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11일
인문학적 제어론 (2)
인문학적 제어론
과학과 철학은 대립하는가 (노정태님)
'인문학적 제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이란 그 자체로 옳고 바르고 합리적이며 다른 종류의 지식에 대해 교정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어떤 문제가 인문학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똑같은 전제를 공유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도 아니고 가능하지도 않으며 옳지도 않다.
인문학은 단수가 아니다. 정치철학에는 레오 슈트라우스에서 안토니오 네그리까지 다양한 입장들이 있다. 네오콘은 무식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문학적 교양과 지식을 풍부하게 갖춘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 교양과 지식의 내용이 어떻냐 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인문학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런 각각의 인문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게 된다.
노정태님은 제어론자들이나 견제론자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노정태님이 동의하건 말건 그들 또한 인문학의 일부다. 그들을 그렇게 간단히 배제할 수는 없다.
게다가 '과학과 조화로운 인문학'조차 의도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칸트는 수학과 자연과학이 안전한 지식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도리어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등장에 장애물이 되었다. 과학의 경계는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과학은 XX다"라는 언명은 한동안은 과학을 정당화할 수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구속이 된다. 창조론과 과학을 구분하려는 현재로선 건전한 철학적 시도가 미래의 과학에 대해 이런 반동적 기능을 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또, 인문학으로 창조론에 대응하는 건 현실정치적으로도 별로 바람직한 시도는 아니다. 다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칸트라고 딱히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고, 이쪽에서 칸트를 내세우면 저쪽에선 중세철학의 온갖 변신론이나 아니면 다른 상대주의 철학들을 들이댈텐데 이런 끝나지 않을 싸움에 빠져드는 게 과연 '해결책'일까?
칸트를 빌어 창조론을 과학에서 추방할 수 있다면, 역시 심리학 또한 추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못할 이유라면 과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애초에 과학자들의 결정에 따르면 되지 칸트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 내 기억으로 테리 이글턴은 "문학이론입문"에서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들이 현실의 문학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후 "문학이란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문학에 대해 정의를 포기한다면 굳이 과학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과학이란 과학자들이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과학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제어하려고 하지 말라는 얘기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교과서 뒤에 있는 연습문제를 푸는 게 단순히 학생들을 괴롭히기 위한 교수의 악취미가 아니라 과학자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쿤을 읽든 말든 숙제는 해야겠지만. "라캉도 패러다임이다!"와 같은 소릴하기 위해서 쿤이 존재한다면 그거야 말로 인문학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과학과 철학은 대립하는가 (노정태님)
'인문학적 제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이란 그 자체로 옳고 바르고 합리적이며 다른 종류의 지식에 대해 교정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어떤 문제가 인문학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똑같은 전제를 공유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도 아니고 가능하지도 않으며 옳지도 않다.
인문학은 단수가 아니다. 정치철학에는 레오 슈트라우스에서 안토니오 네그리까지 다양한 입장들이 있다. 네오콘은 무식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문학적 교양과 지식을 풍부하게 갖춘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 교양과 지식의 내용이 어떻냐 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인문학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런 각각의 인문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게 된다.
노정태님은 제어론자들이나 견제론자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노정태님이 동의하건 말건 그들 또한 인문학의 일부다. 그들을 그렇게 간단히 배제할 수는 없다.
게다가 '과학과 조화로운 인문학'조차 의도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칸트는 수학과 자연과학이 안전한 지식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도리어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등장에 장애물이 되었다. 과학의 경계는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과학은 XX다"라는 언명은 한동안은 과학을 정당화할 수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구속이 된다. 창조론과 과학을 구분하려는 현재로선 건전한 철학적 시도가 미래의 과학에 대해 이런 반동적 기능을 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또, 인문학으로 창조론에 대응하는 건 현실정치적으로도 별로 바람직한 시도는 아니다. 다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칸트라고 딱히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고, 이쪽에서 칸트를 내세우면 저쪽에선 중세철학의 온갖 변신론이나 아니면 다른 상대주의 철학들을 들이댈텐데 이런 끝나지 않을 싸움에 빠져드는 게 과연 '해결책'일까?
