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독 훈련은 필요할까?

요즘 신문에 어느 속독 학원 광고가 종종 실리는데 혹시 이 블로그를 보고 있을 고3학생이나 다른 시험 수험생들을 위해 충고드리자면 일단 인터넷 창부터 닫고 공부나..가 아니고 하여간 속독이라는 게 과연 정말로 효과적인지 알아보자.

읽기에 능숙한 영어 사용자가 보통 분당 250단어 정도 읽는데 속독을 하면 600~700단어 정도 읽는다고 한다. 그런데 읽은 내용을 가지고 시험을 보면 속독한 사람은 대략적인 내용은 파악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틀린다. 안구운동을 측정해보면 600~700개의 단어를 모두 보는 게 아니고 띄엄띄엄 읽는다.

물론 띄엄띄엄 보는 것도 일종의 시험 스킬일 수 있는데 이게 뭐 학원에 돈 갖다 바치면서 배워야할 거냐하면 그렇진 않다. 일단 이런 속독 학원들은 눈 운동부터 시키는데 근육이나 신경 때문에 읽기가 느릴 정도면 병원에 가야되지 말입니다. 눈동자가 글 읽을 때 속도로 그냥 쉬지 않고 움직이면 1초에 500도를 돈다. 능숙한 독자가 1초에 3~4단어 정도 보는 수준인데 보통 눈과 글의 거리면 5도나 될까?

보통 독자에게 분당 600~700단어 속도로 읽도록 시키고 안구운동이나 이해 정도를 측정해보면 속독하는 사람과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 그러니까 속독을 하고 싶으면 그냥 띄엄띄엄 빨리 읽으면 되는 거지 뭐 따로 훈련이 필요한 건 아니다.

평소에 책을 읽지 않아서 글 읽기에 미숙하고 지식이 부족하면 글을 읽어도 이해가 잘 안가고 이해가 안가면 글 읽는 속도가 늦어진다. 글을 빨리 정확하게 읽는 방법은 별다른 게 없고 평소에 많이 읽는 것 밖에 없다. 물론 속독 훈련 하면 글을 자꾸 읽으니까 글 읽는 속도도 빨라지긴 하겠지만 이건 자라면 저절로 없어지는 병에다 무슨 약 꾸준히 먹여서 고치는 거랑 다를 바 없어서 그냥 돈 낭비 밖에 안된다.

by 아이추판다 | 2008/09/04 17:17 | 트랙백(1) | 덧글(14)

키보드 교체: FILCO 마제스터치 리니어

주말에 키보드를 물에 씻었는 데, 충분히 안 말리고 컴퓨터에 꽂았더니 키보드가 미쳤다. F를 누르면 45TBVFR이 한 번에 화면에 찍힌다. S는 열 번 쯤 꾹꾹 눌러줘야 한 번 찍히고.. 당황해서 드라이어로 말렸더니 키가 휘어버렸다. ;ㅁ;

우그러진 한자키와 휘어진 스페이스바..

원래 쓰던 키보드는 한 5년 전 쯤에 산 아론 기계식 키보드인데 잘됐다 싶어서 FILCO 마제스터치 리니어(흑축)을 새로 샀다. 새 키보드의 키감은 쫀득하고 소리는 사각한 것이 손가락이 트램블린 위를 뛰어노는 기분인데 다만 기계식이란 느낌은 좀 부족하다. 다시 5년이 지나면 이 키보드도 물에 살짝 담궈주고 정전용량 무접점 방식으로...ㅎㅎ

by 아이추판다 | 2008/09/03 19:29 | 트랙백(1) | 덧글(6)

뭐 묻은 개: 인문사회계에서 성차별

겨 묻은 개: 이공계에서 성차별

학부생과 교수의 성비를 비교하는 것보다 대학원생이나 강사와 비교해야한다는 분들이 있는데 대학원생이나 강사는 땅에서 솟아난게 아니다. 그리고.. 이 대학의 경우엔 학부생이랑 비교하는 게 더 정확하다. 무슨 말하는 건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테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

그래도 원하는 분들이 있으니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포함시켜서 비교를 해봤다. 인터넷에 2007년 통계도 올라있길래 그걸 사용했다. 큰 차이는 없는데 그 사이에 경영전문대학원이 생겨서 경영대 교수들이 대거 소속이 바뀌는 통에 성비가 42:1에서 19:1로 확 줄었다.


