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23일
어딘가에 있지 않으면서 존재하기
"우리는 선험적 인식이라는 말로써, 이런 경험 또는 저런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긴 인식이 아니라 단적으로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긴 그런 인식을 의미할 것"이라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B판 서문에서 선험적 인식을 정의하고 있다. (중략) 우리는 어떤 사물을 어떤 식으로건 경험할 때, 그것으로부터 공간 개념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사물은 '어딘가'에 있다.'어딘가'에 있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사물이란 있을 수 없다. 칸트가 의미한 '선험적 공간'은 바로 이런 개념이다.
노정태, 근대철학과 경험개념
노정태, 근대철학과 경험개념
이제, 하나씩 짚어보자. "모든 사물은 '어딘가'에 있다. '어딘가'에 있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사물이란 있을 수 없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아래 그림을 보자. 아래 그림에서 왼쪽은 곰과 호랑이, 쑥과 마늘이 있다. 오른쪽 그림은 왼쪽 그림을 선형 변환해서 만든 것이다. 곰이고 호랑이고, 쑥이고 마늘이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냥 불그리푸르죽죽한 잡음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그림은 원래 그림의 정보를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원래 변환의 역변환을 취해주면 원래 그림으로 돌아올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오른쪽 그림에도 여전히 곰, 호랑이, 쑥, 마늘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어딘가'에 있지 않을 뿐이다.

우리의 뇌는 오른쪽 그림처럼 정보를 다루고, 우리의 의식은 왼쪽 그림처럼 정보를 다룬다. 그럼 어느 쪽이 실재 세계를 반영하고 있을까?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두 그림의 정보는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다. 왼쪽과 같은 형태의 세계와 오른쪽과 같은 형태의 세계는 1:1로 대응하기 때문에 왼쪽 세계에 성립하는 물리법칙이 있으면 이에 대응하는 오른쪽 세계에서 성립하는 물리법칙도 반드시 있다(isomorphism). 어느 쪽이든 똑같으니까 실제 세계가 어떻든지 별 문제가 아니다. 뭐, 그냥 이해하기 쉬우니까 왼쪽같다고 믿고 살자.
하지만 세계가 왼쪽 그림과 같은 방식일 필연성도 없고, 우리가 세계를 그렇게 인식해야할 필연성도 없다. 실제로도 신경 수준에서는 오른쪽 그림처럼 인식하고 있다. 왼쪽 그림처럼 인식하는 건 의식 수준의 얘기일 뿐이다. 의식도 오른쪽 그림처럼 인식하면 안된다는 법은 없다. 실제 세계가 어떻든 정보를 처리한다는 목적만 놓고보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편한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당연히 어느 쪽이어야할 이유는 없다. 우리도 왼쪽과 오른쪽을 왔다갔다 한다. 단지 의식만 못할 뿐이다.
오른쪽 그림도 어쨌든 공간은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일단 물체가 어딘가에 놓여있는 형태의 공간도 아닐 뿐더러 그림으로 그려놓으니까 공간처럼 보이는 거지 꼭 공간이라고 해야할 이유도 없다. 컴퓨터에서는 메모리에 있는 1과 0의 조합일 뿐이고, 뇌에서는 시냅스 패턴에 불과하다. 왼쪽 그림을 푸리에 변환해서 소리로 바꾸면 모든 정보는 시간축을 따라 배열되는데 그것도 공간이라고 해버리면 시간과 공간을 구별한 칸트의 의도가 무색해진다.
앞에서는 공간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따르냐 아니냐 이런 차원에서 얘기했지만 이 글에서 다루는 건 아예 공간이라는 그런 개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공간적인 형태의 정보는 비공간적인 형태로 손실없이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공간 같은 형식을 특정함으로써 인식의 근거를 확립하려는 칸트의 시도는 실패했다기보다는 낡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칸트에게서 낡은 부분들을 쳐내고 '합리적 핵심'만 취해야 한다. 그게 무엇이듯, 공간 문제는 아니다. (계속)
# by | 2009/07/23 00:56 | 트랙백(2) | 핑백(4) | 덧글(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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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글의 논지는 정보가 어떤 형태로 변환되더라도 100% 동일하게 복원될 수 있다면 같은 사태란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간 정보를 시간 정보로 변환시켰을 때 경험하는 주체는 복원 가능성과 무관하게 두 정보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노정태의 글이 전제하고 있지 않은 것을 부당하게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요? 어떤 형태의 정보를 다른 형태의 정보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것은 굳이 저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는 칸트 시대에도 알려져 있었죠. 예를 들어 도형을 수식으로, 음악을 악보로 옮길 수 있다는 것 등. 두 사례에서만도 벌써 공간정보와 시간정보는 복원 가능하게 서로 옮겨질 수 있지만 이것이 경험의 형식으로서 공간과 시간에 의미가 없다는 뜻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공간 정보와 시간 정보 간의 변환이 아니라 공간 정보를 어떤 도메인에서 표현하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건 시간하고는 전혀 상관없고 공간을 coordinate 에 따라 인식하는가 spatial frequency 에 따라 인식하느냐에 대한 것 같은데... 우리가 시각정보를 저장하는게 후자의 방법이란건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잘 알려져 있지요.