칸트를 빌어 창조론을 과학에서 추방할 수 있다면, 역시 심리학 또한 추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못할 이유라면 과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애초에 과학자들의 결정에 따르면 되지 칸트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 내 기억으로 테리 이글턴은 "문학이론입문"에서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들이 현실의 문학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후 "문학이란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문학에 대해 정의를 포기한다면 굳이 과학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과학이란 과학자들이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과학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제어하려고 하지 말라는 얘기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교과서 뒤에 있는 연습문제를 푸는 게 단순히 학생들을 괴롭히기 위한 교수의 악취미가 아니라 과학자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쿤을 읽든 말든 숙제는 해야겠지만. "라캉도 패러다임이다!"와 같은 소릴하기 위해서 쿤이 존재한다면 그거야 말로 인문학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 by | 2008/11/11 16:18 | 트랙백 | 핑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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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사회과학이냐 자연과학이냐가 문제라는 건데, 이 부분에 관해선 워낙 얘기가 필요하죠. 예를 들어 위키에서도 기본적으로 사회과학 카테고리에 심리학을 넣어 두고 이 논의를 하고 있는데, 심리학이 어느 쪽에 속하냐에 관해선 논쟁도 많고 또 분과마다 다르다-예를 들어 신경심리학은 자연과학이라는 거고.
For example, biological psychology is considered a natural science with a social scientific application (as is clinical medicine), social and occupational psychology are, generally speaking, purely social sciences, whereas neuropsychology is a natural science that lacks application out of the scientific tradition entirely. In British universities, emphasis on what tenet of psychology a student has studied and/or concentrated is communicated through the degree conferred: B.Psy. indicates a balance between natural and social sciences, B.Sc. indicates a strong (or entire) scientific concentration, whereas a B.A. underlines a majority of social science credits.
대학에서 굳이 저런 구분을 쓸 정도로 심리학의 가지가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이 다음은 라깡이 구체적으로 어떤 심리학의 어떤 측면(자연과학적?사회과학적?)을 두고 뭐라고 했는가 다루는 것이 수순이겠죠. 아무래도 신경심리학을 두고 뭐라고 하진 않은 것 같고. 위의 예를 들어 biological psychology의 social scientific application 부분을 두고 떠들었다면 애초에 라깡의 주장이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이긴 하죠. 이 경우 라깡이 다룬 문제를 두고 라깡과 맞서는 심리학자의 주장이 패러다임이 아니긴 마찬가지.
지금 논의도 '과학'은 아니죠. 이미 과학에 대한 반성(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들 수는 있지만)인 것이고 이 이야기를 위해서는 분과학문의 틀을 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과학이 진리라고 하지만 우리가 왜 진리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보아도 과학이 아닌 다른 종류의 사고와 판단, 즉 인문학적 사고와 판단이 필요하다는 건 당연한 거겠죠. 이런 건 칸트가 이미 다 한 이야기고.
애초에 이런 영양가없는 논의가 시작된 것은 <저의>라는, 얄팍하고 의도적인 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글을 쓴다는 것은 이미 지식사회학적인 어떤 가치 판단을 필자가 내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충분히 (물론 싸구려 수준의) 인문학적 논의인 것이죠.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으나 굳이 '고전적인' 인문학 저서를 읽는 것의 가치를 찾는다면 그런 종류의 유치한 질문을 하지 않거나 피하게 된다는 데 있는 것일테구요.
어쨌거나 원래의 <저의>에 답하자면, 현대 사회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비판하는 것과 하이데거의 나치 협력, 소크라테스의 노예 소유를 언급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의미심장한 연관성도 없어 보입니다. 아이추판다님의 문제제기가 쓸모없는 이유로 아이추판다님의 사생활의 추악함을 지적하는 것이 의미없는 것과 같은 이유겠죠. 이 블로그를 찾는 분들께 쓰레기같은 성격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전공인 과학의 내용도 아니고) 현대 사회에 대해 내리는 판단 따위를 신뢰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은 왠지 부적절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과학도라면 과학 자체를 단순화시키는 일도 피하셔야겠죠. 어떤 분야의 과학자들도 자신의 연구 대상(의 존재 자체)에 대해 견해가 엇갈리는 일들도 허다하지 않습니까? 과학자 사회나 peer view에 떠맡길 수 없는 견해 대립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끼어드는 것"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과 "과학자들에게 내맡겨두라"라고 하는 건 다른 문제지요. 인문학이라는 대상을 때리기 좋은 허수아비로 제멋대로 세우는 것은 과학주의자의 좋은 정치적 전략은 아닙니다.
철학적 개념은 비교적 일반성, 추상성이 높은 개념들이고 그러한 개념들은 가치의 함의가 불분명하거나 다층적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의 개념이 아주 보수적인 이념을 지지하기 위해서나 급진적인 혁명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모멘트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정치라고 생각합니다만. 예를 들면 "유기체적 사회"라는 관념은 어떤 경우에는 아주 혁명적인 구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보수적인 이념의 표지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의 인문학 교육이 "식민 관료 양성을 위한 제도"였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 모두가 <현대 사회에서 전혀 무의미하며 도움이 안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아이추판다님의 의도에 대한 이해나 공감과는 별개로, 저는 아이추판다님의 단순한 논법에 동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