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05 18:03

대학평준화 단상

대학평준화(서울대 폐지, 국공립대 네트워크 포함)는 별로 작동할 가망이 없는 정책이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눠 간단히 적어보면

1. 경쟁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학서열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대학서열을 없애면 어차피 다른 것으로 경쟁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꼭 대학서열보다 더 합리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2. 쟁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기 마련이라 학부모와 학생들도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하게 되어 있다. 고교평준화의 경우에도 8학군의 형성,  비평준화 지역으로 전학, 특목고 입시와 같은 '대응'들이 존재했다. 대학평준화에도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할 수 있는데 가장 유망한 것은 미국대학으로 학부 유학을 가는 것이다.

3. 대학입시는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경쟁'이다. 그런데 대학평준화로 입시가 없어질 때 이를 대신해서 생겨날 수 있는 경쟁들에는 정부가 개입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강남권 학생들이 명문대를 많이 가는 경향은 해소는 안되도 약간이나마 제어가 가능하지만, 돈 있는 집 자식은 미국 대학으로 유학가고 없는 집 자식은 평준화된 국내 대학에 진학하는 구도가 되어버리면 손 쓸 수단이 거의 없다.

4. 대학평준화론자들이 해결하려는 문제 중에 하나는 기초학문의 위기인데, 이건 대학평준화를 하면 오히려 심화되게 되어 있다. 이미 학부제 시행을 통해 경험한 바 있지만 인기전공과 비인기전공이 하나의 모집단위에 묶여있으면 비인기전공은 그냥 망한다. 길게 얘기 할 것도 없이 서울대 인문대에서 서울대 레떼르를 떼네면 지원자가 몇 명이나 될 것 같은가. 

5. 평준화는 단순히 입시를 철폐하는 것만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 고교평준화의 경우에는 추첨입학제에 더해서 전국 모든 고교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교육과정과 이 교육과정을 관철하기 위한 교사 양성, 연수, 배치 프로그램이 있다. 물론 이것이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는 둘째치고, 대학의 경우에는 이런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국공립대 교수들을 순환 발령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이공계는 그렇게 하면 랩을 운영할 수가 없다.

6. 나는 기본적으로 평준화 vs. 비평준화라는 프레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본다. 교육의 단위는 학교가 아닌 학생 개인이 되어야 한다. 뭐 구체적인 이야기는 써봐야 아무도 안 읽을테니 패스. 고교평준화에 대해 쓴 글로 갈음하자: 학교 평준화와 비평준화를 넘어서

p.s. 예전에 국공립대 네트워크 이야기 나올 때 쓰려고 했는데 요즘 통 블로그에 글 쓸 여유가 없다보니 완전 뒷북이다. 뭐 언젠가는 또 나올 이슈니까...

덧글

  • 일화 2012/10/05 18:51 #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십니다. 정부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죠.
  • Kalt 2012/10/05 19:55 # 삭제

    1,2,3,4,5와 6사이에 뭔가 비약이 느껴지지만,
    1~5는 충분히 일리있는 얘기네요.
  • 서주 2012/10/05 21:30 #

    아이추판다님 글 오랜만이네요. 통 새글이 올라오지 않아서 궁금했었답니다.
    .
    대학평준화라는 발상 자체가 놀랍더라구요; 교육의 단위는 학교가 아니라 학생 개인..이란 말씀에도 동감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참, 팁포레스트도 애용 중이에요. 고맙습니다^^
  • merrykomdole 2012/10/06 01:13 #

    국공립대 통합하면 연대가 1등먹겠어요. 프랑스의 대학평준화 정책이 대표적인 실패작아닌가요.
    전 대학은 평등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wizmith 2012/10/06 03:43 # 삭제

    헐. 한국에서 대학평준화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사실 이론적으로도 뻔히 잘 안먹힐거라는 결론이 나와있는데 왜 이런 무리수를 두는 걸까나...여간 재미있는 주제인데요.
  • BigTrain 2012/10/06 07:46 #

    上有政策 下有對策, 정책으로 세상을 맘대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 트레버매덕스 2012/10/06 10:12 #

    저는 대학의 평등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왜 필요한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거 한다고 나라가
    망하는것도 아니고
  • 零丁洋 2012/10/06 10:44 #

    대학평준화는 대입시와 관련한 소모적인 경쟁을 줄여보자는 의도에서 나온거죠. 경쟁이 어느정도 현실인 것은 분명하나 소모적인 경쟁은 과잉이고 낭비죠. 문제는 대학평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 또한 우리 사회의 일부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취업과 관련한 좁은 출구가 경쟁의 가장 큰 원인이죠. 출구가 다양하고 자식이 부모의 직업을 자연스럽게 계승하는 안정된 사회구조 속에서는 경쟁은 그다지 심하지 않으나 우리 같이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경쟁 완화 교육 정책이란 단지 경쟁을 지체시킬 뿐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죠.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증상이 나타나 곳에서 찾는데 증상은 단지 다른 곳에서 생긴 문제에서 유발된 것이죠.
  • _`_ 2012/10/09 22:45 # 삭제

