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06 21:48

전차 문제와 도덕적 직관 인지과학

다섯명을 살리기 위해 한명을 죽이면 도덕적인가? (냥뇸님)
살인이 법적으로 정당화되려면 (Picket님)

마이클 샌댈이 소개하고 있는 '전차 문제(trolley problem)'는 원래 윤리학에서 제시된 것으로 "5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을 희생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문제는 윤리적 문제들이 구체적인 상황으로 제시되었을 때 추상적인 원칙들을 일관되게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5명을 향해 돌진하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차의 핸들을 꺾어 1명을 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난간 위에서 서있는 뚱뚱한 남자를 밀어 기차를 막아 5명을 살리는 건 주저한다.

이 문제는 추상적으로는 똑같은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사람들의 답변이 엇갈린다는 점에서 인지과학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윤리학은 전차 문제를 통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규범적으로 답변하고자 한다면, 인지과학은 "사람들이 정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기술적으로 대답하려는 것이다.

전차 문제에 대한 인지과학적 답변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존 미카일의 보편 도덕 문법(universal moral grammar:UMG) 이론을 소개해보자. 미카일은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이력을 가진 사람인데 코넬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중간에 MIT에서 인지과학을 공부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존 롤즈의 윤리학과 촘스키의 언어학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그 후, 로스쿨에 들어가서 지금은 조지타운 법대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 전차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는 모둔 학문을 다 공부한 셈이다. 그의 UMG 이론에도 이러한 이력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촘스키 언어학에서 '보편문법(universal grammar)'의 개념을 차용하여 도덕판단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을 전부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전차 문제에 대해 왜 사람들의 결론이 달라지는지만 UMG이론을 통해 설명해보도록 하자. UMG이론에서는 마치 언어가 이해되기 위해 음운론, 통사론, 의미론, 화용론 등 다양한 층위의 처리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도덕적 판단을 요구하는 상황도 이런 처리를 거쳐야 한다고 본다.

미카일은 샌댈과 비슷한 방식으로 전차 문제의 내용을 조금씩 바꾸어 사람들의 판단을 관찰함으로써 이런 처리과정을 이해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원래의 브레이크가 고장난 전차의 경우가 제시될 때는 94%의 사람들이 핸들을 꺾는 쪽, 다시 말해 5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을 희생하는 것에 찬성하지만 1명을 난간에서 밀어 5명을 살리는 경우에는 오직 10%만 찬성한다. 이렇게 내용을 조금 조금 바꿔나가면 찬성과 반대의 비율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은 전차 문제의 6가지 버전에 대해 사람들의 찬반 비율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면 각 시나리오의 내용은 어떻게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의 결정이 이렇게 달라질까? 미카일은 각 시나리오의 내용이 수단(means), 목표(ends) 및 부수효과(side effects)로 분석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같은 행동이라도 수단에 포함되느냐, 아니면 부수효과에 포함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래의 전차 문제의 경우 5명을 살리는 것이 목표다. 핸들을 꺾는 것은 그 수단이다. 핸들을 꺾는 순간 5명을 살리는 목표는 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1명을 치여 죽이는 것은 모두 부수효과가 된다. 핸들을 꺾는 것 자체는 누가 봐도 도덕적으로 문제 없는 행동이며, 사람을 살리는 것도 도덕적이다.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부분은 모두 부수 효과에 몰려있다. 아래 그림은 이 시나리오에서 각 사건의 발생을 이러한 관점에서 도식화한 것이다.


난간 위의 뚱뚱한 남자를 밀어 떨어트리는 경우는 그렇지 않다. 뚱뚱한 남자를 난간에서 미는 것도 폭행, 땅바닥에 떨어트리는 것도 폭행, 기차에 부딪히게 하는 것도 폭행이다. 세 가지 폭행이 일어나야 5명을 살리는 목적이 달성된다. 오로지 뚱뚱한 남자가 최종적으로 죽는 것만이 부수효과가 된다. 역시 아래 그래프도 이를 도식화한 것이다.

