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7 23:51

저주받은 운명 인지과학

과학철학자들 중에는 과학의 역사가 조금만 다르게 흘렀더라면 지금의 과학은 우리가 알고있는 그런 형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다른 학문에도 모두 마찬가지다. 철학의 경우도 역사가 어찌어찌 흐르다보니 고대 철학의 하위 분과 몇몇이 '철학'이라는 간판을 물려받고 인문대의 철학과라는 제도로 자리잡았을 뿐이다. 역사의 요동이 다른 방향으로 굽이쳤다면 오늘날의 철학은 지금과 사뭇 다른 범위의 영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수학은 자연을 다루지도 않고, 경험에 근거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따져 자연과학이라고 볼 수 없다. mathematics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를 가리키는 '마테마티코이'에서 온 것이다. 플라톤이 아카데메이아에 기하학을 모르는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지금도 논리학이나 수학기초론은 철학과와 수학과 양쪽에서 다룬다. 역사가 어떻게 요동쳤다면 수학과가 인문대에 있거나 철학과와 나눠지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리학도 그렇다. 물리학은 고대의 '자연학'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자연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중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분야다. 철학의 고유한 주제라고 여겨지는 '형이상학'은 영어로 metaphysics인데 이것은 안드로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편집하면서 이들 주제를 자연학(physics)의 뒤에 배치한데서 유래했는데, 힐쉬베르거의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한 도서분류가 아니라 자연학에서 형이상학으로 나아가는 인식의 순서를 함의한다.

서양철학에서 '공간'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플라톤과 기하학의 얘기도 했지만 고대철학에서 공간 개념은 여러 철학을 구별하는 중요한 지표다.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였던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차이도 결국 공간과 운동의 문제다. 이것은 근대철학에서도 이어진다. 데카르트나 칸트는 말할 나위도 없다. 화이트헤드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철학자라면 누구나 공간에 대해 한 마디씩은 던졌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공간이라는 주제는 물리학이 철학을 제치고 공간에 대한 논의에 주도권을 쥐면서, 이제는 공간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위해서는 물리학적 논의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금 자연학이 형이상학을 인식의 순서에서 앞서게 된 것이다.

생물학이나 심리학도 빠질 수 없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저작 중에는 오늘날로 치면 물리학보다 생물학이나 심리학에 속하는 것이 더 많다. 생물학에 속하는 걸로는 "동물지", "동물부분론", "동물이 걸어다니는 것에 관해서", "동물의 운동에 관해서", "동물의 생식에 관해서", "오래 사는 것과 짧게 사는 것", "삶과 죽음", "호흡"이 있고 심리학에 속하는 것으로는 "영혼에 관해서", "감각과 감각의 대상", "기억과 회상", "잠과 깸", "꿈", "잠잘 때의 예지"가 있다. 이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할만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 학문은 인식론과 같은 근대철학의 핵심적 주제에서도 주도권을 넘겨 받았다.

칸트는, 정치적 현실은 중세나 다름없었던 프로이센에서, 선행하는 근대의 유산들 즉 인문주의적 학문 태도, 계몽주의의 이성중심주의, 프랑스 혁명의 인간 해방 등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하나의 체계로 수렴하려 한다. 그의 중심은 '인간'이고, 이는 다시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로 나뉘어진다. 칸트를 비롯한 피히테, 셸링, 헤겔 등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은 철학적 체계 구축을 시도했고 이는 철학사의 위대한 업적의 하나로 남아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그들의 철학적 체계는 파탄을 맞이하였고, 이제 인간의 인식에 대한 탐구는 심리학과 자연과학에,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책 추구는 사회과학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마크 C. 헨리, 강유원 외 편역, "인문학 스터디", 라티오, 77-78쪽.

