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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사실 제가 라깡 빠돌이라서요;;;
확률은 말그대로 확률임에도 불구하고, 확률에 대한 아이츄판다님의 태도는 별로 확률적으로 보이지 않는 듯 합니다. 확률만큼은 확률적이지 않고 확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확률이 확실한 것일까요? 이런 질문이 다분히 무례할 수도 있단 생각이듭니다. 그것은 ‘과학철학자’들이나 ‘통계학자’들에게 모독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이듭니다. 하지만 이론이 현실을 설명한다고 할 때, 왜 굳이 라깡을 택해야하냐는 아이추판다님의 논평은 똑같이 확률에 대한 이론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이론이 현실을 설명한다고 할때, 왜 확률에 대한 이론을 택해야 하나요? 즉 아이추판다님은 어떤 의미에서 라깡을 모독하신거지요;;;
어디서 주워들은 건데요 비트겐슈타인이 어떤거에 대해 의심할려면 그 의심에 대한 근거는 의심할 수없어야 한다고 한것 같은데, 여기에 말을 맞춰보자면, 아이추판다님이 라깡에 대해서 의심할 때, 그 의심에 대한 근거 혹은 그 불신의 잣대로 기능하는 확률은 믿을 만한 것인가요?
그냥 단순히 도발하기 위해서 이렇게 상황을 역전시킨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확률은 혹은 과학은 믿을 만한 것인가?이런 질문을 행한 이가 라깡이기도 했기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아이추판다님은 과학이란 잣대로 정신분석학이라는 이론에 대해 메타적 지위를 점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사실, 과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 시작된 것이, 그래서 과학에 메타적 위치를 점한 것이 정신분석학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이론적인 차원을 떠나 현실적인 차원에선 과학, 그리고 과학계, 과학제도의 파워가 막강하기에 라깡은 그냥 무시되고 있기는 하나, 라깡이 틀려서 무시된다기보다는 그냥 라깡따위야 하고 무시되는 듯해요.
그렇다고 라깡이 과학이나 수학에 배타적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라깡이 즐겨 인용한 것이 괴델의 정리이기도 했거든요. 물론 괴델의 정리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이미 라깡의 색깔과 관점이 물들어있기는 하지만요.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수학 박사이기도 합니다.) 역시 라캉의 이론을 대체적으로 수용하면서 괴델의 정리를 들었다 놨다 한다더군요.)인용해 보겠습니다.
1931년 괴델이란 수학자는 <수학의 원리 및(이와) 유사한 체계 내에 있는, 형식적으로 결정 불가능한 명제들에 관해>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했다. 괴델의 이 논문은 제2츼 칸트 혁명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수학·논리학·철학등 다방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첫 번째 결론은 (러셀의 <수학의 원리>에서 기술된 것과 같은) 어떤 형식적 (수리) 체계 P가 논리적으로 모순 없이 정합적으로 구성되었다면, P 내에서는 결코 증명될 수 없는, 참인 명제가 반드시 체계 P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의 두 번째 결론은 더욱 충격적이다. 이에 따르면, 어떤 형식적 체계 P가 모순 없는 정합적 체계라면, P의 정합성을 주장하는 명제 W는 결코 P 내부에서는 도출 될 수 없다.·······라캉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현대 논리학)은 의심할 나위 없이 [불완전한 또는 상처입은: 홍준기의 역주] 과학의 주체를 꿰매고자suturer[완전하게 만들거나 치유한다는 의미: 홍준기의 역주] 하는 시도의 결과이다. 그런데 괴델의 마지막 정리는 그것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문제가 되고 있는 주체는 여전히 과학의 상관항corrélat이지만[주체(개념)은 과학 작업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라는 의미: 홍준기의 주] 이율배반적인 antinomique 상관항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주체를 꿰매고자 하는 탈출구 없는 노력임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라캉은 ‘과학의 근거위기’로 알려진 역사적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달, 그리고 특히 대수론의 확실한 논리적 근거로 받아들여지던 집합론에서의 이율배반의 발견으로, 그 동안 의심없이 믿어왔던 유클리드적 세계관과 수학도 절대적 확실성을 갖고 있지 않음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라캉은 바로 괴델이 과학의 근거 위기의 극복 불가능성을 최종적으로 증명했다고 보는 것이다.