찬반이 거의 50:50으로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는 전차의 진행 방향을 바꿔봐야 잠깐 옆 레일로 넘어갔다가 다시 원래 레일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결국 5명을 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옆 레일에는 뚱뚱한 남자가 서있어서 그 남자를 치면 전차를 멈출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난간에서 밀어떨어트리는 것보다 나쁜 수단의 수가 줄어든다. 난간에서 밀고 땅에 떨어트리는 과정 없이 바로 처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번째 경우와 달리 남자를 치는 것이 5명을 살리는 목적의 부수효과가 아닌 수단이 된다.
요컨대 똑같이 좋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나쁜 수단이 덜 쓰이고, 나쁜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게 부수 효과면 사람들은 좀 더 받아들일만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전 등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자를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부르는 데, 그 바탕에는 이런 심리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UMG 이론이 설명하려는 것은 사람들의 도덕적 직관이다. 직관(intuition)은 대부분 암묵적(implicit)인 정보처리과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그렇다고 생각할 뿐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또, 직관에 반하는 설명을 들어도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도덕적 직관을 설명하는 이론은 UMG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고 상당히 논란이 많은 분야이지만, 어쨌거나 도덕적 직관과 윤리학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한다는데는 큰 이견이 없다. 당연하게도 윤리학은 윤리적 문제에 대한 외현적 추론(explicit reasoning)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역시 외현적 추론의 산물인 학문들에서도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결론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른 경우에도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곤란한 문제를 안겨준다.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사람들에게 옳은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정치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민주당의 정치전략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요컨대, 민주당의 지향은 옳지만 그것을 대중에게 전달할 때는 좀 더 직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라는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윤리학자라면 학파에 관계없이 모두 동의할만한 옳은 이야기지만 도저히 사람들의 직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전달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면 그럴때는 도대체 어째야 할까? 물 같은 걸 끼얹나?

참고문헌

Mikhail, J. (2007). Universal moral grammar: Theory, evidence, and the future.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11(4), 143-152.


덧글

  • 소년H 2010/11/06 22:19 #

    걍 철인이 나타나야죠 (...)

    막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저렇게 분석하는 것이 역시 학문이로군요.
  • 라임에이드 2010/11/06 23:30 # 삭제

    다만 이 연구는 윤리학이기보다는 인지과학이라는 문제가; '저렇게 분석'은 과학에는 해당되지만 인문학에는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ㅎㅎ
  • 라임에이드 2010/11/06 23:33 # 삭제

    대답하고 나니 얼마 전 있었던 댓글 광풍이 떠올라 현기증이 나네요 -_-; 과학만으로는 '잘 분석했는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한다는거야'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고 인문학은 인간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실드를 쳐봅니다.
  • 액시움 2010/11/07 12:19 #

    미네르바의 올빼미에서도 드러나듯이 인문학도 사회를 실증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그쳐야 하는지, 규범적으로 당위를 이끌어내야 하는지 논란이 많죠.
  • 라임에이드 2010/11/06 23:29 # 삭제

    윤리학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옳은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학파가 하나 쯤은 있을 것 같네요. 오히려 '옳지 않은 이야기를 직관에는 부합하게' 전달하는 예를 찾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ㅎㅎ

    한편, 사회 제도도 인간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른바 인권이라는 것이 '수단' 부분이고, 다른 이의 인권을 (법으로 규정된 범위 외에)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공리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옳겠지요. 인권의 범위와 침해할 수 있는 법 규정을 정의하는 것이 50:50의 균형점을 찾는 과정이겠고요.
  • 산마로 2010/11/08 00:11 # 삭제

