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09일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
결국 여기서 핵심은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이 글에서 계속 반복될 것이므로 T라고 하자. 노정태님의 주장은 이렇다.
주장1: T에 해당하는 주제가 있다. 인식 주체와 세계의 문제,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 형이상학적 주제 등
주장2: 어떤 주제가 T에 해당하는 지 판단하는 것 역시 T에 속한다. "철학적 주제가 과학적 대상으로 독립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철학적 질문'이다."
내 생각에 주장1은 확실치 않고, 주장 2는 잘못되었다. 주장2가 옳다면 칸트의 공간에 대한 논증은 물리학의 개입을 허용치 않으므로 여전히 옳고, 따라서 리만과 아인슈타인이 틀린 것이다. 게다가 주장2는 라캉주의자들에게 면죄부를 준다.
라캉주의자들에 따르면 라캉주의 역시 T에 속한다. "라캉주의는 철학이거든요??" 따라서 라캉주의는 과학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예전에 한 번 지적한 바 있는데 그 때 노정태님은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
노정태님은 '자신은' 라캉주의가 T에 속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라캉주의자들에게도 라캉주의가 T에 속한다고 판단할 권리는 여전히 있다. 노정태님은 이 권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라캉주의자들의 방어 자체도 정당한 것이다. 결국에는 평행선이다. 이것도 이미 한 번 한 얘기인데 노정태님은 이런 식으로 답변했다.
그러니까 라캉주의자들은 라캉주의가 T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라캉주의가 T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둘 다 철학적으로는 정당하지만 서로 비판과 견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이것은 문제를 철학적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밖에 안된다. 라캉주의자들의 전략도 결국 그것이다. 환각의 원인을 묻는데 환각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따지는 게 가능하냐는 둥 마냐는 둥 이런 식의 끝도 없는 소릴하면서 대답을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택광은 조승희가 정신분석을 받았으면 총기 난사 안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좁게 잡아도 보건 정책에 상당한 이슈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의 의료보험과 같은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이런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도대체 그런 증거가 어디있나. 이렇게 말하면 이택광은 다시 자신이 얘기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라 윤리나 욕망과 같은 문제이며 따라서 과학적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떠들 것이다. 이렇게 철학적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노정태님은 이게 지금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니 비판과 견제 다 좋은데 그래서 정신분석에 의료보험 혜택을 줘야하나 말아야하나?
노정태님은 "과학이 오직 경험 가능한 대상에 대해서만 성립하는 지적 활동"이라는 칸트의 규정 자체는 옳다고 하지만 이 규정은 별 쓸모가 없다. 어떤 것이 경험 가능한 대상인지 아닌지는 불변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사람의 뇌활동은 얼마 전까지만해도 경험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어떤 것이 경험 가능한지 아닌지는 당대의 과학에 의존한다. 라캉주의가 T가 아니라고 하기 위해서는 라캉주의의 내용 중 적어도 일부는 현대 과학에서 경험가능한 대상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과학의 개입을 허용한다. 주장2를 적용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라캉주의를 반박할 수 없다.
노정태님은 "나는 라캉주의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이라고 말하면서 라캉주의나 그와 유사한 온갖 반과학주의에 뒷문을 열어준다.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 그것은 뒷문이다. 우리는 그 문을 대못으로 두드려 막아야 한다.
주장1: T에 해당하는 주제가 있다. 인식 주체와 세계의 문제,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 형이상학적 주제 등
주장2: 어떤 주제가 T에 해당하는 지 판단하는 것 역시 T에 속한다. "철학적 주제가 과학적 대상으로 독립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철학적 질문'이다."
내 생각에 주장1은 확실치 않고, 주장 2는 잘못되었다. 주장2가 옳다면 칸트의 공간에 대한 논증은 물리학의 개입을 허용치 않으므로 여전히 옳고, 따라서 리만과 아인슈타인이 틀린 것이다. 게다가 주장2는 라캉주의자들에게 면죄부를 준다.
라캉주의자들에 따르면 라캉주의 역시 T에 속한다. "라캉주의는 철학이거든요??" 따라서 라캉주의는 과학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예전에 한 번 지적한 바 있는데 그 때 노정태님은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
개별적인 분과 학문이 과학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은 철학의 임무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판단이 이성적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은 철학의 임무가 맞습니다. 그리고 과학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의 부분집합일 뿐 두 가지가 서로 등가적인 것은 아니죠. 그런데 저는 정신분석의 논리가 이성적일 수는 있어도 과학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라캉주의에 대한 아이추판다님의 (심리학도로서의) 비판에 동의한 거고요.
