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은 자연을 다루지도 않고, 경험에 근거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따져 자연과학이라고 볼 수 없다. mathematics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를 가리키는 '마테마티코이'에서 온 것이다. 플라톤이 아카데메이아에 기하학을 모르는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지금도 논리학이나 수학기초론은 철학과와 수학과 양쪽에서 다룬다. 역사가 어떻게 요동쳤다면 수학과가 인문대에 있거나 철학과와 나눠지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리학도 그렇다. 물리학은 고대의 '자연학'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자연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중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분야다. 철학의 고유한 주제라고 여겨지는 '형이상학'은 영어로 metaphysics인데 이것은 안드로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편집하면서 이들 주제를 자연학(physics)의 뒤에 배치한데서 유래했는데, 힐쉬베르거의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한 도서분류가 아니라 자연학에서 형이상학으로 나아가는 인식의 순서를 함의한다.
서양철학에서 '공간'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플라톤과 기하학의 얘기도 했지만 고대철학에서 공간 개념은 여러 철학을 구별하는 중요한 지표다.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였던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차이도 결국 공간과 운동의 문제다. 이것은 근대철학에서도 이어진다. 데카르트나 칸트는 말할 나위도 없다. 화이트헤드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철학자라면 누구나 공간에 대해 한 마디씩은 던졌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공간이라는 주제는 물리학이 철학을 제치고 공간에 대한 논의에 주도권을 쥐면서, 이제는 공간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위해서는 물리학적 논의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금 자연학이 형이상학을 인식의 순서에서 앞서게 된 것이다.
생물학이나 심리학도 빠질 수 없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저작 중에는 오늘날로 치면 물리학보다 생물학이나 심리학에 속하는 것이 더 많다. 생물학에 속하는 걸로는 "동물지", "동물부분론", "동물이 걸어다니는 것에 관해서", "동물의 운동에 관해서", "동물의 생식에 관해서", "오래 사는 것과 짧게 사는 것", "삶과 죽음", "호흡"이 있고 심리학에 속하는 것으로는 "영혼에 관해서", "감각과 감각의 대상", "기억과 회상", "잠과 깸", "꿈", "잠잘 때의 예지"가 있다. 이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할만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 학문은 인식론과 같은 근대철학의 핵심적 주제에서도 주도권을 넘겨 받았다.
마크 C. 헨리, 강유원 외 편역, "인문학 스터디", 라티오, 77-78쪽.
이러한 일련의 변환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며,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본성적으로 철학적일 주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주제가 끝내 그렇게 남을지는 알 수 없다. 칸트는 자기가 무덤에 묻힌지 몇 년 못가서 수학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물리학자들이 왕위를 찬탈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주제가 철학적이라고 단정짓고, 전통적인 철학의 범주 안에만 가두려는 발상은 반동적일 수 있다. 오히려 필요한 태도는 우리 앞에 나타난 사태를 바닥까지 철저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근대철학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것처럼 해당 주제를 철학으로부터 독립하게 만들 것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태도가 철학의 종말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철학자들은 오이디푸스의 저주받은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덧글
그래서인지, 과학철학이라는 물건 자체가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