괴델의 ‘인식론 혁명’ 이후 우리는 한 체계의 무모순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체계 ‘외부’에서 이를 내려다보는 “신”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겐첸Gentzen이란 수학자는 체계 ‘외부’에서 체계의 무모순성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으나, 많은 전통 논리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겐첸의 증명이 괴델의 정리를 무력화시켰다고 할 수 는 없다. 괴델의 정리는 이미, 한 체계의 무모순성이 체게 외부에서는 증명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델의 정리가 주는 충격은, 어떤 한 체계 외부에서 그 체계의 비모순성을 주장하는 다른 어떤 체계 역시 스스를 정합적인consistent 체계로 증명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어떤 체계의 무모순성을 증명하는 한 단계 높은 다른 어떤 무모순성 역시 그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또 다른 체계에 의해서만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체계의 정합성을 입증하는 과정은 원칙적으로 무한한 과정이고, 무한한 과정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신만이 체계의 무모순성을 소유할 수 있으며, ‘유한한 인간’은 결코 어느 시점에서도 모순 없는 정합적인 체계를 소유하고 있노라고 공언할 수는 없다는 것이 괴델의 정리가 보여주는 철학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
괴델에 따르면 한 체계 내에서는 , 신의 관점을 취하지 않는 한 결코 그 체계 내에서 옳은 것으로 증명될 수 없는 하나의 명제, 즉 ‘이 체계는 무모순적이다’라는 명제가 존재한다.이와 마찬가지로 라깡도 각 주체의 통일적 의식-‘통일적인 의식’도 하나의 체계임은 분명하다-과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결핍manque, 빈곳trou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본다. 라캉은 이를 ‘실재 réel'라고 부른다. 그리고 실재는 ‘무의식’에 대한 철학적 번역으로 볼 수 있다. ······
홍준기, 라캉과 현대철학, 문학과 지성사, 109~112쪽
라깡이 과학이나 수학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라깡이 과학이나 수학에서 읽어내는 것은 그것의 불가능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이제 간접적으로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불가능한 것인 무의식을 어떻게 논할수 있는가에 대한 간접적 대답이 될 듯합니다. 무의식은 직접적으로 세계에 현존할수도 없고 현존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의식의 실패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의식의 실패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일 수 있는 것은 라깡은 절대적 확실성에 대해서 거부한 다는 것이겠지요. 이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라고 주장,착각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전적인 과학이겠지요. 그런의미에서 라깡은 과학의 확실성-사실 좀 과학은 많이 오만해지지 않았나요? 마치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듯이, 뭐든 할수 있다는 듯이 말이지요. 심지어 인간의 심리등의 문제도 다 과학적(뇌파, 호르몬등)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듯이 한다지요?-공격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격은 라깡 자신이 정신분석내에 속해있었으므로, 정신분석 자체에 대해 행해졌습니다. 라깡의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의 축출과 국제정신분석학회로 대변되는 미국 중심의 자아심리학과 라깡의 대립은 그가 그의 삶속에서 절대적 확실성에 대해 비판했음을 보여주지요. 라깡이 자아심리학을 증오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아심리학은 자아를 중시하고, 분석의 목표 역시 피분석자의 강한 자아를 지닌 분석가와의 동일화입니다. 즉 분석가의 자아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여기는 면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와달리 라깡은 그런 교육적, 지도적, 사회순응적, 나쁜 말로 건전한 인간을 양상하는 자아심리학을 거부합니다. 심지어 라깡은 피분석자를 분석주체라고 정정합니다. 분석은 분석가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석은 분석주체가 자유연상등을 통해 스스로 해나가는 것입니다. 분석가는 피분석자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인용으로 인용으로만 가득찬 이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아래의 인용문은 객관성이 놓치고 있는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보여줍니다. 제생각보단 인용이 많다는 점은 송구스럽지만, 사실, 제 생각이 끼어들여지가 별로 없는 주제인 듯도해서.