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14 23:31

파리의 경우 인지과학

동물의 인지능력은 환경 속에서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다. 환경이 공간적이니까 동물도 공간을 경험할 거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한 관점이다. 하나의 문제를 푸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동물의 경우에는 가급적 단순한 방법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아래는 데이비드 마의 유작 "Vision"에서 파리의 시각 시스템을 예로 시각의 목적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시각의 목적

표상의 유용함은 그것이 사용되는 목적에 적합한 정도에 달려있다. 비둘기는 비행을 날고 먹이를 찾기 위해 시각을 이용한다. 여러 종류의 깡총거미(jumping spider)는 잠재적 먹이와 잠재적 짝을 구별하기 위해 시각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 그 한 종은 V자 모양으로 배열된 두 개의 대각선 형태의 특이한 망막이 있다. 이 거미들은 자기 앞에 있는 검은 물체의 등에서 붉은 V자 무늬를 탐지하면 짝이라고 판단하다. 아니면 먹이다. 개구리는 앞서 보았듯이 망막으로 벌레를 탐지한다. 그리고 토끼의 망막은 매 형태의 물체를 탐지하는 매 탐지기(hawk detector)를 비롯해 다양한 특수 장치들로 가득차 있다. 반면, 인간의 시각은 훨씬 더 일반적이지만, 그 역시 다양한 특수목적 기제들을 포함한다. 이런 기제에는 시각장 안의 예상치 못한 움직임으로 눈을 향하게 하거나, 눈을 깜빡이거나, 머리 쪽으로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물체를 피하는 것 등이 있다.

요컨대, 서로 다른 동물의 시각 시스템은 서로 크게 달라서 시각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내가 지지해온 표상(representation)과 처리(processing)라는 형태의 정식화(formulation)는 이들 동물 모두에게 적합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일반적 논점은 시각이 서로 다른 동물에서 서로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시각을 가진 모든 동물은 서로 다른 표상을 갖는다는 것이다. 각각의 동물은 그들 자신의 목적에 맞는 하나 이상의 표상을 사용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원시적이지만 대단히 효율적인 시각 시스템의 한 예를 살펴보도록 하자. 튀빙겐의 베르너 라이하르트(Werner Reichardt) 그룹은 집파리(housefly)의 시각 비행제어 시스템을 14년 동안 꾸준히 연구했다. 그리고 토마소 포기오(Thomas Poggio)와 유명한 공동연구로 이 문제를 푸는데 많은 성과를 거뒀다. 거칠게 말해서, 파리의 시각 장치는 약 다섯 개의 독립적이고 기능이 고정된 매우 빠르게 반응하는 시스템들로 비행을 제어한다. 시각자극에서 돌림힘(torque) 변화까 지걸리는 시간은 21밀리초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이런 시스템 중에 하나가 착륙 시스템(landing system)이다. 만약 표면이 근처에 나타나서 시각장이 충분히 빨리 '폭발(explode)'하면 파리는 자동적으로 그 중심에 착륙한다. 그 중심이 파리의 위쪽에 있으면, 파리는 자동으로 뒤집어 착륙한다. 발이 닿으면, 날개의 동력을 끊는다. 반대로 이륙할 때 파리는 점프해서 발에 촉감이 사라지면 날개의 동력을 복구한다. 그리고 이 벌레는 다시 난다.

(중략)

특히, 파리가 주변 세계에 대한 표면(surface)의 개념 같은 명시적 표상(explicit representation)을 가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신 파리는 약간의 방아쇠(trigger)와 몇몇 파리 중심적 조절변수(fly-centered parameter)만을 가진다.

인간의 시각이 파리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도 특정한 저수준의 과제를 위해 파리와 다르지 않은 하위 시스템을 포함한다. 그럼에도, 비록 단순한 시스템이지만 포기오와 라이하르트가 보였듯이 정보처리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연구는 파리의 시각 제어 시스템을 미분방정식으로 정확히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반이 되는 신경망의 최소로 가능한 복잡성에 대한 직접적 정보를 이 방정식을 볼테라 급수 전개하여 표현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Marr, D. (1982). Vision: A computational investigation into the human representation and processing of visual information. New York: W. H. Freeman and Company. p. 34.