    직관주의란 학파가 있는데, 생각하시는 것과는 좀 다를 겁니다. 대부분의 윤리학자들은 어떤 윤리학적 입장도 내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직관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님이 생각하시는 것에 가까운 윤리학설은 상황적 윤리학이란 게 있는데, 윤리학계에서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으며, 제가 생각하기에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윤리학이란 게 있어야 할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행동이란 일관되게 행동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니까요. 기분 좋을 때는 사람들에게 뭔가 베풀고 나쁠 때는 사람들을 해친다면 그건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직관인 동시에 윤리학의 성립 기반이지요.
  • 라임에이드 2010/11/08 14:30 # 삭제

    그러면 혹시 '직관에는 벗어나지만 이게 윤리다'라고 말하는 학파도 있나요? 법가 정도가 떠오르긴 하는데 서양 쪽으로요.
  • 산마로 2010/11/08 21:00 # 삭제

    일부러 반직관적인 도덕을 택하는 학파는 없습니다만, 원칙에 일관되기 위해서 반직관적인 결론까지 수용하는 학자는 공리주의 진영이든, 칸트주의 진영이든 다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윤리학자는 직관적인 도덕과 도덕 원칙의 일관된 적용을 조화시키기 위해 머리를 싸맵니다.
  • 라임에이드 2010/11/09 00:49 # 삭제

    윤리학자들이 도덕적 직관에 대한 과학 연구 결과를 잘 활용했으면 좋겠네요.
  • 지젝이라면.. 2010/11/06 23:43 # 삭제

    불가능한 뉴에이지 꿈들 가운데 하나는 정확히 인간을 자신 바깥의 실체적 뿌리에 대한 여하한 필요도 없이 영적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부유하는 영적 동물로 전환하는 것이다. 우디 알렌이 미아 패로우Mia Farrow와 스캔들을 일으키며 헤어진 뒤에 연속적으로 언론 앞에 공적으로 나타났을 때 그는 그의 영화에 나오는 신경증적이고 불안정한 남성 캐릭터와 똑같이 ‘실제 삶’에서 행동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는 자신을 영화 속에 놓았다’고, 그의 영화의 주된 남성 캐릭터가 반쯤 은폐된 자화상인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하나? 아니다. 이끌어낼 결론은 정반대다. 실제 삶에서 우디 알렌은 그가 영화에서 세공한 어떤 원형과 동일화하고 모방했다. 다시 말해서 예술에서 가장 순수하게 표현되는 상징적 패턴들을 모방하는 것이 다름아닌 ‘실제 삶’이다. 그렇다면 라캉이 주체의 탈중심화로써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 탈중심화된 주체와 칸트적인 초월적 주체의 연계를 지각하는 일은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 둘을 하나로 묶는 핵심적 특징은 그것들 모두가 텅 비어 있으며 그 어떤 실체적 내용도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가장 순수한 지점에서의 코기토가 지니고 있는 역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나 자신에 대한 순수한 사유 속에서 나는 존재 그 자체이다[ich bin das Wesen selbst]. 하지만 이 존재의 그 어떤 부분도 그로써 나의 사유를 위해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와 사유의 교차점으로서의 코기토의 이 유일무이한 지점에서 나는 사유와 존재 모두를 잃는다. 사유는 일체의 모든 내용이 상실되므로 그러한 것이며, 존재는 일체의 한정적-객관적 존재가 순수한 사유 속에서 증발해버리므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라캉에게 이 공백은 프로이트적인 욕망의 주체이다.


    알렌카 주판치치의 책은 근대적 주체성의 이와 같은 단언의 예기치 않은 윤리적 결과들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것은 윤리 본연과 선의 영역 사이의 근본적 분리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라캉은 공리주의자나 표준적인 기독교적 윤리에 대항하여 칸트의 편에 있다. 윤리를 쾌락들이나 이득들의 어떤 계산에 근거하게 하거나(장기적으로 볼 때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에는 보답이 있다. 그리고 습성의 힘을 통해서 이 공리주의적 결정은 ‘제2의 천성’으로 화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이제 배후에 놓인 쾌락들의 계산을 깨닫지 못한 채 자연발생적 방식으로 도덕적으로 행동한다), 혹은 우리가 신 그 자신과 거래하는 교환을 포함하도록 이 계산을 확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은(도덕적인 것에는 보답이 있다. 비록 이승에서는 그것 때문에 고통을 겪을 수 있겠지만 사후에 그것에 대해 적절하게 보상을 받을 것이니까 말이다) 거짓된 것이다. 이미 프로이트에게도 그렇지만 라캉에게도 인간 주체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덜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다. 우리는 도덕적 행위를, 비록 일종의 미래의 보상을 염두에 두면서 어떤 공리주의적 계산 때문에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더라도, 의무를 위해서 이행하는 것이다. 존 엘스터는, 합리적 선택 이론의 분석적 문제틀에서 출발해서, 동일한 ‘알려지지 않은 잔여 사실’에 도달했다.



