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16일
언어에 대한 심오한 이해?
얼마 전에 언어는 마음을 결정한다?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Commented by 바람길 at 2009/06/08 06:34
언어학-문학 관련 전공자입니다만,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결정한다"라는 말에 대해서 너무 표층적으로 이해해서 말씀하시는건 아닌가 싶군요. 지금까지 언급하신 내용들은 언어가 아니면 무엇을 통해서 사고한 것인지도 궁금하고요.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건 어휘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닌, 언어가 만들어내는 체계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는게 좀 더 제대로 이해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어떤 개념이나 사물을 지칭하는 언어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재 언어로 존재하는 다른 개념이나 사물들과의 차이에 의해 그 개념이나 사물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도 결국 언어의 체계에의해 사고하게 되는 것이 되겠죠.
일반적으로 이런 쪽에서 언급되는 언어란, 단순한 어휘들이 아닌, 윗 분 말대로 차이에 의해 나타나는 어떤 체계를 지칭하는 말인거죠. 아이추판다님은 이 언어에 대한 인식을 언어가 표면적으로 갖는 어휘 등에만 한정해서 사용하셨는데, 이런 논의를해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언어 자체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할듯합니다.
아, 그리고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말을 언어학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건 어디에서 누가 그렇게 언급한건가요. 현대 언어학자중에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캐매장당할텐데...
생각은 언어로 하는 게 아니다. 뇌로 하는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들도 상당히 복잡한 판단을 하지만, 똑똑한 사람도 머리를 다치면 바보가 된다. 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병렬분산처리(parallel distributed processing)다. "개가 사람을 문다"라는 말에는 '개', '사람'과 같은 기호가 순서대로 나타난다. 만약 이 문장에서 한 부분, 예를 들어 '사람'을 지워버리면 개가 뭘 물었는지 알 수가 없다. 똑같이 직렬 처리를 하는 컴퓨터도 프로그램에서 한 부분을 잘라내면 작동을 멈춘다. 그러나 사람의 뇌에서는 여러 개념이 뉴런들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패턴 속에서 동시에 처리되기 때문에 이 네트워크의 일부가 손상되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래서 알츠하이머 같은 퇴행성 질환에 걸려도 초기에는 일상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는 것이다. 전체적인 패턴이 유지되는 이상 뇌의 기능은 그대로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아한 퇴행(graceful degradation)'이라 한다. 물론 신경망이 심하게 파괴되면 이런 패턴도 더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냥 에러 내고 멈춰버리는 컴퓨터와 달리 뇌는 비록 전혀 다른 방식이지만 계속 작동을 한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진 않더라도 도움을 주거나 방해를 하는 형태로 영향을 줄 수는 있다. 색 지각의 경우에 이를 입증하는 여러 가지 실험이 이뤄졌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에서는 영어나 한국어와 달리 밝은 파랑과 어두운 파랑을 다른 단어로 나타내고, 파랑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다. 그래서 실험을 해보면 러시아어 화자는 영어 화자나 한국어 화자보다 밝은 파랑과 어두운 파랑을 좀 더 빨리 구별한다. Siok 등 (2009)의 논문에 나온 실험 하나를 보자.
위의 그림을 보자. G1과 G2는 모두 영어에서 "green"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색이고, B1과 B2는 "blue"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색이다. 컴퓨터 화면에 위의 그림 오른쪽과 같이 모두 똑같은 색의 네모를 둥그렇게 배열하고 1,2,3,4 중에 한 위치에만 다른 색의 네모를 표시한다고 해보자. 사람들에게 다른 색 네모가 왼쪽(1 또는 2)에 나타났는지 오른쪽(3 또는 4)에 나타났는지 버튼을 눌러 대답하게 해보면 영어로 똑같이 초록(green)인 G1, G2나 똑같이 파랑(blue)인 B1, B2의 경우보다 G2, B1의 경우에 더 빨리 버튼을 누른다.
