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9 01:25

기하학과 마음 이론 인지과학

반란과 찬탈에서 댓글 대화. parxisan님 말고 다른 분들도 궁금해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 따로 포스팅.

Commented by parxisan at 2009/07/08 23:15
2)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자연에 대한 탐구가 먼저"인 사례를 들어야 설득력이 있을 듯합니다. 형이상학은 제1철학이라고도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를 예로 든 것은 부적절해 보였습니다.

3-2) "인간이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질문을 하는지"를 "심리학적으로 검증"한 사례를 밝혀야 설득력이 있을 듯합니다. "뻥"인 예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듭니다.

Commented by 아이추판다 at 2009/07/08 23:35
2) 1)에서 언급한 역사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3-2) 인간이 신적 존재를 추구하는 것은 theory of mind의 부산물이라는 게 통설입니다.

Commented by parxisan at 2009/07/09 00:01
2) 제가 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혼자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3-2) 이것에 관해 배울 수 있는 책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칸트는 좌우가 경험적으로 구분될 수 없고 직관적으로만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공간은 경험에 앞서 주어져있어야 하며 따라서 선험철학의 주제라고 논증한다. 이 논증은 칸트 이후 수학을 억압하였다. 어느 정도냐하면 그 위대한 가우스도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연구를 비난이 두려워 발표하지 못할 정도였다. 가우스의 애제자 리만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한층 더 원숙하게 발전시켜 발표하지만 역시나 칸트를 추종하는 철학자들과 수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이후로 기하학은 경험에 앞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경험과 일치하는 것을 고르는 대상이 되고 철학이 아닌 물리학의 문제가 된다.

또, 칸트는 좌우가 경험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를 물리학 용어로는 홀짝성 대칭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대칭이 유지되지만, 1956년에 리와 양의 예측과 우 등의 실험으로 특정한 경우에는 홀짝성 대칭이 깨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리와 양은 1957년에 이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다시 말해 좌우는 경험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결국 칸트의 전제와 결론은 모두 물리학적으로 반박된 것이다.

물론 칸트야 자기가 죽은 다음에 수학이나 물리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고전역학의 근거를 다지려고 노력한 거지만 가우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결과적으로는 수학과 과학의 발전을 저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칸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칸트를 맹종한 철학자나 수학자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하긴 철학-과학의 문제가 아니라도 전통적 이론을 고수해서 과학발전의 장애물이 되고만 사례는 과학에도 널렸으니 이들도 꼭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09년에 공간은 선험철학의 주제라고 주장하면 반동이다.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은 특정한 이론이 아니라 다른 개체의 마음을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런 능력에 결손이 있는 경우가 자폐증이다. 인간에게 이 능력은 무척 민감해서 사람이 아닌 개나 소에게도 감정을 느낀다. 심지어 삼각형이나 원과 같은 단순한 도형만으로된 애니메이션을 봐도 '삼각형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개나 소는 몰라도 삼각형 한테 마음이 있을리가. 신에 대한 믿음도 이 능력의 부산물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심리학적, 뇌과학적 증거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물론 다른 종류의 메커니즘도 함께 작용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실 도킨스가 하는 짓도 좀 '뻘짓'이다. 심리학에 '모듈'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서로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마음의 각 부분을 말한다. 딴 얘기지만 이 개념을 제안한 제리 포더는 철학자다. 이런 사람보고 내가 뭐라고 하진 않는다. 하여간 모듈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예시로 많이 꼽는 게 뮐러-라이어 착시다.

믿거나 말거나 위 그림에서 두 수평선의 길이는 같다. 하지만 아래 쪽의 선이 더 길어보인다. 자를 대고 두 선의 길이를 재어보고 두 선의 길이가 같다는 걸 알고 난 뒤에도 이런 지각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눈으로 보고 선의 길이를 판단하는 능력과 자를 대고 두 선의 길이를 판단하는 능력은 서로 다른 모듈이어서 한 쪽이 다른 쪽의 작동 방식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보면 도킨스는 종교적 믿음에 자를 들이대면서 그런 거 없다고 설득하는 건데 이미 설득될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그다지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건 칸트도 마찬가지다. 노정태님은 칸트가 다 비판했고 도킨스는 뭘 모르는 소릴 하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칸트든 도킨스든 '비판'이라는 것 자체가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 모듈론말고 인지부조화 이론의 입장에서 봐도 근본주의자들에게 세속주의자들의 그런 '핍박'은 자기들 믿음에 대한 또다른 증거 밖에 안될 거다.