진화는 누적적으로 이뤄진다. 이것은 기존의 시스템을 개량하는 방향으로도 이뤄지지만, 기존의 시스템에 새로운 시스템을 덧붙이는 방식으로도 이뤄진다. 전체 인지 시스템은 모듈(module)이라고 부르는 하위 시스템의 집합체다. 마가 동물들이 '하나 이상의 표상'을 가진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경우에는 중앙처리장치와 이에 종속된 모듈들로 인지 시스템이 이뤄져있다고 한다. 모듈이라는 용어 자체가 컴퓨터 공학에서 나온 것인데, 우리가 보통 쓰는 컴퓨터를 보면 랜카드, 그래픽카드 같은 모듈들이 CPU를 보조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게 이 관점의 요체다. 이에 반대하여 중앙처리장치는 없고 다만 여러 개의 모듈들이 상호작용할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를 '대량 모듈 가설(massive module hypothesis)'라고 한다.

위의 인용문을 간단히 요약하면, 파리의 시각적 비행제어는 다섯 개 모듈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각각의 모듈은 매우 간단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특정한 패턴의 감각 신호가 모듈에 입력되면, 각각의 모듈은 이에 대응하는 행동 패턴을 출력한다. 파리의 전체적인 움직임은 다섯 개 모듈 각각이 출력하는 행동 패턴들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로봇 청소기는 원래 적어도 방의 구조와 자신의 위치에 대한 표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방이 어떻게 생겼고, 내가 그 중에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청소 계획도 세우고 다음 이동 위치도 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기술은 좀 어렵기 때문에 청소기 가격이 비싸진다. 그래서 로봇청소기를 파리의 시각 비행제어 시스템처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대량 모듈 가설의 인공지능 버전이다. 이런 종류의 로봇 청소기는 방의 구조나 자기 위치에 대한 인식 능력이 없는 대신 앞부분에 일종의 스위치가 달려있다. 그래서 무조건 전진하다가 벽이나 장애물에 부딪히면 스위치가 눌리고, 회전 모터가 잠시 작동하면서 방향을 바꾼다. 그 다음엔 다시 전진, 충돌하면 다시 방향 전환, 다시 직진, 그렇게 전원이 나갈 때까지 반복을 한다. 만약 방이 적절하게 생겼고, 전원이 충분하면 로봇 청소기는 결국 모든 방바닥을 쓸고 다니게 된다. 이런 움직임은 직진 '모듈'과 방향 전환 '모듈'이 산출한 행동 패턴의 결과물이다. 두 모듈은 직접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하나의 목적을 완수한다.

파리는 표면을 모르고, 청소기는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파리와 로봇 청소기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자신의 움직임을 제어하지만, 공간에 대한 명시적 표상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미묘한 정보'를 이용해 공간을 인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스위치를 올리면 불이 들어오는 형광등도 '미묘한 정보'를 이용해 공간적 인식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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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의 경우</a>(아이추판다님) 포스팅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극도로 단순하게 보이는 파리의 시각과 사람의 시각을 어떻게 동등한 관점에서 다루냐는 반론은 일시 접어 두기로 하고, 제가 말하려는 요점은 아이추판다님이 말씀하시는 이 관점에 있습니다; 진화는 누적적으로 이뤄진다. 이것은 기존의 시스템을 개량하는 방향으로도 이뤄지지만, 기존의 시스템에 새로운 시스템을 덧붙이는 방식으로도 이뤄진다. 전체 인지 시스템은 모듈(mo ... more

덧글

  • 후유소요 2009/08/14 23:48 #

    오컴의 면도날은 인지구조에서도 통하는 룰인 것 같아요. (너무 복잡하게 프로그램을 짜서 수렁에 빠졌다가, 선생님께서 던져주신 한 줄 코드에서 느낀 쪼렙 석사생의 소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아이추판다 2009/08/15 00:27 #

    아, 오컴의 면도날은 정말 중요하죠.
  • 액시움 2009/08/14 23:57 #

    로봇공학에서 생물의 특징을 차용했다고 하면 보통 지렁이 움직임이나 거미 다리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파리 같은 하등생물(……)의 인지 구조도 차용했다는 게 신기하군요.
  • 아이추판다 2009/08/15 00:28 #

