5 | 7 | 4 | 8 |
| 1 | 12 | 14 | 9 |
| 3 | 15 | 2 | |
끙끙대던 김사장은 풀기를 포기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지나가던 "오덕후"군이 보였다. 늘 뭔가 어려운 말만 쓰는 덕후라면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사장은 덕후를 불렀다. "얘, 덕후야. 너 이 퍼즐 풀 수 있니?" 덕후는 다가와 퍼즐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모른다능."
"넌 평소에 별 쓸데 없는 건 다 알면서 이것도 모르니?"
"모든 퍼즐에는 풀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문제가 있다능. 괴델이 증명했다능. 불완전성 정리가 있다능."
"불완전성 정리가 뭔데?"
"나도 모른다능. 하여간 그런 거 있다능. 인간 이성의 한계라능."
하지만 퍼즐잡지 한 길로 30년. 김사장은 인간 이성의 한계가 아니라 역시 오덕후의 한계라 믿고 평소에 잘 알던 판다군에게 이 문제를 가져갔다. 판다는 대나무 숲속에서 교과서에 있는 연습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었다.
"판다야, 넌 이제 학교도 다 졸업했는데 수학문제는 왜 푸니?"
"아, 이건 수학문제가 아니고요. 조지 불로스라는 철학자가 쓴 논리학 교과서예요."
김사장이 언뜻보니 표지에는 "계산가능성과 논리: 수리논리학 입문"이라는 제목이 붙어있고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어쩌구 하는 말들이 보였다.
"너 혹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뭔지 아니? 덕후가 그것 때문에 이 퍼즐은 풀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데?"
"15퍼즐이네요. 이건 풀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어요."
"아니 어떻게?"
"숫자판 뒤에 더 작은 수의 숫자판이 몇 개있는지를 세서 더해보면 되요."
"난 뭔소린지 모르겠다."
"자, 여기 맨처음에 13이 있죠? 그러면 1부터 12까지 12개가 뒤에 있죠? 그 다음엔 10인데 1부터 9까지 9개가 뒤에 있죠? 그 다음엔 11인데 10은 앞에 있으니까 됐고 1부터 9까지 9개가 뒤에 있고요, 그 다음엔 6인데 1부터 5까지 5개가 뒤에 있고..."
판다는 숫자판의 갯수를 세며 종이에 숫자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12, 9, 9, 5, 4, 4, 3, 3, 0, 3, 3, 2, 1, 1, 0.
"이걸 모두 더하면 59가 되니까 홀수네요. 합이 홀수면 안 풀리고요, 짝수면 풀려요. 그러니까 이 문제는 풀 수 없네요."
"그럼 어떤 15퍼즐 문제도 이 방법으로 다 풀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단 말이니?"
"그럼요."
"아니 넌 이런 걸 어떻게 아니?"
"교과서를 중심으로 차근차근 공부하면 누구나 알 수 있죠."
그때 갑자기 오덕후가 나타나 판다의 계산이 쓰여진 종이를 구겨 바닥에 내팽게쳤다.
"너는 과학 페티쉬라능. 교과서에 나와있으면 다냐능."
"누가 다래?"
"그러면 내가 알아듣게 설명해보라능."
"너 집합론은 배웠니?"
오덕후는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멍하니 있다가 소리를 빽빽 질러대기 시작했다.
"몰라도 상관없다능. 괴델이 증명했다능. 틀림없이 풀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문제가 있다능!"
"덕후야. 괴델이 증명한 건, 특정한 종류의 퍼즐에서만 그렇다는거야. 모든 퍼즐이 아니고."
"아니야! 나의 괴델은 그렇지 않아!"
오덕후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에 누워 데굴데굴 굴렀다. 판다는 자기가 읽고 있던 책을 오덕후에게 건네주었다.
"덕후야, 이거 논리학 교과서인데 철학과에서 교재로 많이 쓴단다. 이걸 보고 괴델에 대해서 공부해봐."
"필요없다능. 네이버 검색하면 다 나온다능."
"너 맨날 철학이 필요하다며. 그럼 철학책을 읽어야 하지 않겠니."
"싫다능. 나는 나만의 해석을 할거라능!"
"아니 해석을 하려고 해도 뭐가 뭔지는 알아야 해석을 하지."
"그건 너의 한계라능."
"아니 그게 왜 내 한계야."
"너는 전제를 의심하지 않는다능. 너는 과학주의자라능."
"아니, 이건 철학책이라니까. --;;;"
판다는 포기하고 대나무 숲속으로 사라졌다. 김사장은 판다가 가르쳐준 방법의 원리가 궁금해져서 집에 가는 길에 수학과 논리학 교과서를 사서 처음부터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사라지자 오덕후도 "나의 라캉짱은 가와이이하고.."하며 알듯모를듯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기본적 개념이 결여되어 있으면서 알려고도 하지 않고, 철학 교과서를 보라고 해도 읽지 않겠다 하면서 자기는 철학을 옹호한다고 말하면 그건 철학 오타쿠에 지나지 않는다.
쪼가리 : 딱히 끼어들 생각은 없었거늘에 달린 댓글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