노정태님은 '자신은' 라캉주의가 T에 속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라캉주의자들에게도 라캉주의가 T에 속한다고 판단할 권리는 여전히 있다. 노정태님은 이 권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라캉주의자들의 방어 자체도 정당한 것이다. 결국에는 평행선이다. 이것도 이미 한 번 한 얘기인데 노정태님은 이런 식으로 답변했다.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이 지닌 다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그러니까 라캉주의자들은 라캉주의가 T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라캉주의가 T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둘 다 철학적으로는 정당하지만 서로 비판과 견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이것은 문제를 철학적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밖에 안된다. 라캉주의자들의 전략도 결국 그것이다. 환각의 원인을 묻는데 환각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따지는 게 가능하냐는 둥 마냐는 둥 이런 식의 끝도 없는 소릴하면서 대답을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택광은 조승희가 정신분석을 받았으면 총기 난사 안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좁게 잡아도 보건 정책에 상당한 이슈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의 의료보험과 같은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이런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도대체 그런 증거가 어디있나. 이렇게 말하면 이택광은 다시 자신이 얘기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라 윤리나 욕망과 같은 문제이며 따라서 과학적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떠들 것이다. 이렇게 철학적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노정태님은 이게 지금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니 비판과 견제 다 좋은데 그래서 정신분석에 의료보험 혜택을 줘야하나 말아야하나?
노정태님은 "과학이 오직 경험 가능한 대상에 대해서만 성립하는 지적 활동"이라는 칸트의 규정 자체는 옳다고 하지만 이 규정은 별 쓸모가 없다. 어떤 것이 경험 가능한 대상인지 아닌지는 불변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사람의 뇌활동은 얼마 전까지만해도 경험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어떤 것이 경험 가능한지 아닌지는 당대의 과학에 의존한다. 라캉주의가 T가 아니라고 하기 위해서는 라캉주의의 내용 중 적어도 일부는 현대 과학에서 경험가능한 대상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과학의 개입을 허용한다. 주장2를 적용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라캉주의를 반박할 수 없다.
노정태님은 "나는 라캉주의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이라고 말하면서 라캉주의나 그와 유사한 온갖 반과학주의에 뒷문을 열어준다. "다른 학문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 그것은 뒷문이다. 우리는 그 문을 대못으로 두드려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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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7/09 14:37 | 트랙백(1) | 핑백(2) | 덧글(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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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칸트의 선험적 공간, 반과학주의와 반인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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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 가능성이 존재하는 다양한 잣대 중에서, 특정한 잣대의 타 잣대에 대한 우월적인 권위를, "서로의 잣대가 교집합(공통적으로 잣대가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을 이루는 범위가 아닌 영역에서, 주장"하는 것은 종교나 예술, 혹은 문학 같은 믿음의 영역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라 생각됩니다.
배타 우월적인 잣대의 타 잣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편입이라는, "대립하는 잣대들 간의 헤게모니의 문제"가 학문 간 개입의 층위가 아닌, 같은 학문의 범주에 속하는 입장 간의 비판의 층위에서도 생길 수도 있습니다. 개입"과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철학과 교수들은 인지과학이나 신경과학을 한번이라도 공부해봤을까? 고민의 답이 거기에 있을 지도 모르는데...'
이를테면 아이추판다 님께서 '기억에 대한 심리학 책 세 권'을 소개하시면서 '기억의 메타포'에 관해 "건조하기 짝이 없는 앤더슨의 책과 반대로 문학적 향취와 철학적 사색이 돋보인다"라는 소개를 적어 두셨습니다. 이 책 소개를 보고 바로 사서 읽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말씀하신 "철학적 사색"은 어떤 것인지 정도만이라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기억의 메타포"는 기억 이론들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이런 이론들에서 "메타포"의 역할을 살펴보는 책입니다. 쿤이 물리학사를 통해 패러다임의 역할을 얘기한다면 드라이스마는 심리학사를 통해 메타포의 역할을 얘기하죠. 이런 면에서 철학적이라고 한 겁니다.