    사람들의 동기는 자기-이익에 의해 그리고 그들이 종속되어 있는 규범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규범들은 부분적으로 자기-이익에 의해 형성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종 그들에게 호의적인 규범들을 고수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규범들은, 적어도 이 특수한 메커니즘을 통해서는, 자기-이익으로 전적으로 환원가능하지는 않다. 알려지지 않은 잔여는, 적어도 당분간은, 가차 없는 사실이다. (Jon Elster, The Cement of Society: A Study of Social Order, New York an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p. 150.)


    요컨대 공리주의적 원은---윤리적 규범들에 대한 나의 복종이 자기중심적 계산에만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류 전체의 안녕에 기여할 것이라는 자각에 의해 초래되는 만족에도 근거하고 있는, 가장 세련된 것이라고 해도---결코 사각형이 될 수 없다. 언제나 하나의 x를, ‘알려지지 않은 잔여’를---물론 그것은 욕망의 대상-원인인 라캉적 대상 a이다---보태야만 한다.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라캉에게 윤리는 궁극적으로 욕망의 윤리다. 즉 칸트적 도덕법칙은 욕망의 명령이다. 다시 말해서 칸트적 기획의 내속적 근본화를 통해 라캉이 성취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순수 욕망 비판’이다. 칸트에게는 (그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경험적 대상과 이 대상이 주체에게 생성하는 쾌락 사이에 그 어떤 선험적 연계도 없으므로) 우리의 욕망 능력이 전적으로 ‘정념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라캉은 욕망이 비-정념적이고 선험적인 대상-원인을 실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욕망의 순수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대상은 라캉이 대상 a라 부르는 것이다. 가장 자기중심적으로 계산된 호의의 교환이라도 그로써 설명될 수 없는 최초의 조치에, 어떤 정초적인 선사하기giving의 제스처에, 미래의 이익이라는 것을 통해 설명될 수 없는 (데리다식 표현으로) 원초적 선물gift의 제스처에 의존해야만 한다.


    이 핵심적 돌파의 추가적 결과는 본연의 윤리적 행위가 자아-이상(공적 선의 법)뿐만 아니라 그것의 외설적 보충물인 초자아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캉에게 초자아는 도덕적 작인이 아닌데, 왜냐하면 초자아가 주체에게 부과하는 죄는 정확히 주체가 욕망의 따라야 할 ‘자신의 의무를 타협했다’는 틀림없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정치에서---아마도 예상치 못했을---사례를 들어보자. 자아-이상과 초자아로의 분열은 구 유고슬라비아의 자율-관리 사회주의가 갖는 근본적 역설에서 식별될 수 있다. 공식 이데올로기는 인민에게 자율-관리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것을, ‘소외된’ 당과 국가 조직들 외부에서 자신들의 삶의 조건들의 주인이 될 것을 항상 권고했다. 공식 매체들은 인민의 무관심이나 사생활로의 도피 등을 개탄했다. 하지만 체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건, 즉 인민의 이익에 대한 진정으로 자율-관리적인 표명과 조직화였다. 그리하여 일련의 불문不文 ‘표지들’ 일체는 공식적 권고를 너무 문자 그대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공식 이데올로기에 대한 냉소적 태도야말로 체제가 실제로 원하는 것이며 체제 자체의 이데올로기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체제의 신민들에 의해 현실화된다면 이는 체제에 대한 최대의 재앙이 될 것이라는---명령을 행간에서 전달했다. 그리고 다른 층위에서 본다면 식민지인들에게 그들의 ‘개화된’ 억압자들처럼 되라고 촉구한 고전적인 제국주의-식민주의적 권고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러한 명령은 식민지인들은 불가사의하고도 환원불가능하게 ‘다르다’고 하는---그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현명한’ 인정을 통해 내부로부터 침식되지 않았는가? 공식적 이데올로기적 자세를 침식하는 이 불문의 초자아 명령은 자신의 특수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악명높은 차이에 대한 권리와는 대조적으로---‘피억압자의 근본적 권리’로서 같음에 대한 권리를 어떤 의미에서 주장해야 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한다. 즉 구 유고슬라비아 자율-관리에서처럼, 식민주의 억압자들 또한 그 자신의 공식적 이데올로기적 요청의 실현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한다.


