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20 11:50

콰인 가라사대 유사학문

나는 라캉으로 시작된 이 논쟁의 경과를 지켜보면서 내가 처음 표명했던 원칙, 즉 분과학문의 성과에 기반하는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실감했다. 한윤형님이나 이상한 모자님도 그렇지만 다른 많은 분들의 글을 보면 기본적인 사실 관계가 틀려있다. 그게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워낙 심각하게 틀려있어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힘들어 보인다.

예를 들어 이상한 모자님의 글에 나와있는 심리학은 도대체 어느 나라 심리학인지 모르겠는데, 이상한 모자님은 그걸 '영미 심리학'이라고 부르지만 세상에 '영미철학'이라는 말은 있어도 '영미 심리학'이라는 말은 없다. 어디 잘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미국 심리학'이다. 그리고 미국 심리학에 대당하는 것은 독일 심리학인데, 독일 심리학이야말로 과학주의적 극단이다. 미국 심리학은 거기에 댈 것도 못된다. 이를테면 페히너의 심리학은 이름 자체가 "정신물리학(psychophysics)"이다.

심리학에 대해 잘 모르는 건 일단 그렇다치고 철학에 대해서도 그렇다. 한윤형님은 저번에는 김재권을 언급하시더니 이번에는 콰인을 언급하시는데 내가 아무리 철학을 모른다쳐도 이 논의의 맥락에서 콰인을 언급하면 아주 많이 이상하다. 한윤형님의 주장과 콰인 자신의 주장을 대비시켜보자.

한번 콰인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아마 그는 20세기에 “철학은 메타 이론이다.”라는 정의를 내린 대표적인 철학자일 것이다. 그는 과학적 문장은 1차 술어 논리학으로 분석가능하다고 논증했다. 그 말대로라면 1차 술어 논리학으로 분석가능하지 않은 것을 다루는 학문은 과학이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1차 술어 논리에는 믿음이나 가능 등을 서술하는 내포문맥이 포함되지 않는다. 이 정의에 의하면 심리학은 물론이고 수요나 공급을 법칙으로 하는 경제학도 학문일 수가 없다. 수요나 공급도 어떤 종류의 믿음을 그 개념 안에 포함하고 있고, 그래가지고선 명제가 1차 술어 논리로 분석이 되지 않으니까. 아마 이 정의에 따른다면 물리학, 화학, 생물학 정도만이 과학의 영역에 포섭될 것이다. 내가 굉장히 쇼킹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별스런 소리도 아니고 철학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월권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철학의 본질적인 권한에 속한다. 분과학문이 스스로를 정의내릴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사실 철학의 입장에선 월권일 것이다.
출처: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 - 아이추판다 님과 노정태 님에게 답변 (한윤형)

Epistemology, or something like it, simply falls into place as a chapter of psychology and hence of natural science. It studies a natural phenomenon, viz., a physical human subject. This human subject is accorded a certain experimentally controlled input -- certain patterns of irradiation in assorted frequencies, for instance -- and in the fullness of time the subject delivers as output a description of the three-dimensional external world and its history. The relation between the meager input and the torrential output is a relation that we are prompted to study for somewhat the same reasons that always prompted epistemology: namely, in order to see how evidence relates to theory, and in what ways one's theory of nature transcends any available evidence.
출처: Quine, 'Epistemology Naturalized', "Ontological Relativity and Other Essays", Columbia University Press, 82-83.

한윤형님의 주장, "콰인에 따르면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다."와 달리 콰인은 명시적으로 심리학이 자연과학임을 주장하고 있다.(a chapter of psychology and hence of natural science) 게다가 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한윤형님의 주장과 달리 도리어 콰인은 철학의 주요 영역인 인식론을 심리학에 편입시켜버린다. 인식론이 심리학에 포함된다면, 당연히 과학철학 또한 심리학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다. "철학은 과학의 메타 이론"보다 한 술 더뜬다.

지난 글에서는 언급안했지만 파이어아벤트도 라캉주의자들이 비빌 언덕은 못된다. 라캉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신분석학을 과학과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것인데, 파이어아벤트는 정신분석학과 과학을 모두 샤머니즘 수준의 진흙탕으로 내려보낸다. 정신분석학이나 한의학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을 샤머니즘과는 격을 달리 대접해주면서 과학과는 같은 격으로 대접해줄 철학자인데 과연 찾을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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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윤형 2008/03/20 16:15 # 삭제

    흠 그렇지만 너무 논의 전체가 스킵된 것 같아요. 저보고 건성건성 읽는다고 하시지만 제 입장에서 볼 땐 아이추판다 님은 아예 제 글을 안 읽는 것 같습니다. 님은 거듭해서 '라캉이 과학이라고 주장하거나, 과학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는 누군가'를 상정하고 논쟁하고 계십니다. "1000명" 얘기했을 때도 그렇고 (그거야 제 블로그 레비나스 님의 덧글을 보고 쓰셨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번에 파이어아벤트 언급도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님의 인식틀에 잡히지 않는 문제인가 봅니다.


