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23 15:22

라캉주의자들과 창조론자들 유사학문

라캉주의자들과 조중동에 달린 라임님의 댓글

라캉 관련 담론을 얼마나 접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캉이 주로 인문학 담론 내에서 다뤄지고 있는 것은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데 라캉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죠. 아이추판다님은 라캉이 "과학적으로 대답되어야 할 영역"에 끼어든다고 적으셨는데, 적어도 이 진술은 마음에 대해서 과학의 진술만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상을 남깁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라캉의 이론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인문학적 사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원칙적으로 하나의 사태에 대해 무한히 많은 설명을 내놓을 수 있다"면 인문학이 자기 나름의 전통 속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처음부터 과학적 방법론이 적용될 수 없는 영역에 해당하는 경우고, 또 하나는 당장 현재 가지고 있는 수준의 과학으로는 이렇다할 대답을 내놓을 수 없는 경우다. 많은 사람들이 후자의 경우를 전자의 경우로 오인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FOX  TV 인터뷰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전체 동영상은 여기 (주의: 복장이 터질 수 있음).


이 동영상에서 빌 오라일리(진행자)가 보여주는 태도는 라캉주의자나 또는 라캉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와 정확히 똑같다.

굉장히 러프하게 말하면 과학으로 뇌 속을 뒤져본다 한들 뭐가 의식이고 뭐가 무의식인지가 나오는 건 아니거든요.

- 하늘빛마야님의 쪼가리 : 딱히 끼어들 생각은 없었거늘에 한윤형님이 단 댓글

바로 이런 병리적 상태는 MRI로 나타나지 않으니, 주인공이 쓰고 있는 언어와 과학과 맺는 위상학적 태도속에 주인장의 강박증을 드러내는건 정신분석의 몫이다.

- 과학은 썩은 상자인가에 '알튀세'가 단 댓글

이들의 문제점은 두 가지다. 첫째, 모든 마음의 상태는 그에 대응하는 두뇌의 상태를 가진다. 이건 심리철학의 ABC다. 역시나 이들이 즐겨하는 표현법을 빌리자면 "김재권만 읽었어도 알 것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에게 마음에 대한 완전한 이론과 뇌에 대한 완전한 관찰 수단이 주어진다면 뇌를 뒤져보면 뭐가 의식인지 뭐가 무의식인지 알 수 있다. 물론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르는 게 많고 관찰 수단도 허접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참고: 뇌 영상에서 시각 영상을) 이것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는 것은 100년이나 200년 후에는 우스개소리가 될 것이다.

둘째, 라캉주의자들과 조중동에서 예로든 "안드로메다에 사는 외계인의 화장실 사용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수백광년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우주선이 주어진다면 안드로메다에 가서 확인해볼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철학적 문제로 돌변하지는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마음과 뇌에 대한 이해가 일천하다고 해서 이것이 철학적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나는 라캉을 옹호하기 위해 과학철학을 서슴없이 빌려오는 사람들을 보면 좀 의아한게 이들은 과학철학의 자매분과라고 할 수있는 심리철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심리철학자들은 그야말로 '메타'적 문제에만 집중하지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심리학, 뇌과학, 인지과학 등의 결과에 의존한다. 이런 것이 올바른 학문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의 문제는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 대한 설명을 근거없이 주장한다는 데 있다.

다시 라임님의 댓글로 돌아가자. 라임님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우선 이것이다. 하나의 사태에 대해 무한히 많은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은 이런 설명들이 모두 가치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추판다가 블로그를 쓰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지구상에 있는 모든 책을 채울만큼의 설명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인문학이 그런 종류의 활동이라면 그건 그냥 종이 낭비 밖에 안된다.

또, 내가 라캉주의자에게 맞은 적이 있어서 원한을 품고 라캉을 공격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설명이지만 나는 라캉주의자에게 맞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무가치하다. 인문학이든 과학이든 모든 학문은 수 많은 설명 중에 더 나은 설명을 고르는 과정이다. 만약 그런 과정이 없다면 그건 학문이 아니다.