    그래서 어떻게 우리는 선과 그것의 외설적 보충물의 이 사악한 뒤얽힘을 깨고 나갈 것인가? 보스니아 전쟁을 다룬 최초의 대규모 할리우드 작품인 <사라예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Sarajevo---이 영화는 실패작이었다(그리고 우연히도 알렌카 주판치치는 이 영화를 극도로 싫어했다!)---의 마지막 장면을 상기해보자. 최소한의 정념만으로 촬영된 이 장면에서 망가진 보스니아 어머니는 사랑하는 딸을 포기한다. 그녀는 딸에 대한 완전한 양육권을 딸의 입양을 원하는 영국 저널리스트에게 양도하는 서류에 서명한다. 모성적 사랑의 최고 행위는 여기서 정확히 모성적 관계를 포기하는---전쟁으로 찢긴 보스니아에서보다는 안락한 영국의 환경에서 자신의 딸이 훨씬 더 잘 살아갈 것임을 시인하는---브레히트적 제스처와 동일시된다. 딸이 영국 정원에서 다른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찍은 비디오를 보면서 그녀는 딸이 영국에서 행복하다는 것을 즉시 이해한다. 마지막 전화 대화에서 딸이 처음에 심지어 보스니아어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척할 때 어머니는 이를테면 메시지를 받는다. . . . 이 장면은 서구의 휴머니즘적 접근의 윤리적 애매성을 폭로하는 비판적 논평으로도 읽혀야 한다. 그 장면은 단지 전쟁으로 찢긴 나라에서 한 보스니아 아이를 구하길 원하는, 세르비아 테러리스트과 싸울뿐 아니라 아이들을 피난시키는 일을 항복이자 배반이라고 (즉 세르비아인들 대신에 인종 청소 일을 하는 것이라고) 보는 보스니아 국가 관료들과도 싸우는, 한 선량한 영국 저널리스트에 관한 단순한 내러티브에 다른 뒤틀림을 제공한다. 그 마지막 뒤틀림과 더불어 영화는 그 지점까지의 영화 내용---보스니아 전쟁 지옥에서 한 사람(한 아이)을 구함으로써 자신의 윤리적 의무를 다하는 저널리스트에 관한 휴머니즘적 이야기---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 된다. 어떤 면에서, 아이들을 피난시키는 그러한 행위는 항복이라고 주장하는 보스니아 관리가 옳았다. 그러한 휴머니즘적 행위들은 보스니아인들에게 후손을 박탈함으로써 단지 상처에 모욕을 가할 뿐이다. . . . 따라서 저널리스트와 어머니의 마지막 대면에서 저널리스트에 맞서 윤리적 제스처를 성취하는 것은 바로 어머니다. 저널리스트의 매우 휴머니즘적이고도 배려적인 행동은 궁극적으로 비윤리적인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왜 칸트를 위해 싸울 가치가 있는가 中..
  • 2010/11/07 13:44 # 삭제

    어이없는 댓글이네
  • 지젝이라면.. 2010/11/07 20:44 # 삭제

    어이없는 댓글이라.. 글쎄요? 전 아이추판다님이 어느정도 인문학과 관련되어 있는 글을 올렸다고 판단하고, 여기에 슬라보예 지젝식의 윤리학을 대입해서 올린거 뿐이죠. 댓글을 몇개 달았는데 제가 쓴, 근데 그 댓글들이 지워져서 이런 글로 대치한거 뿐..