    제가 좀 애매하게 썼는데, 파리를 직접적으로 차용한 건 아니고요, 대량 모듈 가설을 차용한 거죠.
  • sapie 2009/08/15 00:38 # 삭제

    인지과학 너무 재미있어요.
  • 아이추판다 2009/08/15 16:01 #

    재밌죠.
  • 지양 2009/08/15 02:58 # 삭제

    대량 모듈 가설을 보니 테오 얀센의 키네틱 조각들이 생각납니다. :)
  • 아이추판다 2009/08/15 16:01 #

    그러고보니 좀 비슷하군요.
  • 라임에이드 2009/08/15 04:16 # 삭제

    그런데 공간을 인식하지 못하는 싸구려 로봇 청소기는 전기가 다떨어지면 어떻게 되나요? 어떤 청소기들 처럼 자동으로 충전기로 가지는 못하겠죠?
  • 카미트리아 2009/08/15 09:09 #

    충전기에서 시그널을 보내고 그 시그널을 따라가면 되지 않을까요???
    점차 시그널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식으로요..
    이동 메커니즘은 동일하게 하고요....
  • 아이추판다 2009/08/15 16:12 #

    회사별로 가격대별로 다 다릅니다만, 좀 많이 싸구려는 그냥 멈추고요, 조금 더 나은 건 빛센서가 있어서 침대 밑에 있을 경우엔 밝은 곳으로 기어나와 멈춥니다. --; 카미트리아님 말씀대로 충전기에서 시그널이 나와서 그 쪽으로 가는 건 좀 양반이죠. ㅋ
  • 산마로 2009/08/16 00:22 # 삭제

    제가 쓴 글을 무시하거나 왜곡, 또는 이해를 못하고 있군요. 실망스럽습니다.
    '우리가 시각은 없고 박쥐같은 반향정위를 사용해서 공간정보를 얻는 동물이라고 쳐 봅시다.'
    왜 '우리'라고 했는지 그 전의 댓글 중 아래 부분을 봤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요.

    '하지만 한 형식으로만 두 종류의 정보를 처리하는 생명체의 반응보다 두 종류의 정보를 다르게 처리하는 반응이 합리적임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고 한 종류의 반응만 보이는 생명체가 두 종류로 반응하는 생명체로 '필연적으로' 진화할 것임을 우리는 정당하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이죠. 마치 복잡한 수와 계산을 모르던 아이나 무학력자가 수학 공부를 통해 '필연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수와 계산을 배울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처럼요.'
  • 산마로 2009/08/16 00:30 # 삭제

    아이추판다님의 반론은 아이나 무학력자를 예로 들어 논리의 선험성을 반박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는 선험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이해 못하거나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하등생물이나 단일 목적의 기계가 공간 표상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공간의 선험성에 대한 반론이 아닙니다. 님이 본문에서 썼듯이 형광등과 파리,로봇 청소기가 그리 다르지 않고, '인식'의 수준에 이르지 못함을 뜻할 뿐이지요.
    '이들이 '미묘한 정보'를 이용해 공간을 인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스위치를 올리면 불이 들어오는 형광등도 '미묘한 정보'를 이용해 공간적 인식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요. 인식의 뜻을 그렇게 정의한다면 형광등도 공간적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 산마로 2009/08/16 00:36 # 삭제

    아이추판다님은 이해를 못하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철학사 공부를 하다보면 관념론, 합리론, 선험철학에 대한, 구조적으로 정확히 일치하는 반론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위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그 반론이 선험 논증의 핵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노정태님의 철학사 강조에 대한 일종의 지지 증거가 될 수도 있겠군요.
  • 산마로 2009/08/16 00:55 # 삭제

    좀더 덧붙이면, 본문의 논증은 공간 인식이 선험적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파리의 자극-반응 체계가 어느 수준인지 저는 잘 알지 못하지만 파리의 자극-반응이 형광등의 자극-반응에 비교될 수 있다면 파리의 자극-반응은 아직 인식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을 뜻할 뿐이니까요. 즉, 공간 표상을 갖고 있지 않은 생물의 자극-반응 체계는 형광등과 마찬가지여서 인식(형광등의 자극-반응을 인식이라고 부르지 않는 일상적 용법에 따라)이 아님을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이추판다 2009/08/16 01:59 #