내가 라캉주의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마음에 대한 수많은 존재가능한 설명들 대신에 라캉의 설명을 취해야할 이유를 대라는 것이다. 상상계-상징계-실재의 구도를 밝혀낸 라캉의 공적 운운하기 전에 그 구도가 어떻게 도출되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게 필요없다면 나도 당장 그런 구도 100만개는 만들 수 있다. 그럼 아이추판다가 라캉보다 100만배 더 위대하다고 인정해줄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라캉이 과학이 아니고 철학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종류의 근거가 필요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대지 않는 이유는 개별 분과학문에서 이미 그러한 과정을 거쳐 올라온 내용을 바탕으로 논지를 전개하기 때문이지 '철학'이라는 타이틀이 무슨 '무료통행증'이기 때문이 아니다. 라캉은 개별 분과학문에서 검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도 않고, 그걸 인용할 때도 자의적으로 변형시킨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입증책임은 온전히 그와 그의 추종들에게 돌아간다.

둘째, 라캉이 철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라캉이 다루는 마음에 대한 내용은 대단히 구체적인 수준의 내용이다. 다시 말해 철학에서 다룰 수준의 얘기들이 아니다. 라캉주의자들은 라캉을 통해 인간의 구체적 행동을 설명하고 예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심리학에서 하는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 분석 수준에서 라캉주의는 심리학과 전혀 다른 층위를 갖지 않는다. 그런데 라캉주의가 철학이 되고 심리학은 과학이 된다면 우리는 동일한 영역에 동일한 수준의 분석에 대해 전혀 다른 두 가지 답을 가지게 된다.

종종 인문학 전공자들은 "답이 다양하면 좋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여러 가지 관점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이런 여러 가지 관점이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성차는 존재하는가? 또 존재한다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내어놓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정책적 의사결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에 "성차는 존재한다"라는 답과 "성차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답을 다양한 관점으로 모두 포용할 수는 없다.

게다가 더 문제는 라캉주의자들은 이렇게 구체적인 충돌이 발생할 경우에 서슴없이 과학을 버리고 라캉을 선택한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성차 문제에 대한 그들의 논의를 읽어보면 경험적인 근거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다. 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를 몇몇 사람들의 독단에 맹종하려고 하는 이런 무모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라임님은 국내에 라캉주의적 임상을 수행하는 사람이 한 명 밖에 없고 그나마도 개인적 친분의 범위에 국한되기 때문에 윤리적 단죄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적 제한 때문이지 그들 자신의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런 논의를 연장하면 라캉을 어떤 종류의 실천적 영역에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이 결론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라캉과 같은 그런 것들을 인문학으로 포함시킨다면 우리는 인문학을 현실과 무관한 독단적 논의들의 모음으로 격하시키고 그 실천성을 거세해야 한다. 과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을 인문학에 포용할만한 가치가 있을까?

핑백

  • Null Model : 라캉, 과학, 철학 관련글 목록 2009-02-19 19:32:24 #

    ... 년전대화와 존중인문학적 제어론 (2)아기들의 시야 : 라캉의 거울단계에 대해18개월한 편의 만담 : 라캉의 인용생의학/보건 저널인 Medline때려달라면라캉주의자들과 조중동라캉주의자들과 창조론자들전기장의 신호라캉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것서로를 바보로 만드는 짓거리 ... more

덧글

  • dPIN 2009/01/23 16:36 # 삭제

    안드로메다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라깡주의자들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이유는 아래같은 분들이 있어서이지 않을까요?

    "정신분석이 치료 효과가 없느니 어쩌니 하는 영양가 전혀 없는 주장은 저기 안드로메다에나 가서 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현장에 대해서 개뿔도 모르는 학생들은 쓸데없는 논쟁을 할 시간에 공부나 더 열심히 하세요 (http://walden3.kr/1211)"

    라캉은 아니지만 비슷한 맥락으로는, 예전 여기 밑에 어느 분께서 댓글을 달아주셔서 읽은 글인데, 한 정신과 교수께서 쓴 "21세기의 정신분석, 과학인가 철학인가?"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Board=0003&para1=35&id=53&BackLink=L3N0eWxlMC9jb250ZW50cy9zZWFyY2hfMDEucGhwP2tleXdvcmQ9x8/B9sf2JlBhZ2U9MQ==
    (요약하면, "고로 우리는 겸손해야죠. 겸허하게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 월덴지기 2009/01/23 23:17 # 삭제

