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만족스러운 선거 결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보더라도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다. 프랑스의 국민전선 같은 극우정당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야심차게 추진한 영어몰입교육이 '오해'가 되어 스러지는 과정은 적어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건강하다는 걸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례를 들어 "이래도 이게 정상이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민주주의로서' 건강하고 정상적이라는 말이다. 역사상 등장했던 민주주의는 언제나 시궁창이었는데 그나마 고여서 썩는 물보다는 흐르는 시궁창이 낫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다. 항상 이상적인 의사결정이 이뤄진다면 그건 이미 인간계의 일이 아니다.

통합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은 행정부와 입법부를 계속 장악하고 있어야할만한 충분한 이유를 보여주지 못했다. 한나라당이 말아먹을 것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일이고, 열린우리당이 말아먹은 것은 이미 확실한 현재의 일이다. 뭘 말아먹었는지 얼마나 말아먹었는지는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만 집권여당이 정권말기에 당 간판을 내렸다면 하여간 무엇이든 심각하게 말아먹었다는 건 분명해보인다. 통합민주당은 확실히 말아먹었고 아직까지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이렇다할만큼 말아먹은 일도 없다면(말아먹을 시간도 없었지만) 권력이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넘어가지 않는것이야말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딘가 고장나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2007~2008년의 경험은 폭발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시작했다가도 '말아먹으면' 한 순간에 정권이 날아가고, 당이 박살나고, 당 중진들이 낙엽처럼 선거에서 떨어지며 반대로 열렬한 지지자도 없고 심지어 대표적 공약마저 온 국민이 싫어하는 사람도 전 정권이 '말아먹으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어느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결코 '말아먹을' 수 없게 만드는 민주주의 강력한 힘이라고 본다.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이 민주주의의 이 위력을 확실히 체감하고 있다면 그들이 어떤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고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운신의 폭은 좁아질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잘 정착된 국가일 수록 투표율이 낮은데는 누굴 뽑아봐야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그 '마찬가지'라는 말에는 누굴 뽑아도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도 있지만 '나빠지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된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민주정 하에서 각각의 정치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또 유지하려고 하는 이상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그 몇 안되는 선택지 중에 나쁜 것만 줄곧 고를 수도 있겠지만 1~2년 간격으로 선거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그런 악수의 연속은 그리 오랫동안 허용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누가 정권을 잡든지 그럭저럭 평균적인 국정 운영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는 정치체제다. 섣불리 평균 이상을 바란다면 '영도자'에게 운명을 맡기는 도박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번 총선 결과는 '조금의 역겨움'만 참는다면 대단히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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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추판다 | 2008/04/10 23:39 | 트랙백(3)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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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kabbala's me.. at 2008/04/14 21:11

제목 : kabbala의 생각
“민주주의가 잘 정착된 국가일 수록 투표율이 낮은데는 누굴 뽑아봐야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 — 아이추판다...more

Tracked from How many cut.. at 2008/04/15 00:47

제목 :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선거 결과
대단히 만족스러운 선거 결과 총선과 연이은 중간고사 탓에 라캉 논쟁을 오랫동안 버려두고 있는 탓에 아이추판다 님의 이 글에 굳이 반응하지 않았는데, 노정태가 반박문을 썼다. http://basil83.blogspot.com/2008/04/blog-post_14.html 하지만 노정태의 글은 자신의 고유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어서 아이추판다 님의 글에 대한 반박이 명료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나 역시 이 글에 대해 코......more

Tracked from 노는 사람 Play In at 2008/04/16 11:51

제목 : kabbala의 미투데이 - 2008년 4월 14일
“민주주의가 잘 정착된 국가일 수록 투표율이 낮은데는 누굴 뽑아봐야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 — 아이추판다 2008-04-14 21:11:41 “지금까지 운동권 중에 평민이랑 대화할 수 있는 말을 가진 사람은 몇 없다.” — 정통고품격서비스 2008-04-14 21:16:12 이 글은 kabbala님의 2008년 4월 14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more

Commented at 2008/04/11 01:0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아이추판다 at 2008/04/11 10:20
비밀글 // 한 마디로 요약하면 "좁은 의미에서 정치와 넓은 의미에서 정치의 총체적 실패".
Commented by sprinter at 2008/04/11 10:24
당파적 의미가 없이 제도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민주주의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Commented by 아이추판다 at 2008/04/11 11:04
sprinter // 그 전제조건이 참 안타깝습니다.
Commented by 悟汪 at 2008/04/12 10:24
푸핫. 이거야말로 물 반컵의 정치학이라는 ㅋ.
Commented by 아이추판다 at 2008/04/13 00:16
"물 반 컵의 정치학"이라기보다는 "수돗물 먹어도 안죽는다의 정치학" :(
Commented by 노정태 at 2008/04/14 21:46
수동 트랙백입니다.

"최장집과 총선에 대한 의견들"
http://basil83.blogspot.com/2008/04/blog-post_14.html
Commented by umberto at 2008/04/15 10:47
어느 정도 주인장의 견해도 일리는 있지만,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88만원세대>의 저자 우석훈은 이명박 정권이 실패하면 그 다음은 진짜 파시즘의 도래할 거라고 보고 있거든요. IMF 이후 일반 서민들의 생활이 많이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고 그 대안이 보수세력의 강화된 신자유주의 처방(지난 10년이 완화된 신자유주의라면)인 셈인데, 그것조차 먹히지 않는다면 진짜 유신시절로 되돌아가려는 광기가 닥칠 수도 있다는 것이죠.
Commented by LineRoh at 2008/04/15 13:00
프랑스의 극우 정당 '국민전선'이 같은게 한국에서는 활개 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게 과연 맞는 말인지 판단을 못하겠습니다.

프랑스의 국민 전선은 르 펭이라는 이름을 듣기는 했지만 그들의 구체적 행태를 듣지는 못했는데

한국의 '이회창과 아이들' '박근혜와 똘마니' 들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 없는 극우 정당입니다.

몇가지 극우의 이념들을 그들에게 물어본다면 100% 오케이 할겁니다.
그리고 한나라당의 구성원 절반 이상은 역시 극우쪽에 가까우며

안타깝게도 친미파가 절대 다수 입니다.
한국의 친미파의 특징은 한국의 이익 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데 있고,

대한민국에서 유사시 대한민국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미국으로 갈 사람들이라는게 문제입니다.

프랑스의 극우 정당들은 자기네 나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기라도 하죠
대한민국의 극우 정당들은 국익보다는 미국의 이익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훨씬더 중요시 하는 집단입니다.

그리고 낮은 투표율이 이번에 문제인 것이
한나라-친박-이회창당을 찍은 머리수는 이전 총선과 비슷합니다.

이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을 찍었던 사람들의 50%가 기권을 해버림으로써
이런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프레시안 기사참조)

그리고 우리는 '아직' 정치 선진국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낮은 투표율은 아주 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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