어쨌든 결과를 보면 대부분 단과대학에서 학부에서 석사과정으로 올라갈 때 성비가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연대와 공대도 2.8에서 1.5로, 7.5에서 6.6으로 성비가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석사과정 진학은 여학생들이 남학생보다 더 많이 한다는 얘기다. 다만 원래 학부에 여학생이 적다보니 석사과정에도 여학생이 적다. 물론 다른 학교에서 진학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일단은 다른 학교도 성비는 비슷하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석사과정에서 박사과정으로 올라가면 단대별로 양상이 다르다. 인문대는 성비가 0.5에서 0.7로 살짝 늘어난다. 다시 말해 석사과정은 여학생들이 더 많이 가지만 거기서 다시 박사과정 올라갈 때는 남학생들이 더 많이 간다는 뜻이다. 반대로 사회대의 경우엔 1.1에서 0.8로 더 줄어든다. 즉, 박사과정도 여전히 여학생들이 더 많이 올라가서 학부와 반대로 여학생들이 남학생보다 많게 되었다. 자연대는 인문대와, 공대는 사회대와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우연일지도 모르겠지만 인문대-사회대의 관계와 자연대-공대의 관계가 비슷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다른 단과대학도 비슷한 패턴인데 박사과정에서 성비가 늘어나는 경우에도 학부와 비교하면 여전히 낮다. 미대는 독특하게도 석사, 박사 올라갈 수록 성비가 늘어난다. 또 법대의 경우엔 학부 1.8, 석사 1.7로 석사까지는 성차가 별로 없는데 박사에서 3.2로 훌쩍 뛴다.

학생성비가 줄어들면 학생대비교수성비는 교수성비/학생성비이므로 늘어나게 된다. 미대나 법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단과대학에서 박사성비는 학부생성비보다 낮기 때문에 박사과정대비교수성비는 더 늘어난다. 그 결과 사회대는 학부생대비교수성비는 6.0으로 평균적인 수준이지만 박사과정대비교수성비는 11.6으로 자연대 6.7, 공대 6.6과 비할 바 없이 높아진다. 인문대는 6.8로 학부생대비교수성비와 큰 차이가 없지만 여전히 자연대와 공대보다 높다. 다시 말해 학부생대비교수성비보다 박사과정대비교수성비를 가지고 따지면 인문사회계가 훨씬 문제가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학교는 이 학교 박사출신이 교수가 되는 비율보다 학부나 석사를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온 후 교수가 되는 비율이 높다. 그러니까 박사보다는 석사와 비교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러면 결과는 좀 달라지는 데 석사과정대비교수성비는 인문대 10.5, 사회대 8.3, 자연대 9.8, 공대 6.3이 된다. 공대라고 하면 보통 남성중심적이라고 하는 데 학생대비교수성비만 보면 정작 공대가 가장 덜 차별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위의 자료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학부-석사-대학원이야 시간차이가 별로 안나니까 성비를 직접 비교해도 큰 무리가 없지만 교수들은 심하게는 학생들과 30년 이상 차이가 나니까 성비를 직접 비교할 순 없다. 사회대는 단순히 예전보다 여학생이 많이 들어와서 학생대비교수성비가 커보이는 것 뿐일 수도 있다. 이런 것을 정확히 알려면 교수들의 학번을 조사해서 각 학번별 성비를 가지고 얘기를 해야할텐데 논문 쓰는 것도 아니니 패스. 호기심이 있는 분들은 직접 자료를 찾아 해보시길 바란다.

여담인데 일반 기업에서 직원대비임원성비를 구해보면 얼마나 나올까? 한 100?

by 아이추판다 | 2008/08/28 10:37 | 트랙백 | 덧글(4)

겨 묻은 개: 이공계에서 성차별

다음은 모 대학의 2006학년도 교수와 학생의 성비를 나타낸 표다. 어제 어떤 일 때문에 한 번 만들어봤는데 결과가 재밌다.

학생대비교수성비는 단과대학별로 성차별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학생의 성비가 100%인데 교수의 성비는 200%라면 여교수 비율이 비율이 낮은 건 아니지만 여학생이 교수가 되기가 남학생에 비하면 2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학생의 성비가 1000%인데 교수의 성비가 1000%라면 여교수 비율이 낮긴 하지만 여학생이나 남학생이나 교수가 되는 비율이 비슷하므로 차별이 낮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교수들이 학생이던 시절에는 학생성비가 달랐기 때문에 지금의 학생성비와 직접 비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지금 남학생이 많은 단과대학은 예전에도 남학생이 많았고 지금 여학생이 많은 단과대학은 예전에도 여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단과대학들끼리 비교하는 건 의미가 있다. 물론 어떤 단과대학은 여학생 비율이 빠르게 증가한 반면 어떤 단과대학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수치만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참고자료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표를 보면 재밌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인문대나 사회대는 자연대나 공대에 비하면 교수성비가 낮다. 인문대는 여교수보다 남교수가 5배 많을 뿐이고 사회대도 10배 많다. 자연대는 14배, 공대는 42배나 된다. 그런데 학생성비를 보면 인문대는 거의 1:1이고 사회대도 남학생이 1.5배 많을 뿐이다. 자연대는 2.7배, 공대는 8배나 된다. 교수성비를 학생성비로 나눠보면 인문대와 사회대는 각각 585%, 647%이고 자연대와 공대는 539%, 513%다. 만약 학생성비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여학생이 교수되기는 남학생보다 5배쯤 어렵다는 뜻이 되겠지만, 지금 교수들이 학생이던 시절에는 학생성비가 더 컸으므로 현재 여학생들이 교수되기는 남학생에 비해 5배나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 이공계열이 인문사회계열보다 성차별이 더 심하다고 하고, 그 근거로 대는 것 중에 하나가 교수성비다. 확실히 자연대나 공대에서 여교수가 적은 것은 틀림없는데 학생성비를 고려해보면 인문대나 사회대에 비해 더 심한 것 같지는 않다.

