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9일
과학은 '썩은 상자'인가?
니콜라스 웨이드, 윌리엄 브로드,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 미래인. (로보스님 블로그)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말 중에 "현실은 시궁창"처럼 훌륭한 표현도 없다. 과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과학판도 인간의 욕망과 미숙함이 소용돌이치는 바닥인 이상 진리를 향한 합리적 과정만일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현시창'이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말이 현실의 부조리함을 나타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궁창은 증류수도 아니지만 순도 100%의 오염물질도 아니다. 현실은 부패해있더라도 균일하지 않다. 현실의 복잡 다단한 양상은 한 두 마디의 말로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에 대한 관점에는 과학주의와 반과학주의, 두 가지 편향이 있다. 이 둘 모두는과학을 현실 속에서 이뤄지는 인간의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고 극단적이고 단순한 '이론'의 틀에 끼워맞춘다. 과학주의는 과학은 진리라고 찬양하고, 반과학주의는 과학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문화일 뿐이라고 격하한다. 실제의 과학은 어느 쪽도 아니다. 그러나 굳이 답을 강요한다면 나는 후자보다는 전자가 훨씬 더 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1920년대 에른스트 마이어는 뉴기니에서 몇 년간 새를 연구했다. 그는 모두 137종의 조류를 분류했는데 재미있게도 원주민들은 새를 136종으로 구분했다. 마이어가 두 종으로 분류한 조류를 원주민들은 한 종으로 본 것 외에는 둘의 분류는 정확히 일치했다. 서구 생물학과 뉴기니 원주민의 '생물학' 사이의 이런 일치는 과연 우연일까?
과학이 인간의 활동이라는 것은 과학이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하지만 동시에 스트롱 프로그램과 같은 강한 상대주의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서 공통된 인지적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빨강'과 같은 색 단어(color word)는 언어에 따라 가리키는 색의 범위가 다 제각각이다. 하지만 가장 빨강다운 빨강을 골라보라고 하면 모두가 똑같은 색을 고른다. 다시 말해 과학이 인간의 활동인 이상 그 다양성은 인간 공통의 인지적 틀 안으로 제한된다.
과학자들 역시 사람이고 부와 명예에 이끌리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인지적 편향들에 빠진다. 예를 들어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만을 찾으려는 확인 편향(confirmation bias)는 과학자들도 보통 사람 못지 않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절대적으로 합리적이지는 않더라도 다른 집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90%의 운전자는 자신이 평균적인 운전자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90%의 교수들도 자신이 평균적인 교수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운전자나 교수는 일정한 자격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기 때문에 분포가 위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아무리 실력이 없어도 바닥은 있다. 반대로 천정은 없기 때문에 소수의 레이서급 운전자와 초천재급 교수들이 평균을 위로 끌어올린다. 당연히 평균 이하인 사람이 50% 이상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상당수의 운전자와 교수들은 자기 실력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과신(overconfidence)라고 한다.
그런데 기상예보관들은 일기 예보에 있어서 과신이 거의 없는 직종이다. 다시 말해 80% 확신한다고 예보한 사례를 모아보면 정말로 닷새 중에 하루는 예보가 틀린다! (물론 미국에서. 한국은 어쩐지 모르겠다) 그도 당연한 것이 일기예보는 통계기 때문에 같은 조건에서 과거에 80% 비가왔다면 별 일 없는 이상 올해도 같은 조건에서는 80% 비가 올 것이다. 그러니 일기예보는 틀릴지언정 일기예보의 정확성만큼은 틀리지 않는다. 여기에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현대 과학의 일정 부분은 통계와 같이 정형화된 과정을 따르기 때문에 대놓고 인간적 오류가 개입할 여지가 완전히 배제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제한된다.
아예 대놓고 자료를 조작한다면 이런 정형화된 과정의 제한을 넘어설 수 있다. 게다가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시시껄렁한 연구를 하면 '재현을 통한 반박'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시시껄렁한 연구는 반박되는 대신 망각된다. 유명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들도 상당수가 몇 년 못가 잊혀지는데 아무도 재현조차 해보지 않을 연구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질보다 양이지만 그렇게 논문 많이 쓴다고 좋은 자리를 구하는 것도 무리다. 이것 또한 일종의 자정과정이다. 물론 그 와중에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가치있는 연구들도 허다하는 게 문제지만.
과학이 그나마 자정작용이 원활하다는 것은 다른 영역과 대조하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라캉이 수학을 가지고 해괴한 은유를 했다는 건 잘 알려져있지만 심리학을 개차반으로 인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거울단계에 대한 논문에서 라캉은 쾰러의 침팬지 연구를 반대로 인용하고, 왈롱은 아예 이름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여러 심리학자들을 엉터리로 인용한다. 결정적으로 거울단계 개념 자체가 실제하는 발달상의 단계인지 아닌지조차 의심스럽다. (참조: 아기들의 시야 : 라캉의 거울단계에 대해, 18개월, 한 편의 만담 : 라캉의 인용)
그런데 라캉의 거울단계 논문 이후로 수 십년동안 라캉을 인용하는 족히 수 천은 넘을 '연구'들이 있었는데도 라캉의 주장은 불가침의 권위를 누린다. 거울단계가 근거 없는 얘기라고 하면 "철학이거든요?", "은유거든요?"라고 한다. "6~18개월의 아기는 거울단계를 거친다"와 같은 문장은 철학의 영역에 속하지도 않고, 은유는 "A는 B다"라는 형식을 통해 B의 속성이나 구조를 빌어 A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므로 은유도 될 수 없다.
