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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예언자의 절대 지식

분만실 40시간 체험, 군대보다 더 무서워 (글쓴이의 원문은 여기)

링크한 글을 쓴 사람은 자연분만이 좋다는 이유를 대지 않는다. 단지 "세상이 다 안다"라는 말로 끝이다. 이런 식으로 글쓴이는 제왕절개를 권하는 의사들을 자신만의 '세상'으로부터 간단히 추방해버린다. 골반이 작다든지 아기 머리가 크다든지 하는 의료진의 논거는 모두 불안을 부추겨 사기를 치기 위한 말들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말들이 사기인 것은 자연분만을 하기에 충분할만큼 골반이 큰데도 의료진이 작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그런 이유가 아니다. 거짓말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것은 출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니 무엇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의료진은 무조건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도록 운명지어져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운명의 책, 즉 사회학 교과서에 기록되어 의료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모든 반지를 지배하고 모든 반지를 발견하는 절대반지처럼 글쓴이의 사회학은 모든 지식을 굽어보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 운명은 한결 같이 사기다. 단 하나의 지식. 글쓴이의 사회학만 제외하고. 그런데 이미 글 자체에서도 드러나있듯이 글쓴이 또한 또 하나의 '전문가'이며 또 하나의 무자비한 권력자에 불과하다. 그는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아내에게 자연분만을 강요한다.

글이 클라이막스로 치달으면서 두 개의 지식, 사회학과 의학이 충돌하고 두 전문가, 사회학자와 의사가 갈등한다. 그런데 김빠지게도 결정적 순간에 이 '어둠의 군주'는 지나칠정도로 고분고분하게 물러선다. "네 말은 들을 필요도 없이 거짓"이라고 단죄하던 위풍당당함은 온데간데 없다. 그 이유는 생뚱맞게도 '불안한 심리'와 그것을 이용한 '저들'의 비열한 술수 때문이다.

물론 그 술수가 저 위대한 운명의 책에 이미 기록되어있는 것은 당연하다. 글쓴이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이미 알고 있는 절망적 운명 속으로 빨려들어간 것 뿐이다. 그런데 애초에 그렇게 운명지워져 있다면 그것을 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글쓴이의 사회학은 처음부터 아무 소용도 없었다. 병원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사기당할 것은 운명인 것을.

이쯤되면 어둠의 군주는 사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글쓴이의 사회학은 아내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의사의 사기로부터 아내를 지키지도 못했고, 진통의 고통으로부터 구해주지도 못했다. 대신 글쓴이의 지적 허영심은 충분히 채워줬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먹었다.

마침내 권력에 굴복하더라도 후회는 없다. 패배야말로 빛나는 승리다. 결정적 순간에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은 것은 '절대 지식'인 글쓴이의 사회학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의학 권력의 '교과서적 악랄함'을 보여주는 증거에 불과하다. 따라서 글쓴이의 사회학이 옳았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고로, 글쓴이의 승리다.

나는 '과학의 횡포', '전문가의 오만' 이런 말을 믿지 않는다. 과학이 전횡하는 것처럼 보여도 과학이 한 발 물러가면 운명의 책을 든 예언자들이 몰려올 것을 알기 때문이고, 전문가들이 떠는 거만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도 그 전문가들이 비켜나면 정작 결정적 순간에는 꼬리를 말고 도망갈 '어둠의 군주'들이 기어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예언자 군주들 자신은 단 한 점의 살, 단 한 방울의 피조차 감수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는 모든 피와 살을 요구할 것이다.

그 운명의 책을 펼쳐보면 예언자들이 하는 얘기하고도 전혀 다르다는 게 더 문제겠지만.

by 아이추판다 | 2008/07/30 09:48 | 트랙백(3) | 덧글(6)

구석기 사회를 기준으로

인생은 폼생 폼사 (sprinter)

인간을 포함해서 영장류의 행동 중에 아주 재밌는 게 있는데 힘들여 사냥한 다음에 그걸 남들한테 그냥 나눠준다는 것이다. 물론 혼자 다 먹을 수도 없고 보관할 방법도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사자처럼 그냥 먹고 남기면 남들이 와서 먹으면 되지 굳이 나눠줄 필요는 없다. 여기서 포인트는 나눠주는 놈이 "엄청나게 생색"을 낸다는데 있다.

이 "엄청난 생색"이 곧 "폼생폼사"인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익이 있다. 일단 호혜적 이타성의 원리에 따라 잘 나눠주는 놈은 다른 놈들한테도 잘 얻어먹을 수 있다. 또, 사냥을 잘한다는 것은 높은 지능과 뛰어난 체력에 대한 적응적 지표기 때문에 이성에게 인기를 누리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 선수가 인기있는 거랑 비슷하다.

구석기 사회에서 모을 수 있는 부라고 해봐야 과일이나 고기 조각, 조개껍데기 따위인데 모아봐야 쓸데도 없고 금방 썩는 이런 거 열심히 모으는 것보다 남들한테 좋은 평판 얻고 이성 앞에서 폼 잡고 이런 게 훨씬 이익이다. 이런 사회에서 벗어난지 길게 잡아도 수천에서 수만년 정도 밖에 안되니 그 이후의 사회에 진화적으로 적응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 게다가 폼생폼사는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이익이 된다. 돈만 많은 수전노하고 "키다리 아저씨" 중에 누가 더 인기가 있을까?

p.s. 과시적 소비로서 남성의 페미니즘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다가 좀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미리 첨언을 해두는 데 위에서 한 설명을 "키다리 아저씨"가 주디를 낚으려고 후원한 거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많이 곤란.

by 아이추판다 | 2008/04/29 17:55 | 트랙백 | 덧글(4)

과시적 소비로서 남성의 페미니즘

이탈리아제 명품 양복은 여름 양복도 안감이 붙어있다고 한다. 서민의 눈으로보면 그냥 미친 짓이지만 이것은 적어도 그 옷을 입은 사람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는 여름이라도 항상 에어콘이 펑펑 나오는 곳에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여름에 두꺼운 옷을 입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만큼 몸을 움직일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런 미친 짓에 몇 백 만원을 쏟아부을만큼 돈이 썩어나도록 많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단지 부와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돈을 갖다 버리는 행위를 과시적 소비라고 한다.

