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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적 합리성

로버트 노직, 실질적 합리성 (aleph님)
귀납과 정당화에 대한 부연 (aleph님)

별로 관련 있는 얘기는 아니지만 '제한적 합리성'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생각나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본다.

지난 50년간 심리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용어를 꼽자면 "제한된 용량(limited capacity)"는 아마 10위권 안에 꼽힐 것이다. 이 말은 주의, 지각, 기억 등 우리의 모든 정보처리과정에서 글자 그대로 용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용량은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데 예를 들어 작업 기억(working memory)에서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정보의 양은 3~4가지에 불과하다. 종이라는 '보조기억장치'의 발명 덕분에 우리는 장기 기억(long-term memory: 말그대로 정보를 장기간 저장하는 기억. 일상적으로 말하는 '기억'이 이것이다)만 아니라 작업 기억 또한 엄청나게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말 할 것 없이 종이와 연필없이 수학 문제를 푼다고 상상해보라.

우리가 흔히 쓰는 컴퓨터도 용량이 부족하면 버벅거리고, 최소사양에 미달하면 아예 프로그램을 띄우지도 못한다. 우리의 뇌가 일종의 컴퓨터고, 이 컴퓨터의 용량이 무척 제한되어 있다면 당연히 이 컴퓨터에서 돌릴 수 있는 프로그램도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라는 개념이 도출된다. 일반적으로 사회과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행위자'는 그야말로 무제한적 합리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현실적인 행위자들은 2메가비트는 커녕 3~4비트(bit, 여기서는 컴퓨터 용어가 아니라 작업기억에서 다룰 수 있는 개념의 양)에 불과하다. 그러니 현실적 행위자들이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합리성의 범위도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재미있게도 이 '제한적 합리성'을 제안한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은 그야말로 무제한적 합리성을 가진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인물 중에 하나다. 그는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최초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만들어 인지혁명을 주도했으며, 컴퓨터공학과와 심리학과 교수를 겸직하다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그야말로 '엄친아'라고 할 수 있다.

사이먼 이후 제한적 합리성의 개념은 사회과학 전반에 깊고 넓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은 이 개념에서 '제한'에 강조를 두는 편이다. 카네만과 트버스키의 의사결정에 대한 연구나 또는 이에 영향을 받은 행동경제학 연구도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들 자신도 그렇지만 보통 이런 연구를 접한 사람들은 "역시 현실은 시궁창. 인간은 비합리적이야아아~"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소극적 해석'이라면 반대편의 '적극적 해석'도 있다. 카네만과 트버스키를 끈질기게 물어뜯은 기거렌처는 허버트 사이먼이 제한적 합리성을 두고 '양날의 가위'라고 말한 것에 주목한다. 마치 가위가 두 날이 맞물려야 물건을 자를 수 있듯이, 제한적 합리성도 행위자와 환경이 서로 맞물려야 잘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한적'이라는 말은 합리성이 낮은 수준으로 제한되어있다는 게 아니라 특정한 환경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거렌처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도시 인구 추정 실험'이다. 이 실험은 간단하다. 사람들에게 "샌디에고와 샌안토니오 중 어디가 인구가 더 많을까?"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미국 도시들을 비교할 때는 독일 학생들이 더 잘 맞추고, 독일 도시를 비교할 때는 미국 학생들이 더 잘 맞춘다. 기거렌처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답할 때는 머리 속으로 '확률적 심성 모형(probabilistic mental model)'이라는 것을 만드는데, 이 모형은 정보가 너무 적어도 많아도 안되고, 정보들의 중요성이 비슷해도 안된다. 중요한 정보, 덜 중요한 정보, 그보다 덜 중요한 정보가 적당히 있을 때만 이런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학생들은 자기 나라 도시들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알고 있는 반면, 다른 나라 도시들에 대해서는 아주 단편적인 하지만 확률적 심성 모형이 잘 작동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정보들을 알게 된다. 결국 자기 나라 도시보다 남의 나라 도시를 비교할 때 더 잘 맞추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기거렌처의 확률적 심성 모형 이론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지만, 이 점은 건너 뛰고 이 이론의 함의만 이야기해보자. 이 현상은 학생들이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심리적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정보만 전해주는 매스미디어처럼 이 학생들을 둘러싼 환경의 구조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심리적 과정과 환경의 구조가 딱 맞아 떨어질 때만 학생들은 올바른 판단을 한다.

