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성화와 감시

생생한 기억에 달린 댓글

Commented by puzzlist at 2008/03/04 15:16
전에 이 실험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만약 15개의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려주어도 "의사"라는 답이 나올까요?
"활성화"와 "가짜 기억"은 그럴 듯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만, 15개의 단어를 모두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들려주면 오히려 "의사"를 듣지 않았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될 텐데 여기에는 어떤 메카니즘이 있는 걸까요?

생생한 기억에서 소개한 실험을 'DRM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DRM은 MP3나 동영상에 붙어있는 저작권 관리 기능인 DRM(digital rights management)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고, 이 실험 방식을 고안한 Deese, Roediger, McDermott 세 사람의 이름 첫글자를 딴 것이다. 심리학에서 패러다임은 특정한 실험 방식을 가리킬 때도 쓴다.

DRM 패러다임에서 다루는 가짜 기억 현상은 심리학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학술지 중에 하나인 "심리학 평론(Psychological Review)"의 1894년 창간호에 게재된 커크패트릭(E. A. Kirkpatrick)의 논문에서 처음 보고 되었다. 그러니까 백 년 넘게 연구된 주제인데 아직도 완전한 설명은 나와있지 않다. 이걸 완전히 설명하려면 기억의 비밀을 다 풀어야 할텐데 앞으로 몇 십년은 더 걸리지 않을까.

어쨌든 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설명은 활성화/감시 이론이다. 우리가 뭘 기억할 때 그냥 그대로 기억하는 게 아니고 부호화(coding)라는 과정을 거쳐서 정보를 저장한다. 기억을 떠올릴 때도 그냥 꺼내는 게 아니고 또 이런 저런 처리가 붙는다. 활성화 확산은 부호화 과정과 인출 과정 모두에서 일어나는데 DRM 패러다임의 경우 부호화 과정에서 활성화 확산이 가짜기억을 만드는 데 주로 기여한다고 본다.

단어를 외우면 온갖 잡다한 정보까지 함께 부호화된다. 예를 들어 마약 먹고 외운 단어는 맨정신으로 시험볼 때보다 마약 먹고 볼 때 성적이 더 좋다. (도대체 이걸 실험한 사람 정신상태가..) 또 수심 10m에서 외운 단어도 물 속에서 시험 볼 때가 물 밖에서 시험 볼 때보다 성적이 더 좋다. 단어를 외우는 상황(마약 먹은 상태, 수심 10m)처럼 쓸데없는 것까지 단어와 함께 부호화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단어를 인출할 때 단서가 되는 것이다.

활성화/감시 이론은 기억을 인출할 때 이런 잡다한 정보들을 활용해서 기억의 진위여부를 감시하는 과정이 개입된다고 본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학습을 하면 감시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정보가 많아지기 때문에 가짜 기억을 떠올리는 경우가 줄어든다. 이런 이유로 단어를 듣는 경우보다 읽는 경우에, 말로 회상하는 경우보다 글로 쓰는 경우에 가짜 기억이 덜 떠올려지게 된다. 철자라든지 시각적 특성 같은 정보를 감시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활성화 확산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기억은 이런 추가 정보를 어느 정도 만들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단어 하나는 남자 목소리, 또 하나는 여자 목소리 이런 식으로 들려주면 듣지 않은 단어를 어떤 목소리로 들었는지도 가짜로 기억하게 된다. 결국에는 감시 과정의 성능(?)과 가짜 기억의 성능(?) 중에 어느 쪽이 낫느냐에 따라 가짜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고 없기도 하고 이런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기억은 하드디스크에 파일 저장하듯 하는 게 아니고 그 자체로 창조적인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보면 주입식 교육이야말로 창의력을 키워주는 교육 방법이랄까.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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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추판다 | 2008/03/05 17:29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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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printer at 2008/03/05 17:53
역시! 우리 선조들은 수백년에 걸친 '진화된' 학습 방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다!!! OTL;;;
Commented by 하늘선물 at 2008/03/05 17:57
오호라!
Commented by danew at 2008/03/05 22:06
Commented by AKI☆ at 2008/03/06 01:41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AI 엔진(NN 같은)을 돌려보면서 느끼는 것인데,
'주입식 교육이야말로 창의적 교육'이라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비록 NN이란 것이 뇌를 완전히 모델링한 것은 아니지만,
예외 상황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대처하는 훈련된 NN 모델을 보고 있으면,
주입식 교육도 창의적 사고의 기초 체력의 일환으로 필요하단 생각이 들 때가 많더라구요.
Commented by 아이추판다 at 2008/03/06 12:46
sprinter // '진화된';;
하늘선물 // ^^
danew // 딱이네요.
AKI☆ // 어떨 땐 그거 밖에 없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긴 합니다.
Commented by 아이추판다 at 2008/03/06 12:47
그러고 보니 이 글 제목을 안 달았다능..
Commented by zizi at 2008/03/09 01:46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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