다른 단과대학들을 살펴보면 경영대, 농생대, 미술대, 사범대, 수의대, 약학대, 의과대는 여학생이 교수되기가 훨씬 어렵고 특히 약대가 가장 심하다. 반면 간호대나 생과대는 여학생이 교수되기가 더 쉽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할 점이 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단과대학별로 성비가 변하는 속도는 다르다. 간호대나 생과대의 경우 최근에야 남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여학생이 교수되기가 더 쉬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반대로 경영대는 최근에 여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반대로 여학생이 교수되기가 더 어려워 보일 수도 있다. 이걸 정확히 알려면 시간에 따른 학생성비 변화 추이와 교수성비 변화 추이를 비교해야 할텐데 일단 자료가 없으니 패스.

또 위의 표는 자연대나 공대가 인문대나 사회대보다 여교수가 더 적은 이유가 단지 여학생이 더 적기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에도 제3의 변수가 있을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지간하면 여학생들이 공대를 잘 안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대를 갔다면 남다른 흥미나 재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당연히 교수되기도 좀 쉽겠지만 이건 차별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개인의 자질이 뛰어난 탓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인문사회계열에 비해 이공계는 업적을 평가하거나 실력의 우위를 따지기 쉽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어지간하면 여자를 교수로 뽑지 않지만 경쟁자들에 비해 논문 실적이 워낙 좋아서 어쩔 수 없이 뽑은 것일 수도 있다. 마리 퀴리는 성차별을 심하게 받았지만 어쨌든 노벨상을 두 개나 받은 경우를 생각하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어쨌든 해석의 가능성은 아직까지 열려있지만 저 표만 놓고 본다면 이공계가 인문사회계보다 더 성차별적이 말하기는 어려워보인다.

by 아이추판다 | 2008/08/27 16:46 | 트랙백 | 핑백(1) | 덧글(10)

업데이트 프로이트 :: 모듈

초심리학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의식이 <의식Bw.>이라고 기술되는 특수한 조직의 한 기능이라고주장한다. 의식이 산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의 지각과 정신 기관 내부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쾌와 불쾌의감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각-의식W-Bw>의 조직에 공간 속에서의 한 위치를 할당하는 것이 가능할것이다. 그것은 외부와 내부 사이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외부 세계를 향하고 있고 다른 정신 조직들을 에워싸고 있을것이다.

(중략)

자극에 <대한 보호>는 자극<의 수용>보다 유기적 생명체에 더 중요한 기능이다. 보호적 방패는 그 나름의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으며, 외부 세계에서 작동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위협적 산물에 대항해서 그 보호막 속에서 작동하는 에너지의특수한 변형의 틀을 보존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쏟는다. 그 위협적 산물은 그 변형의 틀을 깨부수려 하고 따라서 그것은 파괴를향해서 움직인다. 자극 <수용>의 주된 목표는 외부 자극의 방향과 성격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외부세계의 작은 표본을 채취해서 그것을 작은 양으로 견본처리하는 것으로 족하다. 고도로 발달된 유기체의 경우 이전 소포의 수용적외피층은 신체 내부의 심층으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물론 그것의 일부가 자극에 대항하는 방패 바로 밑에 있는 표면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것이 감각 기관들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열린책들. 292-297.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프로이트보다 한 세대 전에 헤르만 폰 헬름홀츠(1821~1894)에 의해 시작되었다. 인지과학에 계승된 무의식 개념은 프로이트보다 헬름홀츠 쪽에 더 가깝다.

