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01 01:46

제한적 합리성 인지과학

로버트 노직, 실질적 합리성 (aleph님)
귀납과 정당화에 대한 부연 (aleph님)

별로 관련 있는 얘기는 아니지만 '제한적 합리성'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생각나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본다.

지난 50년간 심리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용어를 꼽자면 "제한된 용량(limited capacity)"는 아마 10위권 안에 꼽힐 것이다. 이 말은 주의, 지각, 기억 등 우리의 모든 정보처리과정에서 글자 그대로 용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용량은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데 예를 들어 작업 기억(working memory)에서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정보의 양은 3~4가지에 불과하다. 종이라는 '보조기억장치'의 발명 덕분에 우리는 장기 기억(long-term memory: 말그대로 정보를 장기간 저장하는 기억. 일상적으로 말하는 '기억'이 이것이다)만 아니라 작업 기억 또한 엄청나게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말 할 것 없이 종이와 연필없이 수학 문제를 푼다고 상상해보라.

우리가 흔히 쓰는 컴퓨터도 용량이 부족하면 버벅거리고, 최소사양에 미달하면 아예 프로그램을 띄우지도 못한다. 우리의 뇌가 일종의 컴퓨터고, 이 컴퓨터의 용량이 무척 제한되어 있다면 당연히 이 컴퓨터에서 돌릴 수 있는 프로그램도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라는 개념이 도출된다. 일반적으로 사회과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행위자'는 그야말로 무제한적 합리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현실적인 행위자들은 2메가비트는 커녕 3~4비트(bit, 여기서는 컴퓨터 용어가 아니라 작업기억에서 다룰 수 있는 개념의 양)에 불과하다. 그러니 현실적 행위자들이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합리성의 범위도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재미있게도 이 '제한적 합리성'을 제안한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은 그야말로 무제한적 합리성을 가진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인물 중에 하나다. 그는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최초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만들어 인지혁명을 주도했으며, 컴퓨터공학과와 심리학과 교수를 겸직하다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그야말로 '엄친아'라고 할 수 있다.

사이먼 이후 제한적 합리성의 개념은 사회과학 전반에 깊고 넓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은 이 개념에서 '제한'에 강조를 두는 편이다. 카네만과 트버스키의 의사결정에 대한 연구나 또는 이에 영향을 받은 행동경제학 연구도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들 자신도 그렇지만 보통 이런 연구를 접한 사람들은 "역시 현실은 시궁창. 인간은 비합리적이야아아~"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소극적 해석'이라면 반대편의 '적극적 해석'도 있다. 카네만과 트버스키를 끈질기게 물어뜯은 기거렌처는 허버트 사이먼이 제한적 합리성을 두고 '양날의 가위'라고 말한 것에 주목한다. 마치 가위가 두 날이 맞물려야 물건을 자를 수 있듯이, 제한적 합리성도 행위자와 환경이 서로 맞물려야 잘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한적'이라는 말은 합리성이 낮은 수준으로 제한되어있다는 게 아니라 특정한 환경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거렌처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도시 인구 추정 실험'이다. 이 실험은 간단하다. 사람들에게 "샌디에고와 샌안토니오 중 어디가 인구가 더 많을까?"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미국 도시들을 비교할 때는 독일 학생들이 더 잘 맞추고, 독일 도시를 비교할 때는 미국 학생들이 더 잘 맞춘다. 기거렌처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답할 때는 머리 속으로 '확률적 심성 모형(probabilistic mental model)'이라는 것을 만드는데, 이 모형은 정보가 너무 적어도 많아도 안되고, 정보들의 중요성이 비슷해도 안된다. 중요한 정보, 덜 중요한 정보, 그보다 덜 중요한 정보가 적당히 있을 때만 이런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학생들은 자기 나라 도시들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알고 있는 반면, 다른 나라 도시들에 대해서는 아주 단편적인 하지만 확률적 심성 모형이 잘 작동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정보들을 알게 된다. 결국 자기 나라 도시보다 남의 나라 도시를 비교할 때 더 잘 맞추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기거렌처의 확률적 심성 모형 이론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지만, 이 점은 건너 뛰고 이 이론의 함의만 이야기해보자. 이 현상은 학생들이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심리적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정보만 전해주는 매스미디어처럼 이 학생들을 둘러싼 환경의 구조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심리적 과정과 환경의 구조가 딱 맞아 떨어질 때만 학생들은 올바른 판단을 한다.

