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2월 01일
평론가-철학자
언론 비판에 얽힌 두가지 태도
어제 우연히 참석한 술자리에서 새들이 자기 울음 소리와 다른 새의 울음 소리를 지각할 때 일어나는 뇌세포 활동 패턴에 대한 얘기가 어떻게 곁길로 새서 키엡슬롭스키 영화에 대한 지젝의 평론에 대한 얘기로 흘러갔다. (사실은 맥락이 있는 데 설명하긴 좀 길다) 그런데 지젝 얘기를 꺼낸 사람 말이 "내가 키엡슬롭스키 영화를 수 십 번을 보면서도 말로 풀어내지 못하던 것을 지젝이 정확하게 얘기해줬다"는 거였다. 그러나 어떤 글을 읽거나 말을 들었을 때 흔히 사람들이 "이게 바로 내가 하고 싶던 말이다"라는 반응을 보이곤 하는 데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사실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고흐의 그림과 우스꽝스러운 만화를 보여주고 마음에 드는 것을 선물로 줄테니 집어가라고 한 실험이 있다. 이 실험의 참여자들은 압도적으로 고흐의 그림을 가져갔다. 그런데 어떤 것이 마음에 드는지 '설명'하고 집어가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우스꽝스러운 만화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며 가져갔다. 시간이 지난 후 그림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했더니 설명하고 가져간 사람들의 만족도가 더 낮았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은 그림에 대한 감정을 설명하도록 요구 받았을 때 말로 표현하기 쉬운 이유들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우스꽝스러운 만화는 구체적으로 그런 이유들을 집어낼 수 있기 쉬운 반면 고흐의 그림은 그렇지가 않다. 결과적으로 우스꽝스러운 만화의 장점이 더욱 두드러져보이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더이상 감정을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면 그림을 고를 때 주의를 기울였던 부분들이 그렇게 두드러져보이지 않으며 그림에 대한 만족도도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말할 때가 아니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평론은 대상의 특정한 부분들을 선택하고 부각시켜서 해석을 입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평론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은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항상 평론가에 의해 변형된 작품이다. 보통 작품을 먼저 감상하고 평론을 읽는 독자는 작품과 평론을 1:1로 비교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작품과 평론을 비교하게 된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항상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사진을 몰래 구해 다른 사진과 합성해서 대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당신이 어릴 때 이런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말해주면 대부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답한다. 심지어 디즈니랜드에서 벅스바니와 함께 찍은 사진처럼 불가능한 사건인 경우에도 그렇다. 벅스바니는 워너브라더스의 캐릭터로 월트디즈니가 운영하는 디즈니랜드에는 있을 수가 없다. 나중에 사진이 합성이라고 얘기해줘도 상당히 많은(참여자의 40%였던 것 같다. 논문이 지금 없어서 구체적인 수치는 생략) 사람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대학생들에게 보여준 합성사진처럼 평론은 작품에 대한 기억을 바꾸어놓는다. 작품에 대한 기억은 평론에서 작품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변형되고, 평론에서 주목하는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서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이야기"가 생겨난다. 따라서 "내가 생각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생각했다고 지금 믿는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실제 경험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기는 하기 때문에 아무 평론이나 이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건 아니다. 평론이 실제 경험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과거의 경험을 재구성할 때만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평론가는 경험과 기억을 소재로 삼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자기 때문에 인간이 언어를 이해하거나 새들이 노래를 들을 때 하게 되는 경험을 뇌세포의 활동패턴이나 아니면 거기에 바탕을 둔 심리적 과정으로 설명하게 된다. 지젝 얘기를 꺼낸 사람은 그런 식의 접근이 무슨 쓸모가 있냐는 지젝의 지적이 그 키에슬롭스키 영화에 대한 평론 중에 나온다고 했다. 평론은 작품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창출함으로써 예술에 대한 경험을 더욱 풍성하게 하지만, 과학은 작품에 대한 경험을 인과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점에서보면 예술에 대한 감상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감상 자체에는 별로 쓸모가 없다. 공포영화를 보는데 옆에서 "저거 피 아냐, 케찹이야" 이러면 초치는 것 밖에 안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케찹이 케찹이지 피인 것은 아니다. 그것을 망각하면 슈퍼맨 영화보고 나서 보자기 쓰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아이처럼 된다. 과학에는 과학의 쓸모가 있고, 평론에는 평론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평론가-철학자들은 종종 그걸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제 우연히 참석한 술자리에서 새들이 자기 울음 소리와 다른 새의 울음 소리를 지각할 때 일어나는 뇌세포 활동 패턴에 대한 얘기가 어떻게 곁길로 새서 키엡슬롭스키 영화에 대한 지젝의 평론에 대한 얘기로 흘러갔다. (사실은 맥락이 있는 데 설명하긴 좀 길다) 그런데 지젝 얘기를 꺼낸 사람 말이 "내가 키엡슬롭스키 영화를 수 십 번을 보면서도 말로 풀어내지 못하던 것을 지젝이 정확하게 얘기해줬다"는 거였다. 