    동감입니다. 현장을 제대로 모르는 분은 님같은 분은 겸허하게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고백해야죠. 사실 고백보다는 열심히 공부를 하고 현장에서 일을 해 주셨으면 더 좋겠지만요.
  • 남의 블로그에서 2009/01/24 19:56 # 삭제

    블로그 주인과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끼리 서로 핥아주기를 하고 있는데 대체 이게 뭔 추태랍니까.
    애널썩킹은 님들 블로그 가서 하시지요? 부끄럽지도 않나 ㅉㅉ
  • dPIN 2009/01/25 00:53 # 삭제

    바로 위의 제 댓글은 지웠습니다. 괜히 관계없는 월덴지기께 피해가 갔다면 그분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 √3! 2009/01/23 20:21 # 삭제

    제가 늘 라캉논쟁을 읽으면서 헷갈렸던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 thomist 2009/01/23 21:02 # 삭제

    dPIN//제가 링크 건 것은,라캉 옹호 맥락과는 다른데요.오히려 분파와 관계 없는 합리적인 현대 분석가들의 활동이라도 봐야 할 것입니다.아이추판다 님의 비판은 라캉의 상상계의 인용윤리와 그 내용의 타당성 여부로부터 시작인 것 같고요.라캉 까는게 라캉 버전의 정신분석이 까이는 것이지 정신분석 자체가 까이는게 아닙니다.그렇게들 많이 오해하시는 듯.
  • dPIN 2009/01/23 22:00 # 삭제

    아이추판다님은 라캉을 비롯해, 더 나아가 정신분석 자체를 까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좋은 글을 링크 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dPIN 2009/01/24 14:14 # 삭제

    11// 라캉만 깠으면 그나마 나았겠죠.
    http://nullmodel.egloos.com/1725695
  • dPIN 2009/01/25 00:56 # 삭제

    11// 아이추판다님은 "정신분석은 무능하다"라고 주장하고 있고 이것이 이곳의 "전제"이기에 제가 라캉과 더불어 정신분석 자체를 까고 있다고 한 겁니다.

    오해하실수 있는게, 저 링크의 글 중 "경험적 연구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정신역동적 접근법의 치료 효과는 결코 다른 접근법보다 높지 않다."는 단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문장은 아이추판다님의 "이것이 치료효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정신분석학은 "관심은 있지만 실제로는 못하는" 무능한 관심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하는 조건과 연결이 되어 정신분석은 "무능"이라고 결론내리는데 명제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이추판다님이 내려버린 이 결론은 다음의 "심리학에서 정신분석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정신분석학이 보여준 치료효과에 비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신분석학 스스로의 무능탓이지 남탓이 아니다.라는 문장과 내용상 연결이 되어 있고, 더 나아가 이 블로그에 나오는 내용 전반에 흐르고 있는 "전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 무능에 대한 반론인 "21세기의 정신분석, 과학인가 철학인가?"의 글을 링크건 것이고요.

    위의 월덴지기님 밑에 단 댓글이 거북하다면 지우지요. 관계없는 그분께 피해가 갔다면 죄송할 따름입니다.
  • ㅎㅎ 2009/01/23 21:32 # 삭제

    그들의 생각은 '과학'의 핵심이 어떤 방법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루는 '대상'(비인간적, 물질적, 유물론적, 기계적, 물리적, ..)으로 규정된다는 편견을 갖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인간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처럼 보)이고 인문학적이고(ㅋㅋ) ... 이런 것들의 '성역'을 '감히' 침범한다고 생각하는 듯. 정도가 심해지면 답이 없다능..
  • 베른카스텔 2009/01/23 21:35 # 삭제

    과학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를 인식하는 기준인 "사실 설명의 욕구"를 가장 잘 충족하는 학문이기에 인간을 다루는 사상은 반드시 과학에 기반해야만 그 정합성을 인정받을 수 있으며, 과학에서 벗어나 불가지의 진리를 다룬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현실적인 과학 사실의 영역에서 태동한 구조적 한계를 애써 부정하고 이론적 철학 진리의 영역을 자신이 인식할 수 있다 고집하는, 욕망의 덩어리에 불과하기에 고상한 철학놀음의 장난감은 될지언정 결코 진지하게 다룰 만한 것은 아닙니다. 창조론은 보편적인 인식을 이루지 못하기에 사실이 아니며 절대적인 인식을 이루지 못하기에 진리가 아니며 분화적인 인식을 이루기에 한낱 이념에 불과한데, 소위 라캉의 사상이라는 것도 같은 분류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아이군 2009/01/23 23:14 #

    http://sonnet.egloos.com/2064627

    이쪽으로 슬슬 가고 있다는 생각이...