    위 글을 왜 본문과 연결지었냐하면, 공리주의적 윤리와 보편주의 윤리(칸트), 그리고 지젝식의 윤리가 나뉘는 부분이 재밌는 논점을 낼거 같아서 올린 겁니다. 위 본문에서 5명의 목숨을 위해 1명을 희생시킨다는 공리주의적 윤리는 칸트와 대립되고 있고, 더구나 만약 그 1명의 뚱뚱한 남자라는 소수가 친족이거나, 애인이거나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요. 칸트식으로 해석하면 정념적 대상이 될 테니까요. 사실 진정한 윤리학적 문제라면 5명과 1명이라는 계산적 윤리에서 벗어나, 그 한 명이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이라면이라고 물었을 겁니다.

    여하튼 전 본문과 관련있는 재밌는 글이라 생각해 올렸답니다.

    저건 알렌카 주판치치의 책 "실재의 윤리"에 지젝이 쓴 서문이고, 실재의 윤리는 칸트와 라캉에 관한 비교 연구로는 가장 탁월한 책으로 꼽힙니다^^


  • young026 2010/11/07 23:25 #

    이 정도 길이의 글이라면 트랙백을 이용하는 게 더 나을 텐데요.
    그리고 이 글보다는 첫번째에 링크된 원글에 연결하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이 글은 인지과학에 대한 글이고, 윤리학에 대한 글은 처음 링크의 글이니까요.
  • 액시움 2010/11/08 14:22 #

    지젝 인용해놓고 좋아라 할 시간에 이 댓글이 전체 본문 및 댓글란과 어떤 시각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나 좀 생각해보시죠. -_-;;
  • aefgih 2010/11/10 14:28 # 삭제

    뜬금없는 헛소리를 맥락과도 동떨어지게 사용하니 라캉스럽기 그지없네요. 라캉스럽다는게 어떤건지 잘 보여주시니 다행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라캉이니 잘 보고 판단해주세요.
  • 액시움 2010/11/07 12:28 #

    윤리학의 질문에 인지과학의 관점으로 접근해보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군요. 하기야 윤리학이나 형법학이나 인지과학이나 모두 사람을 다루고 있으니, 이런 문제에 대해 각 학문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만요. 샌델의 정의론이 뭔가 확실한 결론을 내려주기보다는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화두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네요.
  • 漁夫 2010/11/07 15:20 #

    진화심리학적 사고방식으로 도덕에 접근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과제가 많습니다.

    전 샌델의 책을 잽싸게 엄벙덤벙 읽었는데 그가 생각하는 도덕의 발생 이유가 뭔지 제가 본 범위에서 나오지 않아서 좀 짜증이 나려 하더라고요. 하하.
  • 노말시티 2010/11/08 10:43 #

    결국 사람들이 갖는 도덕적인 직관은 당장 취하는 행동에 집중되어 있다고 봐도 될 것 같네요. 미래의 일까지 예측하여 피해를 계산하는 건 아무래도 인간적이지 않다고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단지 최초의 선택이 5명을 살리는 것에 가깝냐 1명을 죽이는 것에 가깝냐에 따라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지는 거겠죠.
  • 냥뇸 2010/11/08 12:41 #

    질문을 따라가면서 결과를 설명하기 어려웠던 이유를 이렇게 명쾌하게 해석해주시다니!
    약간은 산뜻해진 기분으로, 참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룰루랄라♪
  • ontologos 2010/11/08 13:01 #