    이번에 나온 대학평준화정책에서 제일 중요한 건, 서울대에 학부 없애고 대학원만 남긴다는 이야기였지요. 물론 그 정책을 말씀하신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오신 정치인은 부산대 출신.
  • 달리나음 2012/10/14 15:37 # 삭제

    대학은 고등 교육 기관이 중심이지 연구 이야기는 부차적이어야 옳죠. 연구실 때문에 이렇게 해야한다는 얘기는 말이 안되는 거고요. 게다가 랩에서 있는 석박사 위주의 이야기는 대부분의 돈을 내는 학부생에게 기만이죠. 연구는 결국 더 많은 국책연구소를 지어야 할 일이지 학교가 책임질 일이 아니죠.

    또 대학이 완충 지역도 아닌데 부자집 애들이 유학을 가는지 다른 경쟁이 나타나는 것인지 살펴 볼 이유도 없죠.

    그리고 간판을 위해서 서울대 인문대에 가는 것은 인문학이나 학생에게나 모두에게 슬픈 이야기죠. 이건 이유도 안되는 거라고 봅니다.
  • 아세 2012/10/18 00:01 # 삭제

    고등교육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연구가 따라가야 합니다. 연구하지 않는 교수에게서는 배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초중고등학교 교육과 대학 교육의 차이입니다. 대학에서 연구는 절대 부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대학의 교수들에게 연구를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이추판다 2012/10/20 16:43 #

    학부교육으로 한정 하면 대학의 연구기능이 '부차적'이기는 한데 부차적이라고 해서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에서 연구는 연구 자체의 의의도 있지만 교수 '충원'과 '재교육'의 의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연구를 전혀 못 할 대학이라면 공부 열심히 한 박사들이 교수로 오기를 꺼리고, 교수가 되도 공부를 안 해서 단기적으로는 모를까 장기적으로는 학부 수업할 내용도 못 따라가게 됩니다.

    '완충 지역' 이야기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간판을 위해 진학이라도 하는 것'이 '간판이 없어 아무도 진학 안해서 망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학부제 실시했다가 비인기학과에서 학생들을 별도로 모집하거나 비인기학과만 묶어서 학부를 만들게 된게 그런 이유인데요.
  • 달리나음 2012/10/20 11:37 # 삭제

    학부생, 석사과정을 대상으로 했을 때 연구하는 교수가 줄 수 있는 이점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일부 박사과정을 위해 기형적인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미국에서 건너온 매우 잘못된 관행입니다.
  • 내용을 봐야 2012/10/20 12:45 # 삭제

    예를 들어 고등학교에서 2*2 행렬을 배웁니다. 2*2 행렬만(!) 아는 교사는 2*2 이상의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2*2 이상의 더 큰 세상이 펼쳐져있고 그러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더 큰 세상을 꿈꾸게하는 것이 교사가 해야할 일 중에 하나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는 2*2 행렬 그 안에서만 머뭅니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에 오면 1/(1+x^2)의 부정적분을 배우고, 이 적분은 tan 함수의 역함수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 적분 뒤에 숨겨져 있는 17세기 이후 19세기 말까지 흘러내려오는 거대한 수학의 역사를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으려면 교수가 이 분야의 역사 대해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려면 이 분야에 정통한 연구하는 교수여야 합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1/(1+x^2)의 부정적분을 어떻게 계산하는지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고, 학생들에게 더 거대한 수학의 세상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게끔 만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더 넓은 세상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일텐데, 연구하지 않는 교수는 그저 교과서만 읽어댈 뿐이고, 교과서만 읽을 거면 교수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마 교과서 안에서만이라면 대학원생이 더 잘 가르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과서를 뛰어넘는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면 연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연구하지 않는 교수가 1/(1+x^2)의 적분 속에 숨어 있는 현대수학의 넓은 세상을 어찌 알겠으며 학생들에게 그 넓은 세상을 어찌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소위 명문대라는 것이 생기고, 연구 잘하는 교수들이 모이고, 그곳에 학생들이 가려고 애쓰는 이유 중에 하나는 대가, 혹은 연구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이룬 교수들에게서 더 넓은 비전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아무에게서나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기회를 연구 잘하는 교수들에게서 얻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대학교육에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병행되지 않으면 학원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고, 대학을 다닐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인터넷 강의 만들어 교과서나 달달 파게 하면 그만일 것을요.
  • VB 2012/10/21 21:30 # 삭제

    한가지 덧붙이면 대학평준화랑 상관없이 지금도 부자집 자녀는 미국학부로 유학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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