이러한 일련의 변환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며,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본성적으로 철학적일 주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주제가 끝내 그렇게 남을지는 알 수 없다. 칸트는 자기가 무덤에 묻힌지 몇 년 못가서 수학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물리학자들이 왕위를 찬탈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주제가 철학적이라고 단정짓고, 전통적인 철학의 범주 안에만 가두려는 발상은 반동적일 수 있다. 오히려 필요한 태도는 우리 앞에 나타난 사태를 바닥까지 철저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근대철학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것처럼 해당 주제를 철학으로부터 독립하게 만들 것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태도가 철학의 종말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철학자들은 오이디푸스의 저주받은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핑백

  • Null Model : 공간을 찾아서 2009-07-11 15:34:54 #

    ... 기 중으로 사라진다. 칸트의 철학적 문제는 한때 물리학과 심리학의 문제이기도 했으며 이제는 인지과학과 뇌과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가 우리의 출발점이다. 이제 어디로 가볼까? 저주받은 운명 (아이추판다) 철학이라는 동네북 (노정태님) 기하학과 마음 이론 (아이추판다) 칸트의 선험적 공간, 반과학주의와 반인문주의 (노정태님) ... more

  • Null Model : 어떤 간극 2009-08-12 02:16:26 #

    ... 당 주제를 철학으로부터 독립하게 만들 것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태도가 철학의 종말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철학자들은 오이디푸스의 저주받은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저주받은 운명 문제는 '해석'이 아니라 '역사'인데, 19세기 상황에 대한 노정태님 자신의 요약(혹은 추측?)만으로도 내 얘기의 근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없다. 19세기 철학자들은 『순 ... more

  • Null Model : 보어와 칸트 2009-08-21 00:59:52 #

    ... 원래 저주받은 운명은 라캉주의자들처럼 증거가 없거나 증거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서도 이를 지적하면 "철학적 까임방지권"을 발동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여기서 19세기에 있었던 칸트 철 ... more

  • 노정태와 이택광의 ‘밥그릇 투쟁’ | Revolt Science via heterosis 2014-05-27 05:14:48 #

    ... 저주받은 운명</a>: 아이츄판다 철학이라는 동네북: 노정태 반란과 찬탈: 아이츄판다 &#8216;소녀시대의 생물학&#8217;을 써야 하고, &#8216;왜 다시 아나키인가&#8217;라는 글을 좀 올리려고 했더니, 또 이런 떡밥을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다.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이러한 논쟁이 내게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실은 내가 2003년부터 놀았던 곳을 추천하고, 그 곳에서 칸트 및 과학철학, 철학에 대한 인덱스 검색을 권유 ... more

  • 노정태와 이택광의 &#8216;밥그릇 투쟁&#8217; | Revolt Science via heterosis 2014-05-28 13:13:02 #

    ... 저주받은 운명</a>: 아이츄판다 철학이라는 동네북: 노정태 반란과 찬탈: 아이츄판다 &#8216;소녀시대의 생물학&#8217;을 써야 하고, &#8216;왜 다시 아나키인가&#8217;라는 글을 좀 올리려고 했더니, 또 이런 떡밥을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다.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이러한 논쟁이 내게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실은 내가 2003년부터 놀았던 곳을 추천하고, 그 곳에서 칸트 및 과학철학, 철학에 대한 인덱스 검색을 권유 ... more

덧글

  • Bloodstone 2009/07/08 00:05 #

    철학자들은 다른 학문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자기 학문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인지, 과학철학이라는 물건 자체가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 reske 2009/07/08 08:15 #

    일부의 완고한 철학자들은 다른 분과학문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상당히 분개하는 듯 -_-; 늘 이런말을 덧붙이죠. "늬들이 철학없이 잘할 수 있을것 같애? 이 철학도 없는놈들 같으니..;"
  • ExtraD 2009/07/08 12:02 #

    연구자의 종교관, 철학관 혹은 피부색과 출신에 관계없이 우주배경복사가 2.72K라는 사실을 차마 인정하지 못하는 일부 과학철학자의 논문을 읽을 필요 없이 우주론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이 과학철학의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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