기거렌처의 이런 입장은 무식한 해결책에서 소개했던 브룩스의 입장과 매우 비슷하다. 이 둘 모두 진화생물학의 개념을 심리학과 로봇공학에 도입한 것이라서 그렇다. 우리가 행위자를 관찰할 때도, 로봇을 설계할 때도 환경의 구조를 간과해선 안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점을 간과한다. 많은 사람들이 건설회사라는 '환경'에 적합한 행위자가 정부라는 '환경'에도 적합할 거라고 예단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경험을 했듯이 이 두 환경은 무척 다르기 때문에 그 행위자가 자신의 작동 방식을 바꾸지 않는 이상 두 환경 모두에서 적합할 수는 없다. 이런 어리석음은 유권자들만 저지르는 게 아니다. 학식있는 사람들조차 진화심리학 이론이 무엇을 '정당화'한다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구석기적 환경에서 특정한 행동을 하는 행위자가 현대 도시 환경에서도 반드시 똑같은 행동을 하진 않는다. 행위자도 중요하지만 환경도 중요하고 이 둘의 상호작용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은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이것 역시 제한적 합리성의 한 단편일지도 모르겠다.

by 아이추판다 | 2009/09/01 01:46 | 트랙백 | 덧글(13)

비싸고 예쁘고 알 수 없는 뇌

기거렌처는 뇌영상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농담을 인용한 적이 있다. "연구자들이 뇌영상을 좋아하는 이유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좋아하는 이유와 같다. 비싸고, 예쁘고,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딱히 연구자들만이 아니라도 뇌영상은 확실히 우리를 매혹시킨다. 사람들에게 가상적인 심리학 연구 결과에 대한 글을 읽게 하면서 한 집단은 글에 뇌 영상을 포함시키고 다른 집단은 포함시키지 않으면 뇌 영상이 포함된 글을 읽은 사람들이 연구 결과를 더 잘 믿는다. 아래 그림은 이 연구의 실험참여자들이 뇌를 촬영한 것으로 왼쪽이 뇌 영상이 포함된 경우, 오른쪽이 뇌 영상이 포함되지 않은 경우로 붉게 표시된 부분이 활성화된 영역..

이라는 식으로 뻥을 치는 것이다. 학습법이나 뭐 이런저런 유사심리학으로 사기쳐서 먹고 살려면 유용한 팁이다. 위의 사진은 점자를 읽을 때 시각장애인의 뇌 활성화 패턴이다.

사람들은 그냥 행동을 관찰하는 것보다 뇌를 관찰하는 게 뭔가 더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가 남들이 즐겁거나 화 난 걸 뇌를 관찰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듯이 마음에 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행동에서 출발한다. 뇌의 경우에도 결국엔 행동을 바탕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사람을 행동적으로 조작해 화나게 만든 다음에 뇌를 촬영해서 분노와 관련된 부위를 알아내는 식이다. 아무 것도 없이 덜렁 뇌만 가지고는 알 수 없다.

아예 행동없이 뇌만 가지고 A부터 Z까지 다 할 수도 있긴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C나 Java처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기계어로 바꾸는 과정을 컴파일, 그 역을 디컴파일이라고 하는데 신경 회로를 일종의 디컴파일해서 이 회로가 어떤 종류의 계산을 수행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해 구조로부터 기능을 추론해내는 것인데 여기엔 큰 장벽이 있다.

