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10일
라캉주의자들의 까임방지권
칸트와 상대론에 대한 글을 하나 쓰고 라캉주의자들의 논쟁 전략에 대한 글을 하나 썼다. 어느 쪽을 먼저 공개할까하다가 이쪽을 먼저 공개한다. 칸트와 상대론에 대한 글은 내일 공개할 것이다.
노정태님과 나는 라캉주의에 대해 같은 평가를 내린다. 문제는 그런 평가의 전제가 다르다는 건데, 내가 볼 때는 그 전제 중에 하나가 위험하다.

노정태님은 라캉주의자들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줘서는 안되고 라캉주의가 의학으로 인정받으려면 그만한 의학적 성과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노정태님과 나의 이러한 평가는 위와 같은 학문의 지형도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1년간 관찰해본 결과 라캉주의자들에게 이런 주장은 씨알도 안먹힌다.
왜냐하면 라캉주의자들은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로서 획정권을 발휘하여 지형도를 아래와 같이 고쳐 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캉주의자들은 "우리는 철학이지 의학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라 윤리와 욕망의 문제다"라고 간단히 피해버린다. 내버려두면 총기난사를 저지를 사람이 정신분석을 받고 공격성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면 그게 치료가 아니라 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라캉주의자들에 따르면 그건 치료가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 의학, 과학 그리고 철학의 범주를 재정의함으로써 외부의 비판을 간단히 무화시킨다. 누구 맘대로 재정의냐고 물어보면, 까임 방지권 "라캉은 철학이거든요?"를 발동한다.
그러면 라캉은 철학이나 과학이니 이렇게 획정하는 게 옳으니 그르니하고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 안에서 다투는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라캉주의자들과 과학의 정의가 뭐고 의학의 정의는 무엇이며 철학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 '철학적 논쟁'을 벌여야 한다. 이렇게 철학적 논쟁으로 끌고 들어가서 과학적 비판을 덮어버리는 게 라캉주의자들의 수법이다.
노정태님의 주장은 근본적으로는 '까임방지권'이 있고 칸트의 선험철학이나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의 경우에는 '까임방지권'이 정당하지만 라캉의 경우에는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당성은 철학적 판단에 따른다. 나도 과학적으로 비판할 여지가 없는 철학이나 또는 과학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비판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학적으로 볼 때' 얘기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노정태님의 주장은 철학의 어떤 부분이 과학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지 철학적으로 먼저 검토해보고 그 다음에 과학을 들이대야 한다는 거고, 내 생각은 일단 과학을 들이대서 비판을 해보고 비판이 되면 되는거고, 안되면 그건 철학적 문제다.
근대의 과학과 철학의 역사를 봐도 일단 과학을 들이대고 나중에 철학적으로 검토했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칸트는 마음이 시간에 따라서만 변하고 공간에 따라서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심리학은 과학이 될 수 없다고 논증했다. 과학적 심리학이 등장한 것은 칸트의 이 논증을 철학적으로 논파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연과학의 실험방법들을 사람에게도 적용해보니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초기 심리학의 실험들은 반응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걸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면 이렇다. 자료의 양이 늘어날 수록 자료를 처리하는 시간도 늘어나기 마련인데 알고리듬마다 늘어나는 양태가 다르다. 이걸 시간 복잡성(time complexity)이라고 한다. 사람의 경우 자극의 수를 바꿔가며 반응 시간을 측정해보면 시간 복잡성을 알 수 있고 이것으로부터 사람의 머리 속 알고리듬을 추정할 수 있다. 끝. 그런데 이런 정당화는 심리학의 초기에는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이런 개념을 다루는 계산이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당화는 못했지만 실험을 해보니 결과가 나오고 결과를 들여다보니 뭔가 설명할 건덕지가 보이고 그렇게 진행된 것이다.
왜 이게 중요한가? 우리는 모두 시대의 자식이고, 우리의 상상력은 시대의 한계에 갇혀있다. 아무리 과학을 괄호치고 순수하게 철학적으로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정말로 '순수한 철학'이 될 수는 없다. 칸트는 단 하나의 기하학만 존재하고, 물리학은 그 기하학에 의지며, 과학적 심리학은 존재하지도 않던 시대의 사람이다. 칸트는 심리학이 과학이 될 수 없다고 했지만 인지과학에는 칸트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여럿 있다.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인 호프스태터가 그렇다. 그런 시대의 한계를 고려하고 읽어보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은 여럿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통찰이 앞으로도 유효할지 어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의 그런 평가 역시 시대의 한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프로이트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라캉은 사기꾼 취급하고, 라캉주의자들은 반동으로 보는데 그건 그들이 산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칸트나 프로이트는 자기 시대를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라캉은 사기꾼이지만 동시대의 다른 정신분석학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면 라캉의 시대에 위궤양은 정신분석학의 대상이었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약간 봐줄 수 있다. 라캉주의자들은 그냥 답이 없다. 라캉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반동성을 철학으로 재포장하려고 발버둥친다. 이들과 진지하게 철학적 논의를 하는 것은 라캉주의자들의 수명을 연장시킬 뿐이고 똑같이 반동적이 될 뿐이다.
