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07 11:28

인문학적 기본 소양 유사학문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과학철학 책은 내가 알기로 카르납, 포퍼, 쿤, 해킹이 전부다. 라카토스는 수학사 책이 하나 번역되어 있고, 파이어아벤트는 이런 저런 편역서에 논문이 몇 편 번역되어 있다. 좀 넓게 봐서 콰인이나 툴민까지 치면 한 10권 정도 번역되어 있을 것이다. 해설서나 개론서까지 다 합치더라도 과학철학책은 썩 많은 편이 아니다.

알라딘에서 "과학철학"으로 검색하니 69권이 나온다. 판매량 순으로 정렬하니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가 1위인데 세일즈포인트가 1688이고, 대학교재로 널리 쓰이는 과학철학 개론서인 차머스의 "현대의 과학철학"이 5위로 세일즈포인트는 1251이다. 본격적인 학술서인 해킹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는 14위에 가야 나온다. 세일즈포인트는 221.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없는 게 이상해서 찾아보니 "청소년을 위한 과학"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다. "토마스 쿤"으로 검색하면 10권이 나오는데 그 중에 3권은 논술책이고 3권은 "과학혁명의 구조"의 까치판, 두산동아판, 이대출판부판이다. 해설서 1권, 쿤을 둘러싼 논쟁을 모은 논문집 1권, 전기 1권이 있다. 조인래 교수가 편역한 논문집은 절판된 모양이다.

한편 라캉으로 검색하면 52권이 나온다. 판매량 순으로 정렬하면 1위는 지젝이 쓴 "HOW TO READ 라캉"이다. 세일즈포인트는 2648. 과학철학 1위인 "악마의 사도"보다 잘 팔리는 책이 6권이나 있다. 해킹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보다 잘 팔리는 책은 34권이나 있다. 역자의 표현에 따르면 "현존하는 최상급 과학철학자"라는 해킹이 한국의 영어과 교수가 쓴 "라캉 장자 태극기"보다도 덜 팔리는 형편이다.

잠시 괴델의 불가능성 정리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책들도 찾아봤다. 논리학의 대가인 불로스가 쓰고 분석철학을 전공한 김영정이 번역한 "계산가능성과 논리"는 31이다. 오역이 심해 좀 걸리긴 하지만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는 상권이 1873, 하권이 1505다. 호프스태터의 책이 나름 베스트셀러란 걸 염두에 두도록 하자.

꼭 과학철학책이 많이 팔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라캉을 방어하기 위해 쿤이나 과학철학을 인용하고, 괴델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과학철학자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괴델의 정리가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했다면 그래서 라캉과 관련된 책을 사 읽는 사람들이 몇 권 되지도 않는 과학철학책이나 수리논리학책을 사 읽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안 읽었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백번 양보해서 안 읽는 것도 상관없다치자. 그런데 읽어보지도 않은 얘기를 아는 척 떠드는 이유가 뭔가? 논술학원에서 특강 하나 듣고 대입논술에서 쿤 가라사대 하는 고등학생이랑 다를바 없다. 그건 인문학적 자세가 아니다.

라캉은 자신의 거울단계 이론을 Henry Wallon의 실험에 근거해서 주장했으면서도 평생 Wallon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라캉'교도'들의 지적 불성실성은 그들의 교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인가보다. 과학의 영역을 넘보기 전에 인문학적 기본 소양부터 갖춰야 할 일이다.

핑백

  • Null Model : 인용의 윤리 2008-04-08 20:22:32 #

    ... 인문학적 기본소양에 비밀댓글로 달린 글이다. 언급할게 많긴 하지만 색깔로 강조한 부분만 답변드리도록 하겠다. (강조, 색상, 번호는 모두 내가 붙인 것이다) 제가 고등학생 때 글쓰기 주 ... more

덧글

  • ExtraD 2008/04/07 14:33 #

    파이어아벤트 [방법에의 도전] 번역본이 있는 걸로 알고있는데 찾으려니 못찾겠네요.
  • .. 2008/04/07 14:43 # 삭제

    계산가능성과 논리, 이 책은 이전 블로그에서 보고 예전부터 찾아봤는데, 오래전부터 절판이라 구하기 어렵습니다. 좀 큰 도서관을 가야 구경가능한 책이네요.
  • gracky 2008/04/07 15:03 #