지금 칸트의 공간에 대한 개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이츄판다님이 이 부분은 실수하신 건데..
(칸트의 공간개념은 노정태님의 해석이 정론입니다.
물론 아이츄판다님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걸 논문으로 주장하면 둘 중 하나입니다
칸트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거나
논문이 개재되지 못하고 학계에서 낙인 찍히거나..)
아이츄판다님은 이제 과학의 공간개념을 가지고 노정태님에게 반론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공간이냐? 이게 공간이지."
이제 문제는 "공간이란 무엇인가?"가 되었습니다
이거 물리학의 문제인가요? 철학의 문제인가요?
이때, 주의해야할 점은 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철학의 질문은 항상 이것이죠 '무엇인가?'
'공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의지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또 경험이란 무엇인가 등등등.'
이 질문은 이러저러한 속성을 묻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에게 물을 수 있는 가장 전면적인 질문입니다.(이 질문의 상위에 있는 질문이 있다면 '공간이 있냐?'겠습니다만, 이건 철학의 질문이 아닙니다. 철학은 있는 것에 대해서만 질문합니다)
물리학에서 제시하는 공간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론들이 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건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공간은 철학의 문제이자 물리학의 문제겠지요. 그러나 이 경우에도 철학의 입장에서 물리학의 공간 개념은 하나의 유력한 이론입니다. 닥치고 물리학의 공간! 그건 철학하지 말고 물리학 하라는 말이죠. 아이츄판다님의 주장은 이거시겠지만 이런 주장을 하시기 위해서는 당장 칸트의 공간 개념이 터무니없다는 점을 논박하셔야합니다. 그런데 이건 빼도박도 못하는 철학 논의가 되겠습니다.
저는 이 논쟁이 매우 쓸 모 없는 논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아는 영역이 한정되어 있고(아이츄판다님의 인문학적 풍부함이야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좀 실망입니다) 서로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이해할 뿐입니다. 논의의 지평이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당장 두 분이 생산적인 논의를 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서로 '경험'이라는 말의 의미를 확인하시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도대체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노정태님은 할 말 많으실 것이고, 아이츄판다님은 별로 하실 말씀 없을 겁니다. 과학에서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정된 개념일테니... (설마 과학에서 '경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가 아니라 '경험이 무엇인가'도 묻나요? 그렇다면 저의 무식함을 탓해주세요.)
철학으로부터 이러저러한 분과학문이 갈라져 나갔다는 말은 철학을 제대로 하려면 이러저러한 분과학문들의 성과를 진지하게, 무엇보다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공부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츄판다님이 쓰시는 형이상학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면에서 지극히 타당합니다. 그러나 이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노정태님이 제시하신대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에게서도 다른 의미로 쓰이고(물론 저는 그 둘이 양립가능한 개념이라 이해합니다만) 여러 철학자들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정의됩니다. 즉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책도 여러권 있습니다). 아이츄판다님이 단 하나의 의미로 그 말을 쓰시는 것은 상관 없는데(그게 틀린 것도 아니니까) 그 의미만이 옳다고 주장하시려면 논증을 하셔야합니다. 즉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빼도 박도 못하는 철학의 문제에 발을 담그셔야(에고 드러워!) 합니다.
아이추판다님/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참고문헌을 알려주실 수 있겠는지요.
그냥 아이추판다님 다른 글 보면 다 나왔으니 알아서 보라는 뜻이겠죠 -_-
물론 시간이 가고 지식이 축적되면서, '근본적 질문'의 경계도 불분명해지는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예를 들어) 철학/문학/예술의 하위분과... 기타 등등이 다루는 모든 개념이나 범주가 과학적 체계의 틀로 완벽히 설명 가능할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빈 서판>이나 <통섭>에서 엿볼 수 있는 호기로움(^^)을 달갑지 않게 생각합니다. 시기상조가 아닐까 싶어서요. 또한 과학적 체계라는 도구만으로 타 학문 분야를 구성하는 개념이나 체계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구요.
결국 인접하는 경계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각 분야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계에서 벌어지는 논의 역시 동일한 의미를 적용하지 않아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고... 때문에 어느 이상의 <개입>은 지적 차원에서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 역시 반과학주의적 생각일까요? 인문학도라고 자신하다가 갑자기 과학도의 처지가 된 입장에서 계속 고민하는 주제라 생각을 정리하기도 할 겸 적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