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24 19:51

'우생학'의 딜레마 잡담

얼마 전에 MBC가 알통이 굵으면 보수 어쩌고 하는 보도를 해서 잠깐 화제가 되었다. MBC가 보도했던 논문에 대해 자세한 것은 Bayesian님의 글을 참고들하시고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보고 싶다. 인터넷을 좀 찾아보면 이 보도에 대해서 '우생학'이라고 비판하는 예를 여럿 찾아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나치'까지 연결짓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런 식의 비판 패턴은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는 한데, 좀 곤란한 지점이 있다.

진화심리학에서 가정하고 있는 것들은 의외로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종으로서 인간에게는 다른 종과 구별될 정도로 독특하면서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도 비슷비슷하게 나타나는 어떤 공통적인 행동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보편성'은 몇 가지 기원으로 소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같은 문화를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든지, 아니면 교류를 통해서 같은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는 쉽게 변하기 때문에 몇 세대를 지나거나 또는 여러 지역으로 퍼지다보면 쉽게 변해버린다. 이렇게 문화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보편성의 범위는 좁다. 그렇다면 인간의 보편성, 특히 넓은 범위에서 나타나는 보편성이란 어느 정도는 생물학적 특징일 수 밖에 없고, 당연히 유전자에, 그리고 진화에 기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부정하려면 진화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진화나 유전자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어떤 학문이나 주의, 주장도 인간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순간 진화심리학과 동일한 전제를 필요하게 된다. 이를테면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을 인용하는 인문학자라면 진화심리학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을 것 같지만, '20세기 중반 프랑스'라는 특수한 문화적 맥락에서 생겨난 이론이 '21세기 초반 한국'이라는 역시 특수한 문화적 맥락에서도 통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그는 진화심리학자들과 정확히 똑같은 발판 위에 서있는 것이다.

사실 좀 더 재미있는 부분은 이런 외국의 '이론'들을 소개하는 인문학자들 중에 특히 외국에 유학이라도 다녀온 사람들은 한국이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외국의 문화가 얼마나 훌륭한지 찬양하는 습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교 자체는 사실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훌륭한 문화에서 통용되는 이론'을 '구질구질한 한국'에 적용할 수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성의 토대는 생물학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밖에 없는바 진화심리학이 그 토대에 있어 우생학적이라고 한다면, 이런 인문학자들도 역시 우생학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인문학이라는 범주 자체도 결국 인간의 보편성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학문 범주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인간에 어떤 공통성이 없다면 동양사와 서양사가 '역사'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여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다는 기준으로만 따지면 우리집 뒷동산 개미집의 역사와 한국사의 거리가 훨씬 더 가깝지 않겠는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철학은 철학이 아니라 공룡의 화석을 연구하는 고생물학에 넣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이 범주들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면 결국 이 모든 학문들은 존재 자체를 주장하는 것이 우생학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점들을 보건데 우리는 '진화심리학은 우생학이며, 나치다'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순간 '모든 인문학은 우생학이며, 나치다'라는 주장에 역시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다음에 계속?)

덧글

  • gvw 2013/02/25 05:10 #

    "만약 이 범주들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면 결국 이 모든 학문들은 존재 자체를 주장하는 것이 우생학이나 다름없다."

    아니죠. 플라톤 철학은 우생학만큼 눈애 확 띄는 역사적 업적(?)을 남긴 적은 없으니까요. 사람들이 뭔가를 우생학이라고 깔 때는 우생학이 인간의 보편성을 전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생학이 나치에 의해 악용되었던 명백한 전례가 있고, 그래서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든요. 저 새끼 우생학이다! 는 저 새끼 이명박이다! 급의 주홍글씨인 셈이죠. 그런 점에서 저 새끼 나치다! 랑 완전히 동의어입니다. 물론 플라톤 철학도 100명에게 말하면 80명은 나치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주억일 정도로 악용되었던 전례가 있다면 우생학 급의 레테르가 되었겠죠. 근데 안 그랬잖아요.

    그래서 '진화심리학은 우생학이다' 라는 말은 진화심리학이 우생학처럼 인간의 보편성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진화심리학에서 우생학자들이 발표하던 것 같은 연구 결과가 나오네. 그런데 우생학은 나치가 잘 써먹었던 전례가 있으니 이거 나쁜 거 아니냐?' 는 의미입니다. 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진화심리학은 우생학이다'라는 말이 '인문학은 우생학이다'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진화심리학을 우생학이라고 부르는 건 학문적 대전제에 이르기까지 깊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연구 결과가 비슷한 것 같다'는 이유가 다니까요. 그래서 '인문학은 우생학이다'라고 하면 바로 이해가 잘 안 가죠.

    인간의 보편성에 대해, 그러니까 어떤 제한된 집단에서의, 그것도 딱히 과학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이루어진 관찰의 결과로 인류 전체의 경향을 설명하는 데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진화심리학은 정신분석학이다', '인문학도 정신분석학이다'라고 하는 편이 이해가 빠르겠지요 ^^ 물론 인문학이 정신분석학을 선행하지만 정신분석학은 그런 쪽으로는 우생학 급으로 유명하니까요!