위의 그래프는 그 실험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Between-category는 다른 범주의 색, 즉 초록(G2)과 파랑(B1)을 구별하는 경우다. Within-category는 같은 범주의 색, 즉 같은 초록인 G1과 G2 또는 같은 파랑인 B1과 B2를 구별하는 경우다. 화면에 그림이 나타난 순간부터 버튼을 누르는데 걸리는 평균적인 시간은 다른 범주의 경우 468.80밀리초, 같은 범주의 경우는 507.89밀리초가 걸렸다. 평균적으로 거의 40밀리초나 빠른 것이다. 밀리초는 1000분의 1초로 40밀리초는 0.04초다. 너무 큰 차이라 손발이 다 오그라든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에 이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는 어마어마한 무엇이 아니라 뇌의 일부분이 담당하는 기능이다. 90%의 사람들은 좌뇌에서 언어를 처리한다. 그런데 왼쪽 시야에 비친 영상은 우뇌, 오른쪽 시야에 비친 영상은 좌뇌에서 처리한다. 따라서 오른쪽 시야에 비친 영상은 언어의 도움을 받기가 좀 더 쉽다. 위의 그래프에서 LVF((Left Visual Field)와 RVF(Right Visual Field)는 각각 시야의 왼쪽과 오른쪽을 가리킨다. 다른 범주의 경우에는 오른쪽 시야가 좀 더 빠르다. 같은 범주의 경우에도 오른쪽 시야가 좀 더 빠르지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다. 이 실험과 동시에 fMRI로 촬영한 뇌영상에서도 시각 영역의 반응이 다른 언어 관련 영역의 반응에 동반해서 강화되는 것이 관찰된다.
이런 실험 결과는 소박한 언어결정론과 실제로 과학적으로 연구된 사고와 언어의 관계가 안드로메다만큼 멀리 떨어져있다는 걸 보여준다. 색은 결국 후두엽의 시각영역이 구별하는 것이다. 좌뇌 측두엽과 전두엽에 퍼져있는 언어 관련 영역들은 시각 영역을 도울 수는 있지만 그건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우뇌의 경우엔 별 도움이 안된다. 그것 뿐이다.
이 정도가 현재의 과학계에서 사피어-워프 가설에 대한 최대한 우호적인 연구다. 엄격히 따지면 워프 가설하고는 별로 상관도 없다. 굳이 언어가 아니라도 저런 식으로 한 영역이 다른 영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밝은 초록을 보여줄 때마다 전기 충격이라도 준다면 밝은 초록과 어두운 초록을 귀신같이 빠르게 구별하겠지만 그렇다고 전기 충격이 사고를 결정하는 건 아니다.
언어는 마음을 결정한다?는 학부 교과서 수준의 내용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교과서 수준의 이해도 없는 사람들이 무려 '언어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자처하면서 댓글을 달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갑갑하다.
참고 문헌
Siok, W. T. et al. (2009). Language regions of brain are operative in color perception. PNAS, 106(20), 8140-8145.
언어학-문학 관련 전공자입니다만,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결정한다"라는 말에 대해서 너무 표층적으로 이해해서 말씀하시는건 아닌가 싶군요. 지금까지 언급하신 내용들은 언어가 아니면 무엇을 통해서 사고한 것인지도 궁금하고요.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건 어휘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닌, 언어가 만들어내는 체계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는게 좀 더 제대로 이해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어떤 개념이나 사물을 지칭하는 언어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재 언어로 존재하는 다른 개념이나 사물들과의 차이에 의해 그 개념이나 사물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도 결국 언어의 체계에의해 사고하게 되는 것이 되겠죠.
일반적으로 이런 쪽에서 언급되는 언어란, 단순한 어휘들이 아닌, 윗 분 말대로 차이에 의해 나타나는 어떤 체계를 지칭하는 말인거죠. 아이추판다님은 이 언어에 대한 인식을 언어가 표면적으로 갖는 어휘 등에만 한정해서 사용하셨는데, 이런 논의를해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언어 자체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할듯합니다.
아, 그리고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말을 언어학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건 어디에서 누가 그렇게 언급한건가요. 현대 언어학자중에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캐매장당할텐데...
생각은 언어로 하는 게 아니다. 뇌로 하는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들도 상당히 복잡한 판단을 하지만, 똑똑한 사람도 머리를 다치면 바보가 된다. 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병렬분산처리(parallel distributed processing)다. "개가 사람을 문다"라는 말에는 '개', '사람'과 같은 기호가 순서대로 나타난다. 만약 이 문장에서 한 부분, 예를 들어 '사람'을 지워버리면 개가 뭘 물었는지 알 수가 없다. 똑같이 직렬 처리를 하는 컴퓨터도 프로그램에서 한 부분을 잘라내면 작동을 멈춘다. 그러나 사람의 뇌에서는 여러 개념이 뉴런들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패턴 속에서 동시에 처리되기 때문에 이 네트워크의 일부가 손상되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래서 알츠하이머 같은 퇴행성 질환에 걸려도 초기에는 일상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는 것이다. 전체적인 패턴이 유지되는 이상 뇌의 기능은 그대로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아한 퇴행(graceful degradation)'이라 한다. 물론 신경망이 심하게 파괴되면 이런 패턴도 더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냥 에러 내고 멈춰버리는 컴퓨터와 달리 뇌는 비록 전혀 다른 방식이지만 계속 작동을 한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진 않더라도 도움을 주거나 방해를 하는 형태로 영향을 줄 수는 있다. 색 지각의 경우에 이를 입증하는 여러 가지 실험이 이뤄졌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에서는 영어나 한국어와 달리 밝은 파랑과 어두운 파랑을 다른 단어로 나타내고, 파랑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다. 그래서 실험을 해보면 러시아어 화자는 영어 화자나 한국어 화자보다 밝은 파랑과 어두운 파랑을 좀 더 빨리 구별한다. Siok 등 (2009)의 논문에 나온 실험 하나를 보자.