과학에서는 남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어두운 그늘 아래 재현을 피해 사기치는 놈들이 있다면,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라캉을 포함하는 그런 필드에서는 한 번 주목과 관심을 받으면 모든 반박으로부터 면죄부를 얻는다. 이런 필드에 비하면야 과학자들은 정직하고 순수하며 과학계는 자정작용이 잘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분명히 과학에 대한 허상이 존재한다. 실제의 과학은 훨씬 더 추잡하고, 훨씬 더 오류투성이다. 또한 더나은 과학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다른 인간의 활동과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더 정직하고 더 객관적이며 더 자정작용이 잘 이뤄진다고 말 할 수 있다. 과학자 사회도 다른 인간 사회와 똑같다는 말은 과학자 사회를 지나치게 저평가하거나 또는 다른 인간 사회를 지나치게 고평가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말 중에 "현실은 시궁창"처럼 훌륭한 표현도 없다. 과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과학판도 인간의 욕망과 미숙함이 소용돌이치는 바닥인 이상 진리를 향한 합리적 과정만일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현시창'이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말이 현실의 부조리함을 나타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궁창은 증류수도 아니지만 순도 100%의 오염물질도 아니다. 현실은 부패해있더라도 균일하지 않다. 현실의 복잡 다단한 양상은 한 두 마디의 말로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에 대한 관점에는 과학주의와 반과학주의, 두 가지 편향이 있다. 이 둘 모두는과학을 현실 속에서 이뤄지는 인간의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고 극단적이고 단순한 '이론'의 틀에 끼워맞춘다. 과학주의는 과학은 진리라고 찬양하고, 반과학주의는 과학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문화일 뿐이라고 격하한다. 실제의 과학은 어느 쪽도 아니다. 그러나 굳이 답을 강요한다면 나는 후자보다는 전자가 훨씬 더 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1920년대 에른스트 마이어는 뉴기니에서 몇 년간 새를 연구했다. 그는 모두 137종의 조류를 분류했는데 재미있게도 원주민들은 새를 136종으로 구분했다. 마이어가 두 종으로 분류한 조류를 원주민들은 한 종으로 본 것 외에는 둘의 분류는 정확히 일치했다. 서구 생물학과 뉴기니 원주민의 '생물학' 사이의 이런 일치는 과연 우연일까?
과학이 인간의 활동이라는 것은 과학이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하지만 동시에 스트롱 프로그램과 같은 강한 상대주의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서 공통된 인지적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빨강'과 같은 색 단어(color word)는 언어에 따라 가리키는 색의 범위가 다 제각각이다. 하지만 가장 빨강다운 빨강을 골라보라고 하면 모두가 똑같은 색을 고른다. 다시 말해 과학이 인간의 활동인 이상 그 다양성은 인간 공통의 인지적 틀 안으로 제한된다.
과학자들 역시 사람이고 부와 명예에 이끌리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인지적 편향들에 빠진다. 예를 들어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만을 찾으려는 확인 편향(confirmation bias)는 과학자들도 보통 사람 못지 않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절대적으로 합리적이지는 않더라도 다른 집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90%의 운전자는 자신이 평균적인 운전자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90%의 교수들도 자신이 평균적인 교수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운전자나 교수는 일정한 자격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기 때문에 분포가 위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아무리 실력이 없어도 바닥은 있다. 반대로 천정은 없기 때문에 소수의 레이서급 운전자와 초천재급 교수들이 평균을 위로 끌어올린다. 당연히 평균 이하인 사람이 50% 이상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상당수의 운전자와 교수들은 자기 실력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과신(overconfidence)라고 한다.
그런데 기상예보관들은 일기 예보에 있어서 과신이 거의 없는 직종이다. 다시 말해 80% 확신한다고 예보한 사례를 모아보면 정말로 닷새 중에 하루는 예보가 틀린다! (물론 미국에서. 한국은 어쩐지 모르겠다) 그도 당연한 것이 일기예보는 통계기 때문에 같은 조건에서 과거에 80% 비가왔다면 별 일 없는 이상 올해도 같은 조건에서는 80% 비가 올 것이다. 그러니 일기예보는 틀릴지언정 일기예보의 정확성만큼은 틀리지 않는다. 여기에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현대 과학의 일정 부분은 통계와 같이 정형화된 과정을 따르기 때문에 대놓고 인간적 오류가 개입할 여지가 완전히 배제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제한된다.