    "h의 미묘한 정보를 이용하여 이는 순서에 상관없는 어떤 것, 즉 시간순서대로 오는 위협과는 어떤 것과는 다른 정보라고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즉 h경험만을 하는 동물이더라도 시간정보와 공간정보를 다르게 분류하고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또는 이런 식으로 진화하게 될 것입니다. " - 산마로, http://nullmodel.egloos.com/1931181#7352317.07

    파리가 바로 그런 h 경험만을 하는 동물입니다. 아마, 파리는 인식을 하는 게 아니라고 대답하실 텐데 그러면 인지과학이라는 건 더이상 존재할 수가 없는 거죠.
  • 산마로 2009/08/17 00:50 # 삭제

    " h경험만을 하는 동물이더라도 시간정보와 공간정보를 다르게 분류하고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또는 이런 식으로 진화하게 될 것입니다" 분류와 해석이란 말의 뜻을 모르시는 건 아닐텐데요? 게다가 파리와 형광등을 같은 수준으로 놓은 건 판다님입니다. 형광등의 자극-반응을 인식이라고 보지는 않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반적일텐데요. 파리가 인식을 하는지 안하는지는 관련 전공자가 아닌 제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모순되는 발언들을 정리해야 하는 부담은 판다님에게 있는 거죠.
  • 아이추판다 2009/08/17 01:22 #

    형광등 얘기는 산마로님의 '미묘한 정보' 때문에 나온 얘기죠. 처음부터 박쥐니 파리니 하는 얘기를 하실 필요가 없는 겁니다.
  • 산마로 2009/08/17 01:17 # 삭제

    이어지는 논의에서 확신했지만, 판다님은 선험(transzendental)이란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험과 생득은 구별되는 것입니다. 칸트든 플라톤이든 선험 논의에서 논리와 수학은 대표적인 선험적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로 들었듯이 아이나 무학력자는 간단한 형식논리조차 이해하지 못하죠.(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루리아의 설문에서 문맹자는 삼단논법조차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근거로 논리가 선험적이지 않다는 반론은, 선험적이란 생득적인 게 아니어서 갓난아기 때부터 아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기본도 이해하지 못하는 유치한 것입니다. '갓난아기'를 진화적으로 아직 낮은 수준의 인식이나 또는 인식 체계를 못하는 동물로 바꿔 보면 계속 설명한 사례가 무엇인지 감이 올 것입니다.
    선험이란 경험의 근거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필연적으로 그에 따라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기술적으로 경험불가능하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모순이나 역설 없이 가정할 수조차 없는 것이란 말이지요. 비행 기술을 우리가 모를 때라도, 우리가 하늘을 난다는 상상은 모순 없이 가능했지만, 시간 이동의 가정은 모순을 반드시 수반하게 되죠. 공간의 비선험성을 논증하고 싶으면 공간 인식 수준에 미달하는 자극-반응 체계를 예로 들 것이 아니라 모든 공간에 편재하는 주체나 모순 없는 시간 이동의 가능성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전공자가 아니면 입다물어라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전문용어의 정확한 의미조차 모르고서 발언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아이추판다 2009/08/17 01:30 #

    "선험이란 경험의 근거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필연적으로 그에 따라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 이건 동의합니다.

    그런데 시간이나 공간이 선험적 형식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불분명하단 말이죠. 제가 지금까지 얘기해온 건 다양한 종류의 인식이 실제로 존재하는데 왜 특정한 형식만을 선험적이라고 주장하느냔 말이죠. 산마로님은 그런 다양한 종류의 인식을 '낮은 수준의 인식'이라고 하는데 저는 거기에 별로 동의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세리자와님의 글 http://serizawa.egloos.com/1937833 에도 나오지만 현대 물리학은 "모든 사물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가정을 부정합니다.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끈 이론 등은 모두 우리의 직관에 위배되는 것들 뿐이죠. 그렇다면 선험이라는 개념은 시간이나 공간과 같은 형식에 한정할 수 없고 인간, 파리, 현대 물리학을 모두 포함하는 그런 형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계산(computation)이라는 개념을 얘기한 거죠.
  • 수학도 2009/08/17 03:15 # 삭제