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과학주의적·실증주의적 방식으로 교육받는 사람은 정신분석이 ‘객과주의적’ 과학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정신분석의 학문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실증주의적 과학은 전이의 공간속에서 인간 주체는 예측불가능하고 독특하게 드러나며, 따라서 분석과정은 주체의 고유성오가 개별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실증주의적인 관점은 정신분석이 다른 어떤 학문도 할 수 없는 작업, 즉 ‘객관적 지식’에 포섭되어 고유성을 상실한 주체에게 자신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되돌려주는 작업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라는 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제거할 수 없는 주체의 고유성을 존중한다는 정신분석의 학문적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 정신분석은 ‘사이비’학문이라는 오해를 무릅쓰면서도 객관적 지식 속으로 포섭될 수 없는 주체성과 주체의 예측불가능한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바로 이러한 주체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존중’이야말로 성공적인 정신분석을 위한 전제조건이며, 또 분석이 나아가야할 목표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라깡 정신분석임사. 조엘도르지음 홍준기 역 아난케 17쪽
마지막 인용은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사족 같군요. "주체성과 주체의 예측불가능한 상호작용"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다른 분들이 충분히 반박/지지하는 논리를 폈던 내용인 것 같네요.
인용을 적절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차라리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게 편할지도 몰라요. 권위에 기대려 해도 아는게 많아야 기대지요. 인용은 적절해야 겠지요. 인용구 자체의 의미로부터 탈주하여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고자 하는 엄청난 시도라면 모를까^^
아무튼간에, 달고양이님의 지적은 분명 제댓글을 향해있으니, 달고양이님의 지적이 단지 제글을 까보기위한 지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제 글의 허점내지는 잘못된 점에 대한 진심어린 충고일거라는 믿음 내지는 신뢰하에, 답해보려 합니다. 안그래도 익명성의 세계인 이곳에 신뢰마저 없다면, 토론이 아니라 무의미한 삿대질로 삭막해지지 않을까요?
일단 제 댓글이 “인용구 자체의 의미로부터 탈주하여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고자 하는 엄청난 시도”가 아니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고 이미 달고양이님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분명히 댓글에서 “제 생각이 끼어들여지가 별로 없는 주제”라고, 정말 인용은 새로운 의미의 재구성이 아니라, 인용일 뿐이라고 밝혔으니깐요.
최소한 달고양이님의 마지막말이 그래서 달고양이님의 저를 향한 비야냥거림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그렇다면 이제 적절치 못한 인용이라는 것이 달고양이님의 지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적절치 못한 인용을 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장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게” 나았을 꺼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이미 제가 느끼기에 위 논쟁은 라깡에 관하여 볼때, 자기생각의 과잉이 문제였으면 문제였지, 인용의 과잉이 문제였던 것 같지는 않으니깐요. 차리리 인용의 빈곤이 느껴졌다면 몰라두요;;;
인용의 과잉이건 빈곤이건 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치 못한 인용은 저도 정말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제 인용에서 어떤 점이 적절치 못한 인용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두 인용문이 매우 상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인용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두인용문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조금이따 이야기하기로 하고, 달고양이님의 의견이 너무 궁금합니다. “과학의 절대적 확실성을 거부하고 있다는 내용 이라기보다는 괴델의 정리를 이용해서 '실재'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일때, 그 둘은 어떤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인지요.그리고 달고양이님이 “"과학은 주체를 꿰매고자 하는 탈출구 없는 노력임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라깡의 언급도 과학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괴델의 정리를 라깡의 언어로 다시 서술한 것에 불과하고요.”라고 말씀하셨을때, 거기서 그 둘은 또 어떻게 다른 것인지요? 저로서는 당최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아마도 그리고 이러한 차이점으로 인해 제게는 제가 인용한 두 인용문이 매우 상관적으로 보이고, 달고양이님에게는 두 번째 인용문은 사족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신 것 같습니다.