p.s. 세번째 짤방은 라캉주의자들을 위한 선물이다. 글을 쓸 때 첫페이지에 꼭 첨부하기 바란다.
노정태님과 나는 라캉주의에 대해 같은 평가를 내린다. 문제는 그런 평가의 전제가 다르다는 건데, 내가 볼 때는 그 전제 중에 하나가 위험하다.

노정태님은 라캉주의자들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줘서는 안되고 라캉주의가 의학으로 인정받으려면 그만한 의학적 성과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노정태님과 나의 이러한 평가는 위와 같은 학문의 지형도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1년간 관찰해본 결과 라캉주의자들에게 이런 주장은 씨알도 안먹힌다.
왜냐하면 라캉주의자들은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로서 획정권을 발휘하여 지형도를 아래와 같이 고쳐 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캉주의자들은 "우리는 철학이지 의학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라 윤리와 욕망의 문제다"라고 간단히 피해버린다. 내버려두면 총기난사를 저지를 사람이 정신분석을 받고 공격성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면 그게 치료가 아니라 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라캉주의자들에 따르면 그건 치료가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 의학, 과학 그리고 철학의 범주를 재정의함으로써 외부의 비판을 간단히 무화시킨다. 누구 맘대로 재정의냐고 물어보면, 까임 방지권 "라캉은 철학이거든요?"를 발동한다.

노정태님의 주장은 근본적으로는 '까임방지권'이 있고 칸트의 선험철학이나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의 경우에는 '까임방지권'이 정당하지만 라캉의 경우에는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당성은 철학적 판단에 따른다. 나도 과학적으로 비판할 여지가 없는 철학이나 또는 과학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비판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학적으로 볼 때' 얘기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노정태님의 주장은 철학의 어떤 부분이 과학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지 철학적으로 먼저 검토해보고 그 다음에 과학을 들이대야 한다는 거고, 내 생각은 일단 과학을 들이대서 비판을 해보고 비판이 되면 되는거고, 안되면 그건 철학적 문제다.
근대의 과학과 철학의 역사를 봐도 일단 과학을 들이대고 나중에 철학적으로 검토했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칸트는 마음이 시간에 따라서만 변하고 공간에 따라서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심리학은 과학이 될 수 없다고 논증했다. 과학적 심리학이 등장한 것은 칸트의 이 논증을 철학적으로 논파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연과학의 실험방법들을 사람에게도 적용해보니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초기 심리학의 실험들은 반응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걸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면 이렇다. 자료의 양이 늘어날 수록 자료를 처리하는 시간도 늘어나기 마련인데 알고리듬마다 늘어나는 양태가 다르다. 이걸 시간 복잡성(time complexity)이라고 한다. 사람의 경우 자극의 수를 바꿔가며 반응 시간을 측정해보면 시간 복잡성을 알 수 있고 이것으로부터 사람의 머리 속 알고리듬을 추정할 수 있다. 끝. 그런데 이런 정당화는 심리학의 초기에는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이런 개념을 다루는 계산이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당화는 못했지만 실험을 해보니 결과가 나오고 결과를 들여다보니 뭔가 설명할 건덕지가 보이고 그렇게 진행된 것이다.
왜 이게 중요한가? 우리는 모두 시대의 자식이고, 우리의 상상력은 시대의 한계에 갇혀있다. 아무리 과학을 괄호치고 순수하게 철학적으로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정말로 '순수한 철학'이 될 수는 없다. 칸트는 단 하나의 기하학만 존재하고, 물리학은 그 기하학에 의지며, 과학적 심리학은 존재하지도 않던 시대의 사람이다. 칸트는 심리학이 과학이 될 수 없다고 했지만 인지과학에는 칸트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여럿 있다.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인 호프스태터가 그렇다. 그런 시대의 한계를 고려하고 읽어보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은 여럿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통찰이 앞으로도 유효할지 어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의 그런 평가 역시 시대의 한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프로이트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라캉은 사기꾼 취급하고, 라캉주의자들은 반동으로 보는데 그건 그들이 산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칸트나 프로이트는 자기 시대를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라캉은 사기꾼이지만 동시대의 다른 정신분석학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면 라캉의 시대에 위궤양은 정신분석학의 대상이었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약간 봐줄 수 있다. 라캉주의자들은 그냥 답이 없다. 라캉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반동성을 철학으로 재포장하려고 발버둥친다. 이들과 진지하게 철학적 논의를 하는 것은 라캉주의자들의 수명을 연장시킬 뿐이고 똑같이 반동적이 될 뿐이다.