현대적 관점에서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는 어마어마한 무엇이 아니라 뇌의 일부분이 담당하는 기능이다. 90%의 사람들은 좌뇌에서 언어를 처리한다. 그런데 왼쪽 시야에 비친 영상은 우뇌, 오른쪽 시야에 비친 영상은 좌뇌에서 처리한다. 따라서 오른쪽 시야에 비친 영상은 언어의 도움을 받기가 좀 더 쉽다. 위의 그래프에서 LVF((Left Visual Field)와 RVF(Right Visual Field)는 각각 시야의 왼쪽과 오른쪽을 가리킨다. 다른 범주의 경우에는 오른쪽 시야가 좀 더 빠르다. 같은 범주의 경우에도 오른쪽 시야가 좀 더 빠르지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다. 이 실험과 동시에 fMRI로 촬영한 뇌영상에서도 시각 영역의 반응이 다른 언어 관련 영역의 반응에 동반해서 강화되는 것이 관찰된다.
이런 실험 결과는 소박한 언어결정론과 실제로 과학적으로 연구된 사고와 언어의 관계가 안드로메다만큼 멀리 떨어져있다는 걸 보여준다. 색은 결국 후두엽의 시각영역이 구별하는 것이다. 좌뇌 측두엽과 전두엽에 퍼져있는 언어 관련 영역들은 시각 영역을 도울 수는 있지만 그건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우뇌의 경우엔 별 도움이 안된다. 그것 뿐이다.
이 정도가 현재의 과학계에서 사피어-워프 가설에 대한 최대한 우호적인 연구다. 엄격히 따지면 워프 가설하고는 별로 상관도 없다. 굳이 언어가 아니라도 저런 식으로 한 영역이 다른 영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밝은 초록을 보여줄 때마다 전기 충격이라도 준다면 밝은 초록과 어두운 초록을 귀신같이 빠르게 구별하겠지만 그렇다고 전기 충격이 사고를 결정하는 건 아니다.
언어는 마음을 결정한다?는 학부 교과서 수준의 내용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교과서 수준의 이해도 없는 사람들이 무려 '언어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자처하면서 댓글을 달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갑갑하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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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6/16 23:40 | 인지과학 | 트랙백 | 핑백(2)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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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외에 영어권 아이들은 명사를 먼저 많이 배우고 한국어를 하는 아이들은 동사를 먼저 많이 배워서 장난감 분류하기 같은 것은 영어를 하는 애들이 먼저 더 잘하고 도구를 사용하기 같은 것은 한국어를 하는 애들이 먼저 더 잘한다는 (하지만 결국 언어가 더 발달하면서 서로 따라잡는) 연구도 (최순자라는 분의) 있지요.
그 외에 그 언어에서 시간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공간적인 이미지가 추가된다거나 (수평적으로 왼쪽 오른쪽 -전후-, 수직적으로 상하..).. 뭐 그런 연구들이 더러 있습니다.
언어는 사고를 제약한다 (o)
정도로 믿고 있습니다. 비전문가라 깊은 사유를 해본것은 아니지만,
언어가 사고에 꽤 심하게 영향을 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한 수준으로 사고를 제약해서 곤란함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많은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어가 사고를 완전히 제한하지는 못하죠. 깊은 사색이나 다양한 인지도구의 힘을 빌려서 그 제약을 극복할수 있고 그로인해 새로움 개념, 더 나아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얻게 되고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기도 하는것 같습니다. 사고가 언어를 변화시키는 한가지 예 이겠지요.
마치, "교통신호는 차의 움직임을 결정한다!" 하니까 "신호등 없는 운동장에서도 액셀 밟으면 차 잘 나가거든?" 하는 문답을 보는 기분인데요.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