우선 확실한 것 같은 것은, 인용문에 대해 저와 달고양이님의 해석 방식이 서로 달라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달고양이님의 해석방식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정말 묻고 싶습니다. 다른 해석을 만난다는 것은, 그 해석이 납득할만한 해석이라면, 항상 즐겁기 그지 없는 일이니깐요.
아무튼 그를 위해서라도 일단 제견해를 확실히해두는 것이 도움이 될듯합니다. 어떻게 두 번째 인용문이 사족이 아니라, 첫 번째 인용문과 매우 상관적이라고 해석하는 지에 대해서요.
이를 위해 한가지 유보조건 혹은 사과를 드리자면, 제가 용어를 너무 단순 무식하게 쓴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절대적 확실성이라들지, 과학과 확률이란 용어는 그다지 객관적인 용어사용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댓글의 수신인이 아이추판다님이었다는 전제하에서 그것은 납득가능한 사용이었을 듯 합니다. 아이추판다님에게는 과학과 확률이 절대적으로 확실해 보였으니깐요.
그럼이제 본격적으로 인용문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제가 너무쎄게사용한 것이었을 수도 있었을 절대적 확실성이란 단어는 인용문에서 ‘과학의 근거위기’라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라캉과 현대철학의 인용문의 논지를 따라가볼때, ‘과학의 근거위기’에서 시작된 논지는 ‘모순 없는 정합적인 체계를 소유하고 있노라고 공언할 수는 없다’는 논지로 전개되고, 그렇기에 주체 역시 하나의 체계로 보았을때, ‘실재’ 그리고 ‘무의식’이 있다는 의미가 되지요. 그렇다면 한체계의 무모순성의 불가능성(전 절대적 확실성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얘기했지요)이 곧 실재라고 인용문은 얘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 둘이 서로 다른 것일 수 있는 건지요? 제가 인용을 적절치 못하게 한다고 하셔서 인용하기가 꺼려지긴 하는데, 라깡은 실재를 “(논리적) 불가능성”이라고 말하기도 하거든요. 전 절대적 확실성의 불가능성이 실재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적 확실성의 불가능성 내지는 거부가 바로 실재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라깡은 실재를 "상징화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성과 과련해서 실재를 "쓰여지지 않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라며 그것의 거부성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노파심으로 덧붙이고 싶은말은 체계가 불가능하다면 대체 지금 현실적으로 있는 체계들은 그럼 다 뭐냐?라는 반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대해 라캉적인 답변은 실재가 은폐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론은 현실에 도달 할 수 없습니다. 개념은 존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여기기에, 그렇게 착각하기에 이론과 현실은 개념과 존재는 연관을 맺게 됩니다. 과학철학에서 라카토슈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지요. “명제는 오직 명제로부터 연역될 수 있을 뿐이지 사실로부터 연역될 수 는 없다. 이것은 기초논리학의 기본가운데 하나이지만 현재까지도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로부터 연역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관찰과 가설에 상관성을 도입하는 것은 그것의 불가능성을 은폐하기 때문일 듯합니다. 라카토슈는 그러한 은폐작업을 규약주의적 요소라고 부른듯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실재, 즉 체계의 불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두 번째 인용문은 첫 번째 인용문과 매우 밀접한 상관성을 갖습니다. 두 번째 인용문은 단지 “주체성과 주체의 예측불가능한 상호작용”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용문이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의 절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인용문은 “객관적 지식”과 관련해서 “주체성과 주체의 예측불가능한 상호작용”을 다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객관적 지식이 가리키는 바가 다시 체계, 보편성과 같은 것일때, 그로인해 사장되는 주체를 살리려는 작업은 그 은폐된 실재를 다시 깨우려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즉 객관적 지식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려는 것이지요. 굳이 말을 맞춰보자면, 괴델의 정리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이려 하는 지식에 대해 끊임없이 그 불가능성을 소환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노파심에 덧붙이는 것은 이러한 시도는 상대주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옳을 수 있다는 주장과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실은 옳지만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다른 주장일 테니깐요. 즉 흑인종이나 백인종이나 황인종이나 다 다르지 않다는 상대주의적 주장(그래서 그러한 주장은 자칫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종문제를 감춰버리지요)과 자신이 옳다며 정신증자들의 인권을 유린한 의학담론에 대해서 반발한 푸꼬같은 인물이나, 자아심리학에 반대한 라깡이 담지하는 방향성은 상대주의와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우리나라는 최근에야 정신증자에 대한 인권문제가 이제야 뉴스에 간간히 나오지만 서양은 좀더 빨랐지요. 그리고 그런면에서 개인적으로 의학담론에 대한 비판담론으로서 정신분석학은 너무도 필요해보이기도해요)
아무튼 제가 이해하는 것은 이런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글에서는 최대한 인용을 줄였고, 인용역시 제 생각에 토대를 두고 했습니다.