    제가 생각하는 넓은 의미의 과학은
    '키워질의 규칙에 대한 교본'
    정도 쯤 됩니다.

    누구 말이 맞다 혹은 틀리다, 라는 것을 판정 받을려면 과학적 방법론의 잣대를 들이 댈 수 밖에 없죠.

    라캉님하가 어떻게 생각하는거야 그 사람 마음이지만, 내 말이 맞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과학적 키워 파이팅의 아레나에 발을 놓은 거죠...
  • 준식이 2009/01/23 23:19 # 삭제

    베른카스텔 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누가 좀 풀어서 설명해주세요-_- 너무 어렵네요.

    아이추판다 님 말씀은 데카르트가 송과선 운운한 거 까는 거랑 같은 거 아닌가요? 인문학적 논의를 펼치는데 필요하다고해서 없는 것도 막 만들어내고 그러면 신학이랑 똑같은 거 아닌가요?
  • 알튀세 2009/01/24 02:19 # 삭제

  • Rudy 2009/01/24 05:30 #

    제 생각으로는 인간과 접촉이 없이 자라는 인간에게 역시 편집증이나 강박증이 얼마든지 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이거 사고 실험이죠?) 그에게도 사회적이지 않은 외부적 스트레스는 얼마든지 존재하거든요. 음식의 부족, 자연 재해, 동물의 공격, 혹은 동물과의 인터액션과 같은 외부의 압박하는 요인이 얼마든지 존재하고 그것이 파라노이아나 편집증을 얼마든지 유발할 수 있을 겁니다.
    알튀세님 지금 인간의 보편성 자체가 언어적이라는 한 철학 사조에 기반해서 상황을 너무 끼워맞추시는 건 아닌지요.
  • 지나가다 2009/01/24 08:54 # 삭제

    모든 마음의 상태는 그에 대응하는 두뇌의 상태를 가진다.
    이 명제는 마치, 보존에 대한 물리학의 태도 만큼이나 교조적이죠. 그럼에도 라캉을 쫓아내기 위해선 다른 논지, 측정량과 도구의 개념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생각해 봐도 좋을듯 합니다. 평소 님의 논지에 동의해 왔습니다만, 이번 글은 라캉에 대한 히스테리적 반응이 지나쳐 쓸데없는 것까지 디펜스 영역에 포함시킨듯 하네요.
  • ㅇㅇㅇ 2009/01/24 10:50 # 삭제

    알튀세님은 정말 이 동영상의 전행자와 같은 느낌이 드네요. 전형적인 라캉주의자?
  • 준식이 2009/01/24 11:32 # 삭제

    알튀세님 말하는 투가 '나는 공부 많이한 재야의 고수임. 님들 모르면 알아서 기셈ㄲㄲ 아이추판다 저거 사실 허접임' 이런 식이네요-ㅅ-
  • 베른카스텔 2009/01/24 14:35 # 삭제

    물리 구조에서 만들어진 인간의 욕구가 물리 구조를 인식하며, 그 인식의 결과가 보편적인 인식이면 사실, 절대적인 인식이면 진리, 분화적인 인식이면 분화적 인식을 가진 개인에게는 사실과 상동하는 레벨의 이념이 됩니다. 물리 구조와 인간의 욕구는 불가분의 상동 융합체를 이루어 변화무쌍합니다. 구조-욕구 융합체 내의 세계는 인간의 욕구로서 인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사실 영역이며, 구조-욕구 융합체 외의 세계는 -인간은 욕구 그 자체이며, 구조 그 자체인 욕구가 구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이유로 인간의 인식 체계로는 결코 인식될 수 없으며, 그 존재여부마저도 원칙적으로는 불투명한 이론적 진리의 영역입니다. 정신분석의 문제는 바로, 인간이 실존을 자각하는 기틀인 -정합 정상 반응에 대한 기대 심리-의 인식 체계를 벗어난, 구조 욕구 융합체 외의 세계인 이론적 진리의 영역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학문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주체의 사실 인식 체계를 벗어난 개념을 사용하는 사상은 논증이 불가합니다. 그렇기에 합리적 반박을 통한 발전의 여지가 없고, 해석자의 경험적 사변에 상당부분 의지하기에 보편 이론을 세울 수 없으므로 인간의 문법으로 완전히 해석될 수가 없으며 해석자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그 현상의 관측이 달라지기에 준종교의 특성을 가지게 됩니다. 정신분석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베른카스텔 2009/01/24 16:55 # 삭제