헤르만 폰 헬름홀츠


잠깐 얘기를 돌려 사람의 눈에 대해 얘기해보자. 우리는 눈이 대단히 정교한 기관이라고 알고 있다. 가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사람의 눈을 근거로 신에 의한 창조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사람의 눈을 신이 창조했다면 신은 변태가 틀림없다. 눈으로 들어온 빛은 망막에 물체의 이미지를 맺는다. 그러면 이 이미지를 망막에서 뇌로 전달하는 신경은 망막 앞쪽에 있어야 할까, 아니면 뒤쪽에 있어야 할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당연히 망막 뒤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디지털 카메라도 그런 식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인간의 신경이 망막 앞에 있다. 이러다보니 신경이 망막을 가려서 상이 맺히는 걸 방해할 뿐만 아니라 어쨌든 뇌로 연결되어야 하니 망막을 뚫고 지나가서 맹점이 생긴다. 신은 변태가 확실하다.

눈이 이렇게 엉터리로 생겨먹었는데도 정작 우리는 그걸 전혀 느끼지 못한다. 망막을 가린 신경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맹점도 느낄 수가 없다. 단순히 느낄 수없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정확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렌즈 앞에 그물을 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물은 커녕 오히려 사진이 더 좋아졌다면 누군가 포샵질을 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헬름홀츠가 내린 결론이었다. 헬름홀츠는 이 '포샵질'을 무의식적 추론(unconscious inference)라고 불렀다. 감각 기관으로부터 들어온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원래의 정보를 추론해서 복원하는 무의식적 과정이 의식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적 추론의 결과만 의식에 떠오르기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적 추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가 쉽지 않다. 이것을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이 착시 현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 추론은 불완전한 정보를 복원해서 완전한 정보로 만들어주지만, 가끔은 더 엉터리 정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추론은 추론일 뿐이기 때문에 항상 맞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래 그림은 유명한 뮐러-라이어 착시다. 붉은 색으로 칠한 표시를 보면 알 수 있자만 세 선분의 길이는 모두 똑같다. 그렇지만 가운데 선분이 위나 아래의 선분보다 더 길어보인다. 분명히 세 선분의 실제 길이도 같고 아마 망막에 맺히는 상도 같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보가 의식에 도달할 때는 가운데 선분보다 긴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분명히 세 선분의 길이가 같다고 알고 있더라도, 이런 의식적 생각은 무의식적 추론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여기서 무의식적 추론의 중요한 성질을 알 수 있다. 무의식적 추론은 그 추론 과정을 의식에게 드러내지도 않을 뿐만아니라 의식의 개입을 받지도 않는다. 의식은 무의식적 추론이 내놓은 결과만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헬름홀츠의 무의식 개념은 현대의 모듈 이론으로 이어진다. 모듈(module)은 컴퓨터과학에서 넘어온 용어인데 커다란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독립적인 작은 부분들을 말한다. 윈도에서 파일을 열거나 저장할 때 뜨는 창의 모양은 어느 프로그램에서나 다 똑같다. 윈도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모듈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모듈 이론은 마음이 여러 개의 모듈로 되어 있다고 본다. 이 모듈을은 헬름홀츠의 무의식적 추론과 마찬가지로 의식이나 다른 모듈이 그 내부에 접근하거나 개입할 수 없다. 각각의 모듈은 시각 정보를 처리한다든지,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다든지, 남이 나한테 사기치는 게 아닌지 판단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고유한 자기 영역이 있다. 마음은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인지적 기능들이 모듈의 형태로 하나씩 덧붙는 식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에 이런 모듈은 선천적인 것이기도 하다.

모듈 이론과 대립하는 입장은 뇌나 마음이 하나의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시스템이라는 전일론(holism)인데 역사적으로 축적된 증거는 대체로 모듈 이론의 손을 들어준다. 전일론은 이제 이 모듈들을 통제하는 중앙처리장치가 있다는 정도의 주장으로 많이 후퇴했다.

이제 프로이트와 헬름홀츠의 주장을 비교해보자. 프로이트는 감각 기관이 자극의 일부만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헬름홀츠에게이것은 감각 기관의 한계인 반면 프로이트에게는 이것이 감각 기관의 목적이다. 왜냐하면 자극의 수용보다 자극에 대한 보호가 더중요한 문제기 때문이다. 또 헬름홀츠는 감각 기관과 의식 사이에 있는 무의식에 관심을 둔 반면, 프로이트는 의식의 뒤편에 있는무의식에 관심을 두었다.

지성사에 프로이트가 준 가장 큰 충격을 꼽는다면 무의식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와 내부의 경계선에 위치한 의식의 역할은 남겨 두었다. 그러나 이미 헬름홀츠에게서 의식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선은 무의식에게 자리를 비워주었고 모듈 이론에 와서는 마음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런데 모듈 이론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좀 더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난다. (계속)

by 아이추판다 | 2008/08/26 16:30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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