p.s. 세번째 짤방은 라캉주의자들을 위한 선물이다. 글을 쓸 때 첫페이지에 꼭 첨부하기 바란다.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 by 아이추판다
- 칸트의 선험적 공간, 반과학주의와 반인문주의 by 노정태
- 기하학과 마음 이론 by 아이추판다
- 반란과 찬탈 by 아이추판다
- 인문학적 제어론 (2) by 아이추판다
# by | 2009/07/10 14:22 | 트랙백 | 핑백(3) | 덧글(2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이론 - by 아이추판다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 - by 아이추판다 칸트의 선험적 공간, 반과학주의와 반인문주의 - by 노정태 라캉주의자들의 까임방지권 - by 노정태 공간을 찾아서 - by 아이추판다 라캉 논쟁에 이은 과학 VS 철학 2차전. 지난 번엔 같은 사이드에서 한마음(?)으로 라캉을 공격하던 ... more
... 존재할수 없다는 의미라는것, 제임스 본드의 변화 등등은 정말 재미있게 읽은것 같다. 문화비평은 과학류하고는 또다르게, 그 자체로 문학적 영역에 속해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이추판다 님같은경우는 라캉주의자들의 임상과 문화비평으로서의 이중성을 까방권이라 하는것 같기도 한데, 애초에 난 라캉주의자들이 왜 아직까지도 임상을 고집하는지 의문이 들어서... 그냥 하 ... more
... 원래 저주받은 운명은 라캉주의자들처럼 증거가 없거나 증거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서도 이를 지적하면 "철학적 까임방지권"을 발동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여기서 19세기에 있었던 칸트 철학과 비유클리드 물리학의 갈등을 소개했는데(공간을 찾아서), 노정태님은 칸트의 공 ... more
한 가지 덧붙여, 아이추판다님께서 공부하시는 분야에서 공격성의 심리도 다루는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기제로 작동하는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공격성에 대해서는 저도 교과서 수준의 지식 밖에 없습니다. 심리학 개론 교과서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님 예전 포스팅에서 거울 단계 깐 거 보니까 그때 생각이 나더군요.
귀찮으시겠지만 심리학에 대해 잘 모르는 저를 위해, 라캉이 왜 사기꾼인지(직접 설명하셔도 되고 관련 글 링크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왜 우리 나라에 라캉 신봉자들이 많은지 좀 설명 부탁드립니다. 꾸벅
영어랑 바이바이한 게 5년이 넘었는데...--;
사실 전 개인적으로는 라깡을 참 좋아하는데 (재밌는 얘기가 많다는), 나중에 정신분석 담론이 갖는 유용성(진리성이 아닌) 혹은 재미에 대해 써볼 생각이 있지요 ㅋㅋ.
하지만 정신질환에 대한 임상 치료 이론이자 "마음에 대한 이론"이라고 보면 라깡 이론은 참 황당한 이야기에요. 도대체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주장을 하는데 왜 그걸 과학이라고 부르지 못하느냐"는 이야기쯤 되면 거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수준의 이야기지요. 일일이 책에 줄 그어 가면서 "자, 여기는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이야기지?"라고 짚어 주고 실험 결과 보여주면서 "그런데 틀렸지?" 이렇게 친절하게 반박해줄 수도 없고 (이미 거울 단계나 환각에 대한 얘기에서부터 그것도 안 통할 거라는 느낌이 오지만).
aleph //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이름이 '폐제'되었기 때문이죠. (후다닥)
그러니까 ..
"It does work! (even we don't exactly know why it does)"
를 '의학' 이라고 부르신 거란 말씀이죠?
http://cafe.daum.net/9876?t__nil_cafemy=item
하나는 지젝에 대한 서평과 인문학 관련 서평을 자주 올리는 로쟈란 분의 블로그인데, 이 분도 인터넷에서 유명한 분이지요.. 그냥 알아두시라고요^^
http://blog.aladdin.co.kr/mram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