    사족입니다만 진화심리학은 가끔 딱히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고 보기 어렵거나 검증 방식이 엄밀하지 못한 (나쁘게 말해 끼워 맞춘 것 같은) 결과를 연구 성과랍시고 내놓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물론 그거야 진화심리학만 그런 건 아니지만 계속 그러다 보면 정신분석학 소리를 들어도 싸게 되겠죠. 정신분석학도 잘 먹고 잘 사는 판에 그런 학문이 몇 개 더 있어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만 (심리테스트 같아서 가끔 재밌기도 하고), 그걸 현실에, 특히 정치(=우생학)나 의학(=정신분석학)에 적용하려고 하는 순간 망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인문학도 마찬가지인데 이 쪽은 현실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방향의 현실 참여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고 해야 할까요..
  • 산마로 2013/02/25 12:08 # 삭제

    우생학을 이용하고 받아들였던 건 나치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진보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를 들어 스웨덴 사회민주당도 나치와 거의 비슷한 일을 한 바 있고요. 우생학과 나치의 연결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조작된 것이라면 일반인들의 인식은 오해에 불과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오해가 있으면 고쳐야지 인정해서는 안되겠죠.
  • 산마로 2013/02/25 12:10 # 삭제

    또한 인문학이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방향으로 현실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도 보기 나름입니다. 정치적으로 큰 실책을 저지른 유명 인문학자도 많고 지금도 그런 인문학자와 추종자들이 많죠. 도리어 현실참여의 적극성은 인문학 쪽에서 더한 것처럼 보일 때도 많습니다.
  • 노노 2013/02/25 17:42 #

    진화심리학에서 우생학자들이 발표하던 것 같은 연구 결과가 나오네. <- 이제 바로 인문돌이들의 대표적인 오해가 아닐런지.
  • 이덕하 2013/02/25 08:38 #

    1. “그렇다면 인간의 보편성, 특히 넓은 범위에서 나타나는 보편성이란 어느 정도는 생물학적 특징일 수 밖에 없고, 당연히 유전자에, 그리고 진화에 기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 인류 보편적인 현상이라면 아무래도 후천론보다는 선천론(본성론)으로 기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불의 사용”처럼 사실상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나더라도 후천론이 유력해 보일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2. 도덕 철학의 경우에는 과학의 교권이 아니라 도덕 철학의 교권(굴드의 표현으로는 종교의 교권)에 속합니다. 따라서 사실 규명 또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입장의 문제입니다.

    칸트처럼 보편적 진리에 바탕을 두고 도덕 철학을 펼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것이 착각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3. 사실 우생학은 진화 심리학보다는 행동 유전학과 연결이 많이 되지요. 진화 심리학은 차이보다는 보편성에 초점을 두는 학문이고 행동 유전학에서 차이에 집중하니까요(남녀 차이의 경우 두 학문 모두 중시하기는 하지만요).


    4. (gvw 님의 의견에 대해) 예비 연구(예컨대 학부생 대상 설문 조사)를 발표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정신분석계에서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더 엄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는 반면 진화 심리학계에서는 예비 연구를 본격적인 연구로 발전시시키고 있으며 가나자와 사토시 같은 한심한 진화 심리학자를 왕따시킬 줄도 안다는 점에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설픈 진화 심리학 입문서: 『처음 읽는 진화 심리학』 비판 --- 머리말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3fZ/235

  • d 2013/02/25 09:15 # 삭제

    일체의 당위가 보편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의미로도 들리네요. 보편적인 당위로 추구될만하다는 이야기가 반드시 생물학적인 보편성을 전제해야만 가능한 것일까요. 이 부분에서는 조금 의문도 드네요.
  • d 2013/02/25 09:17 # 삭제

    법률이나 인간사의 여러 규범 등이 보편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주장될 때, 반드시 생물학적인 보편성을 꼭 전제하지는 않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 kanie 2013/02/25 10:09 # 삭제

    이덕하님 //
    "다른 종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인류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은 어떤 것이든 생물학적인 특징을 빼놓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로 드신 불의 사용은 인간 외에 다른 어떤 종에서도 보편적으로 관찰된 바가 없죠. 그렇다면 왜 다른 동물은 불을 사용할 수 없고 인간만이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고 질문해야겠죠. 비록 인간에게 불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생물학적 장치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불의 사용은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이라고 봐야 합니다.
  • 호연 2013/02/25 10:24 # 삭제

    kanie 님, 불의 사용을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으로 본다면, 휴대전화의 사용도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으로 볼 수 있나요? 현 인류의 1/3 정도가 사용하는 것으로 아는데 생물학적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기준 비율이 혹시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 하나 인간을 홀로 자연에 방치 했을 때 (생존하기 어렵겠지만) 불의 사용이 이루어지는지도 궁금하네요. 이럴 때 불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생물학적 특징으로 볼 수 없는건지요?
  • 이덕하 2013/02/25 10:31 #

    kanie /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생물학적인 것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뻔한 진리죠.

    문제는 어떤 생각과 행동이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를 따질 수 있으며 선천적일 때에는 부산물이냐 적응이냐를 따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진화 심리학은 선천적인 것 중에서 특히 적응에 초점을 맞춥니다.
  • 퍼렁머리 2013/02/25 10:58 #

    과학은 당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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