과시적 소비는 경제적인 수준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공작의 화려한 무늬는 포식자들의 눈에 잘 띄게 만들어서 생존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해만 된다. 하지만 암컷들은 화려한 수컷을 선호한다. 포식자의 눈에 확 띌만큼 화려한 무늬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생존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제프리 밀러는 "메이팅 마인드"에서 재밌는 주장을 하는데 인간의 두뇌도 공작의 깃털같은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지구상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대단히 낮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환경에 너무나 잘 적응한 나머지 선천적으로 정해진 행동 패턴을 답습하기만해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 기능 중 대부분은 살아가는 데 별 보탬도 안되는데 다른 모든 근육과 기관이 쓰는 에너지를 다 합친 것의 2/3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쓴다. 아무 보탬도 안되는 기관에 과도한 에너지를 투여하는 것. 이것은 과시적 소비의 전형적인 예로 꼽을만 하다.

생리적 특성 때문에 남자는 선천적으로 바람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반만 맞는 말이다. 인간은 성비가 거의 1:1이기 때문에 모든 남자가 바람둥이라면 모든 여자 역시 바람둥이거나 일부의 남자들만이 실제로 수 많은 여자들과 짝짓기에 성공하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짝짓기에 실패해야 한다. 이런 상황 때문에 남자들은 엄청난 경쟁 상황에 놓이게 된다. 침팬지의 경우 인간과 마찬가지로 출생 당시 성비는 1:1이지만 무사히 성년에 이르는 수컷은 30%에 불과하다. 인간의 경우 살인의 70%는 남성이 남성을 죽이는 것이다.

이런 경쟁에 대처하기 위해 인간 남성들은 두 방향의 전략을 발달시켰다. 하나는 경쟁자인 다른 남성들을 향한 것이고 또 하나는 짝짓기 상대인 여성들을 향한 것이다. 가부장제는 후자에 해당하는 전략으로서 자신과 짝짓기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온전히 남자들의 전략인 것만은 아니다. 시어머니의 입장에서도 아들의 번식상의 성공은 곧 자신의 번식상의 성공이기 때문에 며느리를 감시하고 억압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런데 만약 남성들이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에 마땅한 경쟁상대가 없다면 이런 감시와 억압에 굳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어진다. 미국에서 실시된 무작위 혈액형 조사에 따르면 빈곤층의 경우 10%이상의 남자들이 부인이 바람피워 낳은 자식을 자기 자식으로 알고 키우는 반면에 부유층에서는 이런 경우가 2%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부유층 남성은 가부장적인 감시와 억압을 동원할 필요가 적을 뿐더러 오히려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있는 듯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그만큼 강력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할 수 있다.

비슷한 원리가 고학력 남성들에게도 작동한다. 전통적으로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지식인들에게 더 많은 지지를 받아왔는 데, 이것은 그들의 지성과 양심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고학력 남성들은 비슷한 이유로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군가산점 문제는 예비역 남자들과 대부분이 여자인 그 외의 사람들 사이에 이해가 부딪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묘하게도 인터넷에서 키보드 잡고 싸우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남자다. 그렇다고 군가산점에 반대하는 남자들이 꼭 군복무를 안한 것도 아니다. 무리지어 사는 동물들은 집단 내에서 지위가 번식의 성공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같은 성끼리 경쟁을 벌인다. 적어도 인터넷 키보드 배틀에 한정하자면 군가산점 문제도 이런 지위 경쟁의 소재인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든다.

징병제는 제도 그 자체로 몸을 써서 먹고 사는 집단에 불리하다. 징병되는 시기는 육체적으로 가장 활발한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처럼 육체를 극한까지 사용하는 집단에게는 치명적이다. 머리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피해는 가지만 그정도로 치명적이진 않다. 자본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가장 피해가 적다. 게다가 마지막 집단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빠져나갈 구멍까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후자로 갈 수록 징병제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는 데 반대하기가 더 쉽다. 일단 자기가 입은 피해가 더 적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경쟁력을 가진 집단의 피해를 키우는 것이 이익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군가산점에 반대하는 남자는 자신이 징병제로 인한 피해가 적고, 하급직 공무원 시험에서 몇 퍼센트의 가산점 정도는 받지 않아도 충분할만큼 다른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게 된다. 군가산점을 반대하는 논거를 정연히 대면 효과는 백 배.

군가산점에 찬성하는 남자들은 논거가 타당하고 말고를 떠나 '찌질이 마초'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반 친구들이 다 나이키신고 다니는 데  혼자 시장표 신발 신고 와서 아무리 발이 편하다고 주장하면 뭐하나. 게임의 규칙이 과시적 소비라면 군가산점이정당할 수록 그것을 옹호하는 것은 개미지옥에 빠지는 일이다. 부당하면 더 말할 것도 없고.

덧. 다른 분이 알려주신 바에 따르면 여름 양복에 안감을 넣는 건 명품 양복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by 아이추판다 | 2008/02/17 17:47 | 트랙백(6) | 핑백(3) | 덧글(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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