    대학원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기하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으로써 아이추판다님과 노정태님의 공간에 대한 논의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저는 물리는 잘 모르지만, 기하학이 물리에 많이 응용되었고, 최근 20년간은 그 반대로 물리의 결과들이 기하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관심은 아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잘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현대 물리학은 칸트의 선험적 공간론의 철학 아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칸트 시대에 생각되어졌던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가 R^3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real dimension이 4인 공간으로 설명을 하고, 이것도 아마 R^4는 아니라 중력에 의해 휘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게 rimannian manifold of dimension 4에 적당한 metric이 주어졌을 때 curvature가 0이 아니라는 뜻인거 같은데, 리만기하와 일반상대론 둘 다를 제대로 몰라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걱정이 되네요.)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것이 또는 시공간이라는 것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반상대성이론이건 리만기하학이건 결국 그러한 공간(space)이 주어진 상태에서 기하학적인 성질들을 연구하는 것이지요.

    칸트의 질문은 일반상대성이론의 혹은 다른 무엇이든 (칸트의 경우 고전역학이었겠죠) 그 이론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 선험적인 것인지, 아니면 경험적인 판단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일반상대성이론이나 고전역학이나 그 무대만 다를 뿐 칸트의 질문에 대한 아무런 대답도 근거도 되지 못하는 것은 똑같지 않나 싶습니다.

    과연 현대 물리학의 무엇이 '모든 사물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가정을 부정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선 원리는 사물의 존재자체를 부정하진 않습니다. 위치와 운동량 모두를 정확히 결정할 수 없다는 것뿐이지요. 게다가 양자역학의 무대가 되는 우리의 세계 자체는 이미 가정이 되어 있습니다.

    끈이론의 경우는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물리학자들이 어떻게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를 건드리고 있으니까요. 그 물리학자들의 논리적인 연역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시공간R^4에 real dimension 6인 Calabi-Yau manifold가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물리학 이론에서 처음으로 칸트의 질문에 근접하게 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아이추판다님의 주장처럼 현대의 끈이론이 철학의 고유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잠식해 나가는 한 가지 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여전히 끈이론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정들이 있을텐데, 그런 것들이 과연 선험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지성을 통해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인지라는 질문은 남고, 이런 질문들은 영원히 철학의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 아이추판다 2009/08/17 04:19 #

    반갑습니다. 불확정성 원리의 경우만 말씀드리면 입자가 어딘가에 있긴 있는데 단지 우리가 측정만 못하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가 측정하기 전까지는 입자가 특정한 위치에 있질 않고, 측정을 하면 파동함수가 붕괴하면서 그제야 특정한 위치를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은 어딘가에 있다"는 식의 표현을 적용할 수가 없게되죠.

    어떤 질문들은 계속 철학의 영역에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질문들은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애초에 과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널리 쓰인게 19세기 정도입니다. 칸트와 공간에 대해서라면 어떤 부분은 여전히 철학적 영역이겠지만, 라캉주의자들처럼 환각도 철학의 대상이라고 하면 아주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 오린간 2009/08/17 14:05 #

    항상 이 블로그를 오면 잼나는것을 얻게 되는군요 ^^
    예전에 간단한 A.I. 를 만들려고 한적이 있었습니다.
    가상의 공간안에서 사과를 먹으러 돌아다니는 지렁이를 만들려고 했죠.
    그런데 여기서 지렁이가 공간을 스스로 인식하고, 사과를 향해 이동하는것 자체를 스스로
    이해하게 하려고 만들려고 했죠.
    그런데 처음에 공간을 인식한다? 라는 것 부터가 막히더군요.
    참으로 멍청한 때였죠 ㅋㅋㅋ

    지금은 좀 더 공부한 상태라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공간을 인식할 정도로 훌륭한
    인공지능을 만든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더군요.
    그리고 이 글을 보니, 그게 당연히 어려운것이구나~ 싶네요.
    생각해보니 사람조차도 도대체 공간이라는게 무엇인지 이토록 고민하니까요..
  • neville 2009/09/17 17:14 # 삭제

    뭐.. 그래봤자 어자피 파리의 눈깔이나
    인간의 눈알이나 동일한 유전자의 지배... 를 받지요


    언어 중추와 연관성 있는 FOXP2 유전자에 대하여 나오면
    참 재미있을꺼 같네요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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