    제가 좀 더 노력을 해서 질문을 가다듬어 볼게요. 논의가 안 풀릴 때는 서는 긴 글보다는 짧게 반론하고 답변하는 쪽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는데 성공했을 때, 심리학이라는 학문 안에 존재하는 정신분석학의 요소들은 어찌할 것인가라는 겁니다.


    1) 그것들은 효용이 끝났으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시는지,
    2) 내버려둬도 사라지는 추세이기 때문에 별다른 언급을 안 하시는 건지,
    3) 그것들이 심리학이라는 체계 내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신다면 그 이유에 대해서 조금 써주신다면 제게 좋은 참고가 될 듯 싶습니다.


    두번째 질문은 님이 3)을 선택했다는 것, 그리고 의료 행위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동원하는 것은 '과학적'인 것이다라고 답변했을 경우를 고려한 가상 질문입니다. (그러한 실험주의적인 입장은 당연히 존중받을 수밖에 없지요. 제가 재현가능성과 같은 기준에 시비를 거는 것도 아닐 테구요.)


    심리학이 님의 정의대로 '마음에 관한 학문'이라고 했을 때, 하나의 이론이나 방법론이 마음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리는데 '병든 마음에 대한 치료'가 매우 의미있고 강력한 표지가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 사실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차 얘기했듯 이 학문이 정신의학이 아니라 심리학인 이상은, 마음의 구조를 표지하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음은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실험주의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표지가 치유율 하나라면, 이때에 우리는 그것을 유일한 지표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님의 입장인 것인지요? 표지가 몇 개 있을 수 있는데, 그중 과학의 방법론에 잡히는 것은 이것 하나밖에 없으므로, 나머지 접근방식은 (상투적인 말이지만 대략 뜻은 통하리라 믿습니다.) 인문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없는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해 주시거나, 질문 자체가 무용한 것이라고 여길 경우 그 이유를 조금 적어 주셨으면 많이 도움이 되겠습니다.


    한의학과 정신분석학을 계속 엮고 계시는데, 저는 한의학이나 의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 분별하기가 힘들지만, 비-과학이란 말이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맥락을 너무 쉽게 하나로 통합하고 계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과학적 방법론이 확립되었고 그것으로 거의 모든 문제를 규명할 수 있다고 추정되는 분야에서 비-과학적인 접근을 하는 것과, 과학 자체의 역량으로 거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견적이 나오지 않은 분야에서 다른 비-과학적인 접근을 하는 것 사이엔 (상대적인 변별로 보아 주십시오.)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는 거죠. 정신분석학 역시 전자의 모습도 있고 후자의 모습도 있을 거라는 것이 제 생각인데, 님의 경우 전자의 부분에 치중하여 후자는 아예 도외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욕물 버리려다가 애까지 버리는 오류로 보이는 거죠.


    대략 이 두 가지 질문과 하나의 감상에 대해 님의 견해를 듣게 된다면, 제가 어디에서 님과 차이가 있거나 어느 부분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가 명백해 질 것 같습니다.
  • 윤형 2008/03/20 17:44 # 삭제

    위에 쓴 덧글을 하나 지우고 새로 답니다. 인용하신 콰인의 글을 다시 읽어보니, 님은 콰인의 입장과 제 견해를 묘하게 어그러뜨리고 있습니다. “과학적 문장은 1차 술어 논리학으로 분석가능하다고 논증했다. 그 말대로라면 1차 술어 논리학으로 분석가능하지 않은 것을 다루는 학문은 과학이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그러므로 내포 문맥을 포함하는 심리학은 콰인의 정의에 의하면 과학이 아닐 거라고 제가 말했죠? 이에 대해서 님은 “콰인은 심리학이 자연과학이며, 게다가 철학의 인식론을 그 안에 포함시켜 버렸다.”고 대꾸합니다. 물론 제가 콰인의 말을 다 확인하고 좀더 부연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님의 말은 제 논지의 맥락을 따라가지 못한 소리입니다.


    콰인이 말하는 심리학은 1차 술어 논리만으로 구성된 심리학의 일부, 아마도 인지과학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연과학이 지리한 명제로 이루어진 철학의 인식론을 포함시켜서 ‘자연화된 인식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겠죠. 콰인이 말하는 심리학은 님이 말하는 심리학과 레퍼런스가 완전히 다르고, 김재권이 말하는 심리학은 (이도 제 오독이라 생각하시는 듯한데) 그저 ‘심리학의 어떤 분과’ 정도의 의미밖에 없죠. 이 두 철학자와 달리 님은 “심리학은 마음에 관한 학문”이라 정의하면서 정신분석학을 그 외부에 두는 것을 거부했고, 줄곧 심리학이라는 학문 전체를 옹호하고 있었습니다. 발달심리학, 범죄심리학, 아동심리학, 뭐 이런 분야에서 내포명제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말씀은 못 하실 거에요. 그러면 제 인용이 틀린 것도 아닌 거죠. 저도 님을 좇아 심리학의 레퍼런스를 “심리학이라는 학문 전체”로 잡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므로 님은 콰인이 심리학을 옹호한다고 좋아하시기 전에, 그가 심리학을 매우 좁은 범위로 한정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지하셨어야 했습니다.