아예 대놓고 자료를 조작한다면 이런 정형화된 과정의 제한을 넘어설 수 있다. 게다가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시시껄렁한 연구를 하면 '재현을 통한 반박'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시시껄렁한 연구는 반박되는 대신 망각된다. 유명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들도 상당수가 몇 년 못가 잊혀지는데 아무도 재현조차 해보지 않을 연구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질보다 양이지만 그렇게 논문 많이 쓴다고 좋은 자리를 구하는 것도 무리다. 이것 또한 일종의 자정과정이다. 물론 그 와중에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가치있는 연구들도 허다하는 게 문제지만.
과학이 그나마 자정작용이 원활하다는 것은 다른 영역과 대조하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라캉이 수학을 가지고 해괴한 은유를 했다는 건 잘 알려져있지만 심리학을 개차반으로 인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거울단계에 대한 논문에서 라캉은 쾰러의 침팬지 연구를 반대로 인용하고, 왈롱은 아예 이름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여러 심리학자들을 엉터리로 인용한다. 결정적으로 거울단계 개념 자체가 실제하는 발달상의 단계인지 아닌지조차 의심스럽다. (참조: 아기들의 시야 : 라캉의 거울단계에 대해, 18개월, 한 편의 만담 : 라캉의 인용)
그런데 라캉의 거울단계 논문 이후로 수 십년동안 라캉을 인용하는 족히 수 천은 넘을 '연구'들이 있었는데도 라캉의 주장은 불가침의 권위를 누린다. 거울단계가 근거 없는 얘기라고 하면 "철학이거든요?", "은유거든요?"라고 한다. "6~18개월의 아기는 거울단계를 거친다"와 같은 문장은 철학의 영역에 속하지도 않고, 은유는 "A는 B다"라는 형식을 통해 B의 속성이나 구조를 빌어 A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므로 은유도 될 수 없다.
과학에서는 남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어두운 그늘 아래 재현을 피해 사기치는 놈들이 있다면,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라캉을 포함하는 그런 필드에서는 한 번 주목과 관심을 받으면 모든 반박으로부터 면죄부를 얻는다. 이런 필드에 비하면야 과학자들은 정직하고 순수하며 과학계는 자정작용이 잘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분명히 과학에 대한 허상이 존재한다. 실제의 과학은 훨씬 더 추잡하고, 훨씬 더 오류투성이다. 또한 더나은 과학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다른 인간의 활동과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더 정직하고 더 객관적이며 더 자정작용이 잘 이뤄진다고 말 할 수 있다. 과학자 사회도 다른 인간 사회와 똑같다는 말은 과학자 사회를 지나치게 저평가하거나 또는 다른 인간 사회를 지나치게 고평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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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12/29 23:40 | 트랙백(1) | 핑백(3)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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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이 된다면요.
올해 가기 전에 결국 또 하나 암울한 결과가 터졌네요.
이미 확정적이긴 했는데...
위에서 '진리'라고 사용되는 단어를 '사실'이라는 단어로 바꾼다면, 저는 윗글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안타깝게도 개인적으로 몇 가지 문제가 있어 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기에, 두 가지 문제 정도만 간략하게 제시하겠습니다.
1. 일단은 '형식'의 문제입니다. 시각적 인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사물을 표현하는 형식입니다. 청각적 인상은 귀로 들을 수 있는 여러 소리들을 표현하는 형식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종소리'는 시각적 인상이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의 바깥에 있습니다.
약간 다른 예로, '시간'은 '공간'의 형식과 다릅니다. 어느 공간에 위치한 사물의 변화를 통해 시간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공간 자체의 형식을 - x, y, z 좌표축을 통한 - 통해 표현된 것은 아닙니다. 반복하지만, '변화'라는 또다른 형식을 통해서만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게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점이지요. 어떻게 저걸 합칠 생각을 했답니까. d-_-b)
2. 저는 지금 배가 고픕니다. 제 눈앞에는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이 있습니다. 저는 밥을 먹어야 할까요?
'제가 밥을 먹어야 한다.'라는 결론이 있을 수 있고, '제가 밥을 먹지 않아야 한다.'라는 결론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밥을 먹어야 한다.'라는 명제와 '제가 밥을 먹지 않아야 한다.'라는 명제는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위'의 영역이지요. 과학적으로 '제가 밥을 먹어야 함'을 입증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고, '제가 밥을 먹지 않아야 함'을 입증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몇몇 경제학도들이 여기서 착각을 일으키기는 합니다. 그 친구들은 과학적 방법으로 인간의 행동들이 갖는 정당성을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라는 '사실'에 기반한 추론입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논외로 하지요. 다만, 저는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이기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무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요. 근본적으로 범위가 맞지 않습니다.
시각이 청각을 표현할 수 없듯이, 과학이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형식인 '사실'은 '당위'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최소한 과학으로 당위적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사실'정도는 입증 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리플은 - 약간 어감에 차이는 있지만 - 과학이 사용하는 언어들과 동일한 형식을 공유하지요.
기타 추가사항은 아래의 포스팅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smallhuman.egloos.com/page/2
스스로 노력하고 반성하고, 보다 진실된 행동을 하는데 보탬이 되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어렵지만 저같은 비전문자도 어느 정도 이해할 부분이 있다는게 아이추판다님글의 매력중 하나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