기거렌처의 이런 입장은 무식한 해결책에서 소개했던 브룩스의 입장과 매우 비슷하다. 이 둘 모두 진화생물학의 개념을 심리학과 로봇공학에 도입한 것이라서 그렇다. 우리가 행위자를 관찰할 때도, 로봇을 설계할 때도 환경의 구조를 간과해선 안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점을 간과한다. 많은 사람들이 건설회사라는 '환경'에 적합한 행위자가 정부라는 '환경'에도 적합할 거라고 예단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경험을 했듯이 이 두 환경은 무척 다르기 때문에 그 행위자가 자신의 작동 방식을 바꾸지 않는 이상 두 환경 모두에서 적합할 수는 없다. 이런 어리석음은 유권자들만 저지르는 게 아니다. 학식있는 사람들조차 진화심리학 이론이 무엇을 '정당화'한다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구석기적 환경에서 특정한 행동을 하는 행위자가 현대 도시 환경에서도 반드시 똑같은 행동을 하진 않는다. 행위자도 중요하지만 환경도 중요하고 이 둘의 상호작용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은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이것 역시 제한적 합리성의 한 단편일지도 모르겠다.

핑백

  • Null Model :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을 모르나이다 2010-10-29 13:00:30 #

    ... 만을 품는 상황이란 거의 있을 법하지 않다. 그런 불만을 상상한다는 것부터가 그의 심리학에 대한 심각한 무지를 또 한 번 보여준다. 그러나 사이먼의 제한적 합리성 개념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 정도는 이미 예전에 써놓은 게 있으니 라캉 따위는 그만 좀 떠들고 제대로된 심리학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바란다. ... more

덧글

  • sonnet 2009/09/01 02:15 #

    60년대에 행동이론을 정치학에 가져와서 cybernetic한 조직의 의사결정론을 도입한 john steinbrunner도 비슷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cybernetic한 의사결정은 그 서보메커니즘이 상정한 환경을 벗어나지 않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식이었죠.
  • 아이추판다 2009/09/01 22:41 #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죠.
  • 漁夫 2009/09/01 08:50 #

    같은 석기시대 사람이라도(어차피 현재는 다 '석기시대인'이지만) 행동을 일으키는 전제 조건이 다르면 행동이 달라지는데, 이 점에서 오해가 끊이지 않습니다.
  • 아이추판다 2009/09/01 22:43 #

    그것도 제한적 합리성인 거죠ㅎ
  • aleph 2009/09/01 09:01 # 삭제

    허버트 사이먼의 논문 중에 물리학의 공리화에 대한 것도 있다는. 엄친아 정도로는 저런 포스가 불가능. 제 선배와 친구가 (서로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인데도) 허버트 사이먼에 대해서 똑같이 "레전드 오브 더 레전드"라는 표현을 쓰는 걸 보고 신기해한 적이 있지요. 선배는 경제학과, 친구는 철학과.
  • 아이추판다 2009/09/01 22:43 #

    사이먼 가라사대..
  • dhunter 2009/09/01 10:14 # 삭제

    이번 글은 상당히 어렵네요... @_@;
  • 아이추판다 2009/09/01 22:44 #

    배경 설명이 좀 부족했나요;;
  • 야식인증 2009/09/01 20:41 # 삭제

    아주 유익하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아이추판다 2009/09/01 22:44 #

    감사합니다.
  • 후유소요 2009/09/02 01:19 #

    행위자와 환경의 구조에 따른 상호작용. 간단한 한 줄이지만 정말 많은 걸 포괄하고 있네요.

    얼마 전에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책을 읽어서 그런지 글을 다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본성과 양육 논쟁이었어요.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우리 애가 이러냐'는 질문은 구석기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화두...-.-;;
  • 아이추판다 2009/09/02 02:20 #

    맞아요. 본성과 양육 논쟁이 대표적인 떡밥이죠.
  • 111 2009/09/03 17:34 # 삭제

    "많은 사람들이 건설회사라는 '환경'에 적합한 행위자가 정부라는 '환경'에도 적합할 거라고 예단했다." 푸하하하~ 이것 참 상당히 지적인 정치 풍자로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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