달고양이님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셨는지요?
어떻게 다른 해석이 가능한지 너무 궁금하고 너무 기대되네요.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융에 대해서는 프로이트 자신이 융과 거리를 두었기에 더 더할 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국제정신분석학회”라는 문제의 수식어가 들어있는 자아심리학인데요, 일단 수식어입니다. 정말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자아심리학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제가 국제정신분석학회라는 용어를 사용한 방식이 거슬리신다면 다음과 같이 답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자아심리학,대상관계,자기심리학,통합적 성향 등이 공존하고 있습니다”라는 ocd님의 지적은 옳은 지적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리킨 국제정신분석학회는 현재의 정신분석학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IPA란 말을 썼을때, 명시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현재의 IPA는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감지될수 있지 않았는지요. 전 라깡주의가 아니라 라깡과 IPA를 대립시켰습니다. 라깡이 지금 현재 살아있는 건 아니니, 당연히 라깡이 활동하던 시기의 IPA가 아닐까요? 라깡이 거울단계 발표할 때, 발표시간 10분 넘겼다고 버럭 화내며 쫓아내는 어네스트 존스가 의장을 하던 독일 마리엔바트에서 개최된 IPA 말입니다. 혹은 안나프로이트가 휘어잡고 있던, 그러다 약간 극적으로 얘기하자면, 배신과 분열의 역사속에 첨벙 빠져든 그 IPA말이지요. 그시절엔 멜라니 클라인도 공존하고 있다기보다는 IPA내에서 IPA와 대립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존이 아니라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당시 말을 잠시 인용해보겠습니다.
제임스 스트래치는 이미 1940년부터 학회가 양분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제 개인적인 관점에서 볼때 클라인 여사가 정신분석에 몇 가지 아주 중요한 공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1)그것이 모든 주제에 적용된다거나 혹은 2)규범적 타당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봅니다. 다른 한편 정신분석이 프로이트 가족 소유의 금렵이며, 클라인 여사의 생각이 지나치게 전복적이라는 안나 프로이트 여상의 주장도 역시 터무니 없다고 생각합니다. 양쪽의 이런 태도는 물론 철저히 종교적인 것이며, 따라서 과학과는 정반대되는 태도입니다.”