    제가 정의하는 구조 욕구 융합체의 개념에서 굳이 생물학적 개념으로서의 욕구이니, 라캉이 이르는 욕망이니를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구조에서 태동하는 욕구란,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 자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마음이 구조를 바꾸려는 실체적인 의지로의 양적인 표출이든, 구조가 욕구를 구성하는 자아에게 줄 수 있는 어떤 의지에의 음적인 영향이든 상관 없습니다. 언어 또한 구조의 일부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언어를 매개로 자기 방어 기제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구조에 대한 욕구 반응의 전형적인 실례입니다. 생물학적이니, 언어이니, 문명이니하는 것을 애써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저의 논법에서는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어차피 구조의 일부로 묶고 있기에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니까요.

    인간의 인식 자체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고, 욕구의 충족을 통한 정상 정합 반응의 인식이야말로 진정한 합리라는 것입니다. 주체의 사실 인식 체계를 벗어난 개념을 사용하는 사상이란, 욕구의 충족을 통해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입장이면서도 마치 자기 자신만은 그 입장을 뛰어 넘은 초월자인마냥 착각하는 태도가 그릇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고자 적은 말입니다.

    알튀세님은 마치 제가 주장하는 주체의 사실 인식 체계라는 개념은 통념적으로 완전히 비합리적, 그리고 그것을 개념화하는 도구는 통념적으로 합리적인 것처럼 확실하게 단정을 하신상태에서 제가 비합리 위에 합리를 덧씌우는 모순을 범한 것 마냥 질문을 하고 계신데, 질문의 상대방인 제가 생각하는 주체의 사실 인식 체계 자체라는 개념의 합리성을 제가 인정하기에 그 질문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해에서 빚어진 충돌일 뿐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화라는 단어가 정녕 인간과 떨어져 존재하는 초월 객관성이라도 된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어차피 개념화나 인식이나 물리 구조에서 태동한 인간 욕구의 충족을 통한 현상 확인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알튀세님의 식대로라면, "비합리적인 것을 비합리적인 잣대로 판단하는", 그리고 저의 식대로라면, "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인 잣대로 판단하는, 끊임 없이 불안하고 무엇하나 단정할 수 없는 유동적인 상태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알튀세님의 비합리와 저의 합리는 결코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다.

    욕구의 충족을 통한 현상의 확인 방식에 기반한 논리 전개를 합리적이라 정의합니다. 이것이 매우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야만무지하고도 단순폭력적인 방법 외로는 물질의 존재를 자각할 수 있는 개체는 인간 중에 그 어느 누구도 없다는 점에서 인간에게는 절대적으로 합리입니다. 합리는 결코 우주의 초월 객관적 진리가 아니에요. "단순히 이치에 맞으면(합+리)" 되는 그런 간단한 문젭니다. 더 이상의 무엇을 합리라는 개념에 바라는 것 자체가 사치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제가 정의하는 비합리는, 인간의 인식 체계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 외를 다루는 모든 것이라 생각될 수 있겠습니다.

    왜 비합리의 개념인 무의식에 의존하는 학문이 비합리가 아니라 합리적인 학문이 될 수 있는지, 근본을 어긋난 토대 위에 세운 집이 어떻게 궁궐이 될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없군요. 라캉의 학문이 비합리적인 게 아니라 합리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알튀세님이 생각하시는 합리란 무엇이고, 비합리는 무엇인지, 그리고 라캉의 학문과의 연관은 어떠한가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



검색

맞춤검색

메모장

야후 블로그 벳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