    도덕적 직관과 윤리학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하는게 아니라, 전차문제를 말한 윤리학자들이 추상적인 규준에만 집착해서 구체성을 망각했기 때문이죠. 가령 열차와 뚱뚱한남자 문제를 말했을때 샌댈은 이 두 사례가 윤리학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동일하지 않죠. 소개해주신 이론에서처럼 수단과 부수적 효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니까요. 윤리학자는 이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한명 죽일거냐 다섯명죽일거냐라는 상위문제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저런 우를 범하는 것 같군요. 윤리학적 고려를 할 때 애초에 개별 사례의 특수한 성질들-수단이냐 부수적효과냐 하는 등-을 고려해야 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전차문제에서 다른 심리학적 설명을 할 것 없이 윤리학적 설명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 라임에이드 2010/11/08 14:29 # 삭제

    아마 샌델이 하고 싶었던 것은 결과가 같아도 과정이 다르면 서로 다른 윤리적 상황이라는 점을 학생들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을 겁니다.
  • 아이추판다 2010/11/08 17:05 #

    말씀하신 것과 같은 주장을 하는 윤리학자도 있을 법 합니다. 그런데 UMG이론에서 수단/부수효과의 구분은 시간 순서에 달린 것이거든요. 수단으로든 부수효과로든 5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이 죽는 건 필연적인데 그 구분이 과연 윤리적으로 의미가 있느냐, 이런 건 별개로 논의 되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 necker3 2010/11/08 20:25 #

    지금 UMG 논문을 잠시 읽어 봤는데 좀 pseudo-science의 느낌이 스믈스믈 들어서 궁금한것 좀 질문드리고 싶어요. 여기서 우선 여러가지 도덕적 질문을 만든 한 후에 인터뷰를 통해 permissible에 대한 응답률은 얻고, 그 후에 모델을 만드는 것 아닌가요? 사실 그렇게 모델을 만든것 까진 좋은데 이것 자체로는 이 모델이 정당하다는 근거가 전혀 될 수 없을 것 같고요. 모델의 정당성을 평가 받으려면 아직 permissible에 대한 인터뷰를 하지 않은 새로운 도덕 질문들에 대하여 모델을 적용시켜서, 결과를 "미리" 예측 한 후, 결과와 예측이 얼마나 같냐를 비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또 한가지가 그래도 UG에서 영감을 얻은 모델인데 한 언어, 문화관에서만 실험을 했다는게 이 모델을 저 약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동일한 실험을 다른 나라에서 한다면 분명 다른 결과를 얻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아 그리고 좋은글 항상 감사드립니다ㅋ 블로그 재밌게 보고 있네요
  • 아이추판다 2010/11/08 21:26 #

    여러 문화권에서 이뤄진 비교 실험 같은 것은 있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논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UMG 이론은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 외에도 상당히 방대한 주장을 포함하죠. 그런 주장들 중에는 솔직히 그냥 UG에 끼워맞춘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부분도 많아서 그런 점은 의구심이 듭니다. Doupoux, E. & Jacob, P. (2007). Universal moral grammar: A critical appraisal. TiCS, 11(9), 373-378. 을 보시면 이런 점들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 2010/11/11 13:5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아이추판다 2010/11/11 15:08 #

    블로그를 보니 Tenenbaum과 그의 제자들의 연구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네요. ^^ reading/writing으로 구분하는 건 좀 이상한 것 같고요, 어쨌거나 물어보신 것에 비슷한 논문이 있긴 합니다. Griffiths et al. (2007). Google and the mind: Predicting fluency of PageRank. Psychological Science, 8, 1069-1076. 이건 '글을 읽을 때'는 아니고 '특정한 단어를 보았을 때'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의 순위가 Google의 PageRank 알고리듬으로 가장 잘 예상된다는 논문입니다. LDA와 reading의 연관성에 대해선 Kemp와 Tenenbaum이 Psychological Review에 쓴 논문을 보시면 됩니다.
  • necker3 2010/11/11 15:51 #

    으앗 감사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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