    "김재권과 콰인의 견해는 나를 옹호하고 있다."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잖아요? 제가 굳이 분석철학자들을 끌어들인 이유는, (대륙철학자의 맥락은 일단 괄호에 넣고) 님의 말대로 '분과학문의 성과에 기반하는 철학'이라는 것을 이상이라고 잡을 때 심리학은 현재로서는 (양립하기 힘든 것까지 포함하여) 여러 가지 입장을 산출하는 잡다한 학문이 아니냐는 거죠. 님이 심리학을 명백한 과학으로, 정신분석학을 명백한 비과학으로 규정했을 때, 제 생각에는 “그렇다면 명백한 과학이 명백한 비-과학을 그 안에 품고 있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논리적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구체적인 질문은 위에 있는 덧글에 해두었으니 참조하세요. 논의의 맥을 잡지 않고서 그저 내 견해를 옹호하는 듯한 학자들의 인용문을 수집하기만 한다면 대화를 하는 의미가 없겠지요. 영원히 끝나지도 않을 일이겠고...
  • 노정태 2008/03/20 18:40 # 삭제

    한윤형/ 논지가 너무 심하게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한윤형님의 '논지'를 위해 콰인이 말하는 심리학이 아이추판다님이 말하는 심리학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줘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한윤형님은 지금 자신의 논지에 맞춰서 심리학의 정의도 이리 저리 바꾸고, 콰인의 논지도 이렇게 해석했다가 저렇게 해석했다가 하고, 심지어는 심리학의 상위 개념인 인지과학을 심리학의 일부로 치환하기까지 하는군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기 위해 이미 존재하는 단어들의 뜻을 자의적으로 곡해하는 상황에서 대체 무슨 논쟁이 가능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콰인의 심리학 개념에 대한 어떤 확실한 해석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콰인의 뜻은 그게 아닐 것이다'라고 단정지은 다음, '하지만 콰인이 그렇게 말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라고 발뺌을 하는데, 스스로 생각해보세요. 자신이 과연 말이 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 윤형 2008/03/20 18:49 # 삭제

    윤형/ 콰인의 논지는 그가 말하는 과학의 정의에 맞춰서 해석한 것이고요. 인지과학이 심리학의 상위 개념이란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인지심리학과 다른 학문들이 모여서 학제간 연구를 하는 것이 인지과학이라면, 그게 심리학의 상위개념일 수는 없죠.
  • 노정태 2008/03/20 19:09 # 삭제

    상위개념이라는 표현에 어폐가 있군요. 하지만 심리학에서 심리철학을 할 수 없다면 인지과학에서도 심리철학을 할 수 없죠. 이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요. 제가 제 블로그의 글에서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 한윤형님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반박하는 리플에서도 "윤형/ 콰인의 논지는 그가 말하는 과학의 정의에 맞춰서 해석한 것이고요. 인지과학이 심리학의 상위 개념이란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인지심리학과 다른 학문들이 모여서 학제간 연구를 하는 것이 인지과학이라면, 그게 심리학의 상위개념일 수는 없죠."라고 하잖아요. 이 오타가 상당히 많은 것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나는 한윤형님과 이 논쟁을 더 이상 계속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건 제 블로그의 리플에서도 이미 공개적으로 표명한 바와 같죠.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남의 블로그에서 이러는 거 보기 안 좋고 정신건강에도 이롭지 않습니다. 이상입니다.
  • 윤형 2008/03/20 19:14 # 삭제

    정태/ 그 부분에 대해서 계속 설명을 해왔는데 납득이 안 갔다면 할 수 없구요. 논쟁을 그만 두자는데엔 동의합니다.
  • 아이추판다 2008/03/20 23:57 #

    윤형 / 인지(cognition)은 know, believe, percieve, think, judge, remember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인지심리학에 내포명제가 없다면 형용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 윤형 2008/03/21 07:49 # 삭제

    아이추판다/ 콰인 얘긴 잘못했습니다. 괜히 한번 더 뻗댄 결과가 되어 미안하게 생각하구요.

    다른 질문도 별로 답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신다면 그만 두도록 하겠습니다.
  • 아이추판다 2008/03/21 15:06 #

    윤형 // 결국에는 마지막 '감상'으로 귀결되는데요, 윤형님의 블로그에 하늘빛마야님이 다신 댓글로 갈음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걸로 만족스럽지 못하시다면 따로 답변을 써보겠습니다.
  • 윤형 2008/03/21 15:23 # 삭제

    아이추판다/ 심리학에 대한 제 어설픈 공세는 실패로 귀결되었으니, 저도 일단 하늘빛마야 님이 다신 댓글에 답변을 달겠습니다. 혹시 제 답글을 보고 나서 님이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실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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