예전에 어느 발표에서 듣기로 쥐의 뇌에 있는 신경회로 정보를 싹다 추출하면 그 용량 3페타바이트라고 했다. 1페타바이트는 1000테라바이트, 1테라바이트는 1000기가바이트. 즉, 3백만기가바이트다. 요즘 보통 가정용PC의 하드디스크 용량이 300기가바이트 쯤 되니까 PC 1만대 하드 디스크를 꽉채울 용량이고, 100Mbps 랜으로 최대 속도로 전송해도 10년쯤 걸릴 용량이다. 미국판 싸이월드라고 할 수 있는 페이스북에 사진이 100억장 올려져있는데 그 용량이 1페타바이트고, LHC에서 실험 4개를 하면 15페타바이트 정도 데이터가 나온다고 한다.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실험 데이터하고 쥐의 뇌 하나에서 나오는 데이터하고 분량이 비슷하다면 이건 감당하기 어렵다. 뭐 언젠가는 신경망을 스캐닝한 걸 바로 시뮬레이션 돌려서 행동을 예측하는 그런 시대가 오겠지만 당장은 좀 무리.

이런 계산적 장벽은 점점 생물학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고(분자생물학의 경우엔 이렇다고 한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생물학을 배우러 대학에 왔더니 컴퓨터만 배우더라" 뭐 이런 시대도 오지 않을까 싶다. (벌써 왔나?) 원래 기거렌처의 농담이 재밌다고 생각해서 쓰기 시작한 글인데 주제가 뭔지 모르겠다. 그냥 그렇다고.

by 아이추판다 | 2008/12/03 11:38 | 트랙백(2) | 핑백(3) | 덧글(9)

비판자 기거렌처(1) 오타쿠의 몸무게

얼마 전에 있었던 어떤 대화:

나: 그러니까 기거런체거가 그 점에 대해 비판하기를
남: 그 사람 좀 무서워요.
나: 아니 왜?
남: 맨날 비판만 하잖아요.

게르트 기거렌처(Gerd Gigerenzer, 1947~). 독일 막스 플랑크 인간개발연구소 적응적 행동 및 인지 연구센터 센터장. 그의 책이 한국에 처음으로 번역되었다. 심리학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살아있는 심리학의 최고 거장 중에 한 명이다.

기거렌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카네만과 트버스키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카네만과 트버스키는 판단 및 의사결정 분야에 판단 및 의사결정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긴 심리학자다. 이 공로로 카네만은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살아있다면 틀림없이 공동수상 했을 트버스키는 그전에 죽어서 이 상을 받지 못했다. 일설에 따르면 트버스키가 죽은 건 다 기거렌처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기거렌처는 이 둘을 심하게 비판했다.

카네만과 트버스키, 그리고 기거렌처 사이의 관점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 이들의 책 제목이다. 카네만과 트버스키의 주요 논문을 모은 책 제목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단: 발견법과 편향(Judgment under Uncertainty: Heuristics and Biases, 1982, 한국어 번역판 제목에는 '발견법' 대신 '추단법')"이고, 기거렌처의 책 제목 중 하나는 "우리를 똑똑하게 만드는 단순한 발견법(Simple Heuristics that Make Us Smart, 2000)"이다.

이 두 제목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단어 '발견법(heuristic)'이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유레카(eureka)"로 잘 알려져있다시피 '발견'을 뜻한다. 이 말은 원래 문제의 풀이법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뉴웰과 사이먼 이후 풀기 복잡한 문제를 부정확할 수도 있지만 간단하게 푸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크기가 서로 다른 물체를 컨테이너 최대한 많이 집어넣어야 할 때 물체들의 다양한 조합을 모두 검토해서 최적의 조합을 찾는 것이 아니라 큰 물체부터 순서대로 집어넣는 것이 발견법이다.

카네만과 트버스키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사람들은 일반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발견법을 사용해서 판단을 내린다. 이 발견법은 부정확한 면이 있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편향을 겪게 된다. 예컨대 사람들에게 "오타쿠"들의 평균 몸무게를 물어보면 실제보다 더 높게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전형적인 오타쿠의 모습을 머리 속에서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의 몸무게를 대답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뤄진 실험은 "스탠포드 대학 여학생"의 평균 몸무게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 이것을 대표성 발견법(representativeness heuristic)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오타쿠의 전형적 모습


(to be continued)

by 아이추판다 | 2008/11/21 14:49 | 트랙백(1) | 핑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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