딴소리지만 그렇게 보면 나의 '비판'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라캉주의자들의 사고방식도 종교적 근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라서 설득할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특히 그 비판이 과학적이면 과학적일 수록 라캉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라캉주의의 늪에 아직 발을 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경고판 정도의 역할 뿐이다.

핑백

  • Null Model : 공간을 찾아서 2009-07-11 15:34:54 #

    ... 의 문제이기도 했으며 이제는 인지과학과 뇌과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가 우리의 출발점이다. 이제 어디로 가볼까? 저주받은 운명 (아이추판다) 철학이라는 동네북 (노정태님) 기하학과 마음 이론 (아이추판다) 칸트의 선험적 공간, 반과학주의와 반인문주의 (노정태님) ... more

덧글

  • Svinna 2009/07/09 03:16 # 삭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어떻게 공간의 선험성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지, 경험적으로 좌우를 구분할 수 없다는 칸트의 주장을 홀짝성 대칭이 깨지는 경우도 있다는 실험이 어떻게 반박하는지 이 두가지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 아름다운백수 2009/07/09 05:27 # 삭제

    신기하게도 이 글에선 불확실성은 운운하네요. 어떤 철학자는 물리학의 근본은 불확실성이라며 세상은 불확실하다고 하던데...ㅋㅋ
  • 漁夫 2009/07/09 08:52 #

    1.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상호 작용합니다. 관찰자가 관찰자에 대해 광속에 가깝게 움직이면 시간이 늘어나고 공간이 줄어드는 현상은 유명하며 검증이 돼 있습니다. 공간 수축은 현 수준에서 검증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시간 쪽은 소립자 수명을 검사하여 입증되었죠.
    2. Co60의 베타 붕괴에서 핵의 스핀 방향과 전자 방출 방향을 보면 '좌우 비대칭'임이 분명합니다. 이 현상을 거울에 비춰 보면 실제 상황과 다르니까요.
  • hama 2009/07/09 13:47 # 삭제

    웹을 뒤지다 보니 2페이지 짜리 요약이 있군요: http://frank.mtsu.edu/~rbombard/RB/PDFs/Kant01.pdf

    아인슈타인 이전에도 쌍곡기하학, 리만기하학 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있었고, 유클리드 기하학이 무모순이면 쌍곡기하학도 무모순이라는, 즉, 나름 정합적인 체계라는 류의 결과들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칸트 식으로 유클리드 기하가 우리 세계를 기술하는 선험적인 실재라면, 비유클리드 기하는 그냥 학문적 호기심 거리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이상한 나라를 하나 상상하고, 나름대로 규칙들을 상상하고, 시뮬레이션 한 판 때리는 것에 불과한.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적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이러고 나니 유클리드 기하가 선험적으로 주어졌다든가 하는 얘기는 더 이상 하기가 좀 쑥스럽죠. 우주의 대역적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었나, 이게 유한한가 무한한가 뭐 이런 문제들은 더 이상 사변의 대상이 아니라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관측의 대상입니다. 관측을 통해, 경험을 통해, '맞는' 기하학을 고를 수 있습니다.
  • jick 2009/07/09 11:44 # 삭제

    "리만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한층 더 원숙하게 발전시켜 발표하지만 역시나 칸트를 추종하는 철학자들과 수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라고 적으시니 마치 동료 수학자들이 리만기하학을 잘못된 학설이라고 비난한 것처럼 해석이 되는데 혹시 관련 레퍼런스가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그 앞의, 가우스가 무서워서 발표를 못했다는 부분도...)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다시 말해 좌우는 경험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니 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만약 초문명 외계인이 존재해서) 한 물리학자를 좌우대칭으로 바꿔버린 다음 우주공간에 떨어뜨려 놓으면, 그 물리학자가 CP 대칭성 실험을 돌려서 결과를 보고 "헉 내 좌우가 바뀌었군!" 하고 알 수 있다는 얘기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람의 "경험"을 통해 그걸 구분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니까요.
  • 아이추판다 2009/07/09 12:44 #

    1) 아주 유명한 이야기라 여기 저기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걸 들 수 있습니다. http://books.google.co.kr/books?id=R-qgdx2A5b0C&pg=PA263

    2) 네. '일상적 경험'으로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죠.
  • 漁夫 2009/07/09 12:32 #

    뭐 도킨스 공도 '이미 종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썼다고는... 그 정도로 종교에서 돌아선다면 '진정한 종교인'이라기가 좀... ^^;;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



검색

맞춤검색

메모장

야후 블로그 벳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