뿐만 아니라 노정태의 원문에서는 '사물의 정보'가 아니라 '사물'이 어딘가에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정보가 시공간과 상관없이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디지탈 정보가 하드디스크든 메모리 반도체든 어떤 구체적인 시공간의 사물의 배열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식으로 그것이 '정보'인 줄 인식합니까? 영적인 어떤 것이라고 대답하지는 않으시겠죠. 아이추판다님이 든 사례에서 공간 정보를 소리와 같은 시간 정보로 변형시켰다 한들 소리 역시 어떤 제한된 공간에서 '음파'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 소리를 기호로 변형시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물의 정보가 어떤 식으로 변환되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물일 뿐이죠. 거기서 읽어낸 정보가 시간적이든, 공간적이든, 또는 어떤 기호의 배열이든,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물의 매체가 없이 정보가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추판다님 식으로 노정태의 원문을 읽는 것은 그 진의를 오해한 것에 가깝습니다.
박쥐를 예로 드셨는데, 박쥐가 실제로 시간과 공간을 구별해서 경험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박쥐가 '반드시' 시간과 공간을 구별해야하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아요. 박쥐가 공간적 경험을 한다는 건, 음파를 공간적 정보로 변환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장애물이나 천적을 피하고 먹이에 접근하기 위해서죠. 이 '목적'이 없으면 음파를 공간적 정보로 변환하는 기능이 진화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죠?
음파로 전달된 신호를 x라 하고, 박쥐의 행동을 y라고 합시다. 그리고 음파를 분석해서 공간적 정보로 변환하는 과정을 함수 f라고 하죠. 그리고 이렇게 변환된 공간 정보를 이용해서 다음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과정을 함수 g라고 합시다. 여기서 g와 f는 별개의 신경회로로 배선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박쥐의 움직임은 y = g(f(x))라는 식으로 표현될 것이고 x,y,f,g 각각에 해당하는 신경신호와 신경회로를 우리가 특정할 수 있습니다. 박쥐에게서 공간적 경험이란 f에 해당하는 회로에서 g에 해당하는 회로로 넘어가는 신경 신호에 기반하겠죠. 그런데 수학적으로 g와 f의 합성함수인 h가 존재할 수 있고 이에 해당하는 신경회로도 가능합니다. 이 함수 h에 해당하는 신경회로는 입력 정보를 공간 정보로 변환하는 과정없이 바로 행동을 계산합니다. 이때는 박쥐가 공간을 경험할 이유가 없죠.
실제로 로봇청소기 따위를 만들 때 센서에서 입력된 정보를 공간적으로 변환하고 다시 여기에 의거해서 움직임을 계산하면 복잡하기 때문에 그냥 센서의 정보 패턴에서 바로 로봇의 움직임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물이 어디에 있다"는 걸 아는 건 우리가 사물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공간이라는 형식을 통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인식한다면 사물이 어딘가에 있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겁니다. 정보가 시공간과 상관없이 주어질 수 없다는 말도 결국 "공간은 반드시 있다"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세계가 본문의 오른쪽 그림과 같은 형태라고 해봅시다. 그러면 사물의 배열이라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왼쪽 그림과 같은 형태로 인식을 하는 한에서 사물의 배열이라는 게 의미가 있을 수는 있죠. 그런데 그건 우리가 정보를 처리하는 형식일 뿐입니다. 산마로님은 오른쪽 그림도 공간은 공간이라고 말씀하실 것 같은데 그렇다치더라도 모든 것이 모든 장소에 중첩되어있는 '공간'에서 '사물의 위치'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박쥐의 사례로 돌아와서 공간정보의 함수,시간정보의 함수를 동시에 처리하는 h 하나로 두 정보를 경험하는 동물이 있다고 칩시다. (박쥐 사례에서 이미 이렇게 간주했었습니다)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 오는 위험 A,B가 h에서는 동시에 경험되지 못하지만 실제 두 위험을 피하는 순서는 상관없거나 박쥐의 자세에 따라서 위험 A부터 먼저 피하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생각을 해 보지요. 박쥐는 A-B의 순서가 주어지더라도 h의 미묘한 정보를 이용하여 이는 순서에 상관없는 어떤 것, 즉 시간순서대로 오는 위협과는 어떤 것과는 다른 정보라고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즉 h경험만을 하는 동물이더라도 시간정보와 공간정보를 다르게 분류하고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또는 이런 식으로 진화하게 될 것입니다.
