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08 11:35

윤리적 논쟁

과학에는 발견의 논리와 정당화의 논리라는 게 있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물론 이 얘기는 뉴턴의 개뻥)했다고 해서 논문에 "오늘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만유인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끝." 이렇게 쓸 순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어느 정도 간극이 있다. 윤리적 판단도 비슷한데 비록 사후적으로 논리적 정당화를 요구하더라도 윤리적 판단은 많은 부분 직관과 정서에 의존한다.

한 가지 실험에서는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단어, 예를 들어 "블로깅"같은 단어에대해 최면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을 연합시켰다. 그 다음에 "철수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방을 청소한 다음에 잠깐 블로깅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 뭐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실험참여자들은 철수가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비난한다. 이유를 물어보면 그제서야 뭐라뭐라 얘기하는데 제3자가 들어보면 다 헛소리다. 반대로 긍정적인 감정을 연합시키면 철수가 윤리적으로 옳은 행동을 했다고 칭찬하는데 역시나 이유를 물어보면 또 다 헛소리다.

이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정서는 윤리적 판단에 많은 영향을 준다. 더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있다. 어떤 사람이 "A라서 B다"라고 자신의 윤리적 판단을 설명하더라도 이 사람이 정말로 A이기 때문에 B라고 판단한 게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일단 직관이나 정서에 따라 B라는 판단을 내려놓고 그 다음에 A라는 이유를 찾아낸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이명박은 뭘해도 까이는데 정말로 이명박이 하는 짓이 다 뻘짓이냐하면 또 그런 건 아니다. 아마 이명박이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정책이라도 추진하면 사람들은 "대통령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가지고 생색내는 걸 보니 재수 없다"고 또 깔 겁니다. 이명박.. 지켜주지 못해..도 미안하진 않구나.

윤리적 문제나 정치적 문제를 두고 사람들이 싸우면 항상 A만 가지고 열심히 논리질하는 데 물론 그것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가지고는 견적이 안나온다. 논쟁 자체를 위한 논쟁을 한다면 모를까 그 밑에 깔린 정서를 이해하고 공략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말이야 쉽지..

덧글

  • 연석 2008/09/08 14:33 #

    재밌는글 잘 읽고 갑니다
  • 아이추판다 2008/09/08 22:16 #

    감사합니다
  • pequt 2008/09/08 19:03 # 삭제

    논쟁으로 밥벌어먹고 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넷에서 논쟁 자체로 이기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되긴 될까요...;
  • 아이추판다 2008/09/08 22:16 #

    돌아보면 제법 있는 것도 같습니다.
  • 2008/09/09 08:21 # 삭제

    자주 들러서 좋을 글 보고 갑니다. 블로깅이 없는 고로 이렇게라도 글을 남깁니다.
  • 아이추판다 2008/09/09 14:57 #

    감사합니다 ^^
  • Lord 2008/09/10 10:49 #

    보통은 역지사지 같은건 안하잖아요

    글 잘 읽었습니다 ^^
  • 리하 2008/09/12 23:05 # 삭제

    정서를 이해하고 공략하는 것이란 바로 이미지 정치와 조작 정치이며, 이것은 이미 현대 정치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정서가 정당화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실험에서 피실험자들의 정당화가 '헛소리'라고 판별하는 것은 엄연히 피실험자에 대한 경멸도 동정도 개입되어 있지 않은 '실험자의 이성'이 아닌가 합니다.
  • 아이추판다 2008/09/13 02:52 #

    실험자야 실험 상황 밖에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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