자크라캉 1라캉과 그의 시대. 앨리자베스 루디네스코 양녕자역 새물결 322쪽
이정도면 IPA가 왜 대립과 갈등의 역사인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한듯합니다. 지금은 공존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공존하고 있었는것 같진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정말 공존하고 있는 지는 의문입니다(공존이라기보단 긴장관계, 갈등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게 더 맞지 않을까요...;;; 학회가면 맨날 싸우잖아요;;;) 하지만 공존이라고 보면 공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탈퇴한 건 아니닌까요. 하지만 문제는 라깡과 관련하여, 파리정신분석학회(SPP) 프랑스정신분석학회(SFP)창설은 IPA와의 대립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물론 라깡이 IPA의 일원이 될려고 기를 쓴것 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IPA에 들려고 자신의 이론적 입장들을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아무튼 이와 별개로, ocd님의 이론들간의 비교는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고, 감정이 ,S1, S2로 연결된다는 것은 이상해보였지만요. 근데 그건 활자상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서 윗첨자 아랫첨자 지원도 잘안되니깐요. 그리고 S가 대문자냐 소문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집니다. 대문자S는 기표고, 소문자s는 기의고, S1(1은 아랫첨자)주인기표 S2(2도 아랫첨자)는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거든요;; S1, S2는 그냥 일괄적으로 기표일수도 있지만요;;
그리고 제가 지적한 것은 정신분석진영내에서는 자아심리학이었기에 그에 대해 애기를 더해볼수 있을 듯합니다.
1. 제 입장은 라깡 정신분석학과 달리 자아심리학은 병원에서의 의사와 환자사이에 존재하는 권위적 위계적 구도와 같은 것을 분석가와 피분석가 사이에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프로이트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합니다. 육체의 문제에서는 피치못할 부분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심리의 문제에서도 위계가 설정되야 할까요? 유아성욕의 도입이랄지, 인간 성욕은 본질적으로 도착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내지는 차별을 철폐하려 했던 것이 프로이트가 아니었을까요?
좀 막말을 하면 이런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도 그의 글안에서 좀 오락가락하는 것 같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려고 하기도 하고, 그 구별을 없애려고도 하지요. 그리고,자아심리학적으로 읽힐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그런다고 할때, 어느 입장을 지지해야할까요?
2. 그리고 다시 육체와 심리의 문제와 관련하여 영어 번역본에서의 충동에 대한 본능의 오역도 빼놓을수 없겠지요. 더나아가 그래서 영어 번역본에서 나오는 죽음본능(하지만 사실은 죽음 충동인) 개념에 대해서도 자아심리학적 조류는 거부하지 않나요?(본능이 생물학적 개념이라면, 충동에는 상징적 차원이 들어오지요) 즉 충동도 거부하고, 죽음 충동도 거부하는 것이지요.
3. 끝으로 라깡 파문의 주된 이유이기도 했던 가변적 분석시간 역시 자아심리학과 라깡 정신분석학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듯합니다. 가변적 분석시간이 라깡 임상에서 갖는 의미는 저항에 대한 분석가의 하나의 대처방식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의미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일단 자세히 생각이 안나서(;;;;), 저항과 관련해서만 살펴보면, 분석주체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면 미리 시간을 때울 이야기를 준비해오거나, 아니면 중요한 국면에서 시간이 될 때까지 버틸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 차이점들은 결코 라깡정신분석학이 자아심리학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를 보여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cd님의 말씀을 좇아 이 둘이 유사한 것이라고 봐야한 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혹은 위에서 제시된 세 논거는 어떻게 반박될 수 있을까요?
그럼 좋은 하루되시길 0ㅅ0;;
현재 정신분석은 충동과 방어에 초점을 중심에 두는 방식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자아심리학과 라캉학파는 그것을 고수하는 흐름이지요.낸시맥윌리엄스의 '정신분석적 심리치료'라는 서적이 현재 분석치료라는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많은 정보를 줍니다.실제 내밀한 정서를 언어화하는 것이 뇌를 변화시킨다고 합니다.그런 의미에서 분석은 효과가 있을 겁니다.그 외 어느 학파가 더 뛰어나다는 것은 나르시시즘으로 보입니다.
반복하지만 학파간 개념의 차이가 없다는게 아니라 '실제' 분석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차이,그리고 결과의 차이가 그리 큰지 의문입니다.상담받는 사람이 분석에 관한 많은 지식이 있어도 분석가의 성향을 알기가 어렵다고 합니다.학파간 차이보다 분석가 개인차가 더 크다는 언급도 들었습니다. 님 글을 이해하기가 다소 산만한 감이 있어 핵심을 잘 못잡겠습니다(뭐,제가 쓴 것도 그렇군요).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