진화가 경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경험의 진화가 시공간 정보를 수용하는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죠. 최초의 생물의 경우에도 시간 정보와 공간 정보가 포함되지 않은 정보수용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최초의 생물이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딘가'라는 말에 집착을 하시지만 어딘가를 where로 바꾸어 쓴다고 해도 그 뜻이 바뀌지는 않는 것처럼 공간 정보가 어떤 식으로 처리되든 그것이 '어딘가'가 아닌 딴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박쥐의 예에서 보듯이 공간 정보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도 그 명제는 참이 될 수 있죠.
정리하면 공간 정보가 우리 인간이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형태로 처리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사물이 어딘가에 있다'는 명제에 대한 반론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간 정보가 아이추판다님이 예로 든 그림 중 왼쪽으로 처리되든 오른쪽으로 처리되든 그것이 '공간'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이라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의 논의는 선험적인 형식의 지위와 본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형식을 경험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려 했던 이들도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우선 구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도 동어반복으로 간주하기는 했지만, 경험에서 주어지지 않는 법칙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문제는 이런 겁니다. 세계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방식으로 '형식화(formalization)'하는 것이 필연적인가? 만약 이걸 증명하려면 다른 방식으로는 형식화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산마로님은 계속 시간과 공간은 필연적이니까 다른 방식으로는 형식화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건 올바른 논증이 아니에요. 그건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를 가지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비판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르게 논증을 하려면 시간과 공간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형식화하면 내재적 모순이 있다는 걸 보이거나 아니면 시간과 공간으로 형식화한 것과 homomorphic 하지 않다는 식으로 논증을 해야 합니다.
물론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사이의 관계나 두 형식 외의 다른 형식이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한 형식으로만 두 종류의 정보를 처리하는 생명체의 반응보다 두 종류의 정보를 다르게 처리하는 반응이 합리적임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고 한 종류의 반응만 보이는 생명체가 두 종류로 반응하는 생명체로 '필연적으로' 진화할 것임을 우리는 정당하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이죠. 마치 복잡한 수와 계산을 모르던 아이나 무학력자가 수학 공부를 통해 '필연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수와 계산을 배울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처럼요.
"시공간이 선험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 '선험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1) 선험적인 무언가의 구성요소로서의 시공간의 의미와 (2) 왜 그런한 시공간이 선험적인 무언가의 필수적인 요소인지'가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수학에서 시공간은 정의상 특정한 곡률함수를 가지는 미분다양체이지요. 선험적인 시공간이 있다면 그 곡률함수는 무엇일까요? 철학의 시공간과 수학의 시공간은 다르고 말씀하실 것 같은데, 반복되지만 선험적인 무언가의 구성요소가 왜 하필이면 '시공간'이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상식적인 느낌을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추판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철학 좋은데, 철학하시는 분들이 현대의 발달된 심리학, 수학, 과학의 지식은 기본으로 흡수한 상태에서 논의를 해줬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이 있네요.^^
물론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노정태의 원문의 발언은 (1) 설명 없이도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었죠. (2) 왜 시공간이 선험적인 것의 구성요소인지를 두고 학계에서는 여전히 토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선험적인 시공간이 수학적인 정의로만 설명되어야 할까요? 제가 위 댓글에서 계속 설명했던 것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든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사물의 정의에 포함될 수밖에 없고 동물은 그것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학의 정의와 동일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든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차원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사물'이 없다는 것은 곧 그것이 선험적인 차원임을 가리킵니다.
1. 함수 h는 함수 g와 함수 f의 합성함수입니다. 따라서 항상 같은 s에 대해 반응 r = h(s) = g(f(s))입니다.
2. 내적으로 공간을 경험하려면 이를 형식화했을 때 공간에 해당하는 항이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h에는 그런 항 없습니다.
3. '반응'하고 '내적 경험'은 전혀 다른 겁니다.
4. 공간 정보를 공간적인 형식으로 처리하지 않는 인공지능 알고리듬은 발에 차일만큼 많습니다.
2.공간에 해당하는 항이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쥐의 사례에서 들었듯이 시간과 공간 정보가 잘 구별되지 않아도 공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3.반응과 내적 경험이 같다는 말을 한 적 없습니다. 공간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공간적 경험이 가능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4.'인간의 또는 특정한 공간적 형식'이라고 해야겠지요.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든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사물의 정의에 포함될 수밖에 없고 동물은 그것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 글쎄 그 공간이 무슨 의미냐니까요. 수학적 공간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무슨 의미인지 밝혀주셨으면 좋겠군요.
우선 선험적 공간이라는 용어보다는 초월적 공간이라고 용어로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험적이라고 할 때는 의미가 지나치게 한정되니까.