    .. / 그런데 대개 이런 계산이론이나 논리학 과목의 책들은 가급적 영어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역은 차치한다쳐도 번역서들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이 한국 학계 내에서 일관되어 있지도 않을 뿐더러 심히 적절치 않은 경우가 많지요. 이런 과목들은 대륙철학과는 달리 원어 (거의 100% 영어) 표현도 비교적 쉽고 명료하기 때문에 라캉 등을 읽을 수 있는 어학력을 가진 분들에게는 어학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 2008/04/07 15:4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8/04/07 17:42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과학적인문주의자 2008/04/07 17:45 # 삭제

    과학철학 관련서적이 의외로 꽤 됩니다. 그만그만한 수준이어서 문제지만요 (그렇지 않은 분야가 없긴 하지요). 잘 알려진 입문서 수준으로는 차머스, 오히어 등이 있습니다 (모두 서광사). 중고생을 위한 책 수준인 "차머스" 책을 넘어서면 뉴튼-스미스의 "과학의 합리성"이나 한국의 교수들이 쓴 "과학철학의 문제들"은 중급 이상의 과학철학 교재라고 할 수 있죠 (모두 대우학술총서, 지금은 어디서 나오는지 참). 쿤 관련 책들도 있죠. 머스그레이브와 라카토슈 편집의 "현대 과학 철학 논쟁"과 조인래 편역의 "쿤의 주제들"(이대출판부).

    원전(?)을 따져도 꽤 됩니다. 고전적인 입장부터 따져보면 카르납의 "과학철학입문"(서광사), 햄펠의 "자연과학의 철학", 라이헨바흐의 "새로운 철학이 열리다", 어니스트 네이글의 "과학의 구조".

    그 다음 포퍼의 "과학적 발견의 논리"(고려원),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 그 다음에는 라카토슈의 책 3권. 저서 한 권과 논문집 2권이 모두 번역되어 있죠. 파이어아벤트의 "방법에의 도전"은 한겨레(아래아입니다) 출판사에서 나왔을 겁니다. 이 논의들을 정리하는 게, 차머스와 뉴튼-스미스의 책이죠. 물론 핸슨의 "과학적 발견의 유형"도 넣어야겠고.

    눈을 좀 돌리면 (이중에서 번역이 최악인) 바슐라르의 책들도 끼워넣을 수 있을 거고. 깡길렘의 책과 (이들을 정리하고 있는) 도미니크 르쿠르의 책을 포함시켜도 되겠네요.

    여기서 덧붙이자면 포퍼의 과학철학에 대한 국내 저술들이 몇 권 있다는 것 -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따로 저술이 나온 건 없다고 해야할 듯. '실험'을 강조하는 새로운 흐름이야 이언 해킹이 대표주자일 것이고, 국내 이상원 박사가 학윈 논문을 이 주제로 써서 책으로 냈던 것으로 기억.

    괴델에 관해서는 어니스트 네이글의 "괴델의 증명"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레베카 골드스타인의 괴델 평전도 번역되어 있고. 쉽게 설명한다고 하지만 오해를 사기 쉬운 서술의 존 카스티의 "괴델"(tv 프로그램을 토대로 만든 책)도 있죠. 카스티가 하수라는 게 아니라, 직관적인 수사적 표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생기는 문제.

    차머스의 책을 읽거나 요시나가 요시마사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읽거나, 이건 단지 '입문의 입문'일 뿐인데 그걸 읽고 '이해'했다고 여기는 요상한 풍토가 있는 건 사실. 아무래도 자연과학에서는 푸리에 변환에 "관해서 아는 것"과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의 차이가 아주 확연하게 뚜렷하지만, 인문학에서는 무엇에 "관해 아는 것"만으로도 "자기 사유"라는 걸 할 수 있다고 믿는, 뿌리깊은 오해가 존재. 뭐 그런 거죠.

    깝깝한(?) 과학주의자들보다 공부안하는 인문주의자들이 인문학의 더 진정한 적이라는.
  • 과학적인문주의자 2008/04/07 19:16 # 삭제

    계산가능성과 논리는 2002년 제4판 PDF 파일을 인터넷에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습니다. PDF 파일로 17메가 정도 크기란 게 부담스럽긴 하지만요. 필요로 하시는 분이 있다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 아이추판다 2008/04/07 22:56 #

    ExtraD // 절판된 듯 합니다.
    .. // 아, 그 책도 절판인가요?
    과학적인문주의자 // 말씀하신 책들 중에 상당수는 이제 더이상 구할 길이 없습니다. OTL
  • 2008/04/07 23:09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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