초월적 공간이라고 할 때 우선 말해야하는 것은 '무엇에 대한' 초월인가겠고 여기서 무엇은 당연히 인식 주체입니다. 인식주체를 초월하는 공간. 이때 초월은 한 편으로는 인식 주체의 경험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주체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초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이게 선험적이라는 혹은 선천적이라고까지 말해질 수 있는 의미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경험의 과정에서 인식 주체를 벗어나 밖으로 투사된다는 의미에서 '초월'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이런 맥락에서 주관적입니다). 전공자들께서는 몇 가지 더 지적해주실 수 있겠지만 비전공자인 저는 이 정도로 구분합니다.
처음 논의가 시작될 때 부터 말씀드렸지만 논의가 그나마(결코 그럴리 없다 생각하지만) 생산적이려면 경험에 대한 개념부터 잡고 시작하시라 말씀드렸습니다. 위에서 제시한 후자의 '초월'의 의미는 칸트가 말한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칸트의 경험은 대상경험을 말합니다. 표상적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으나 이 경우 청각은 어쩔거예요라는 아주 원초적 질문들이 있을 거 같아 그냥(귀찮으니) 대상 경험이라고 적습니다.
대상은 ob-jet, 말 그대로 내 앞에 던져진 것입니다. 칸트에게는 좀 더 이 단어가 리얼한데.. 그건 그가 말하는 대상 경험이 내 앞에 이미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의 대상을 내 앞에 내가 던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어진 이러저러한 자료들을(여기서 감성의 배치 작용이 문제가 되겠으나 여기서는 무시합시다. 문제를 제시하신다면.. 아마 아이츄판다님의 문제제기가 타당하실 겁니다) 공간을 가지고 대상을 구성해서 내 앞에 던져 놓습니다. 이게 경험의 과정이고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철학은 구성주의입니다.
이 구성주의에서 대상은 반드시 공간을 점유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대상이라는 것 자체가 이러저러한 감각자료들을 인식 주체가 공간과 시간의 틀로 구성해낸 결과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정태님의 인용된 글 식으로 말하면 모든 사물은 어딘가에 있고 어딘가에 있지 않은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사물, 대상으로서의 사물은 내가 인식자료들을 시공간의 틀로 정리해 낸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공간에 내가 놓은 것, 그게 사물, 대상으로서 사물이고, 경험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이츄판다님께서 제시한 두 그림 중 오직 왼쪽 그림만이 칸트가 말하는 경험이고, 오른쪽 그림은 칸트에게는 경험이 아닙니다. (왜 왼쪽만 경험이냐 오른쪽도 경험이지라고 당연히 반론가능합니다만 제가 답할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저는 칸트에 비판적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오른쪽의 그림을 시공간의 형식을 받기 이전의 자료들이라고 하고, 말씀하시는 변환과정을 칸트의 표상작용(혹은 상상화 작용)에 대응 시켜볼 수 있습니다. 이때, 아이츄판다님께서 제시하신 반론은 칸트의 이론에 대한 설명이 될 것 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칸트가 왼쪽의 그림 같은 것만을 경험이라고 했을 때, 아이츄판다님이 제시하신 '공간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따르냐 아니냐'는 문제제기나 '경험에 공간이 필요한가'라는 비판은 허수아비 논증이라는 겁니다.
다만.. 지난 글에서 말씀하신 심리학의 성과들은 매우 적절한 비판입니다. 그러나 칸트의 이론이 개체차원의 논의임을 고려할 때, 유전되는 것이 있다는 말씀은 칸트의 이론을 비판하기보다는 지지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선험성에 대한 비판은 철학사에서도 죽 이어지고 있는 비판이고 저는 칸트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츄판다님께서 위의 두 그림을 제시하신 이상, 논의는 여기가 종점 맞습니다. 환원주의자와 아닌 자들의 논의의 종결점은 언제나 여기였지요. 저 두 그림이 서로 다른 그림이냐 완전히 동일한 것이냐(변환의 과정을 개입시키는 것도 사실 문제가 되지 않나 생각되는데..). 칸트는 다르다 쪽이고 아마 아이츄판다님은 같다 쪽이셔야할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끝장에 왔음에도(본래 논의는 이게 아니었지만) 사물이 점유하는 공간 운운되고 있어서 몇 자 적었습니다. 사실 이런 비판은 칸트의 이론이 처음 제시되었을 때 바로 나온 즉각적 비판이었습니다. 뭐? 공간을 니가 부여해? 공간이 주관적이야? 그럼 니 대가리에는 공간이 들었어? 그래서 니 대가리는 지구만해? 칸트는 그런 거 아니거든요. 구성한다고요 구성. 표상한다고요 표상. 굳이 말한다면 공간화 작용이라고요. 공간은 상상화 작용의 2차적 생산물이라고요.
제가 프로그램에 조금 문외한이라서 그런데... 실례지만 혹시 저런 변환을 시켜주는
알고리즘이나 코드(?)같은 것을 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