그러나 어떤 글을 읽거나 말을 들었을 때 흔히 사람들이 "이게 바로 내가 하고 싶던 말이다"라는 반응을 보이곤 하는 데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사실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고흐의 그림과 우스꽝스러운 만화를 보여주고 마음에 드는 것을 선물로 줄테니 집어가라고 한 실험이 있다. 이 실험의 참여자들은 압도적으로 고흐의 그림을 가져갔다. 그런데 어떤 것이 마음에 드는지 '설명'하고 집어가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우스꽝스러운 만화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며 가져갔다. 시간이 지난 후 그림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했더니 설명하고 가져간 사람들의 만족도가 더 낮았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은 그림에 대한 감정을 설명하도록 요구 받았을 때 말로 표현하기 쉬운 이유들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우스꽝스러운 만화는 구체적으로 그런 이유들을 집어낼 수 있기 쉬운 반면 고흐의 그림은 그렇지가 않다. 결과적으로 우스꽝스러운 만화의 장점이 더욱 두드러져보이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더이상 감정을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면 그림을 고를 때 주의를 기울였던 부분들이 그렇게 두드러져보이지 않으며 그림에 대한 만족도도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말할 때가 아니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평론은 대상의 특정한 부분들을 선택하고 부각시켜서 해석을 입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평론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은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항상 평론가에 의해 변형된 작품이다. 보통 작품을 먼저 감상하고 평론을 읽는 독자는 작품과 평론을 1:1로 비교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작품과 평론을 비교하게 된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항상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사진을 몰래 구해 다른 사진과 합성해서 대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당신이 어릴 때 이런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말해주면 대부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답한다. 심지어 디즈니랜드에서 벅스바니와 함께 찍은 사진처럼 불가능한 사건인 경우에도 그렇다. 벅스바니는 워너브라더스의 캐릭터로 월트디즈니가 운영하는 디즈니랜드에는 있을 수가 없다. 나중에 사진이 합성이라고 얘기해줘도 상당히 많은(참여자의 40%였던 것 같다. 논문이 지금 없어서 구체적인 수치는 생략) 사람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대학생들에게 보여준 합성사진처럼 평론은 작품에 대한 기억을 바꾸어놓는다. 작품에 대한 기억은 평론에서 작품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변형되고, 평론에서 주목하는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서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이야기"가 생겨난다. 따라서 "내가 생각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생각했다고 지금 믿는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실제 경험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기는 하기 때문에 아무 평론이나 이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건 아니다. 평론이 실제 경험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과거의 경험을 재구성할 때만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평론가는 경험과 기억을 소재로 삼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자기 때문에 인간이 언어를 이해하거나 새들이 노래를 들을 때 하게 되는 경험을 뇌세포의 활동패턴이나 아니면 거기에 바탕을 둔 심리적 과정으로 설명하게 된다. 지젝 얘기를 꺼낸 사람은 그런 식의 접근이 무슨 쓸모가 있냐는 지젝의 지적이 그 키에슬롭스키 영화에 대한 평론 중에 나온다고 했다. 평론은 작품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창출함으로써 예술에 대한 경험을 더욱 풍성하게 하지만, 과학은 작품에 대한 경험을 인과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점에서보면 예술에 대한 감상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감상 자체에는 별로 쓸모가 없다. 공포영화를 보는데 옆에서 "저거 피 아냐, 케찹이야" 이러면 초치는 것 밖에 안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케찹이 케찹이지 피인 것은 아니다. 그것을 망각하면 슈퍼맨 영화보고 나서 보자기 쓰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아이처럼 된다. 과학에는 과학의 쓸모가 있고, 평론에는 평론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평론가-철학자들은 종종 그걸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by | 2008/02/01 01:00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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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랜드의 벅스바니의 예를 들어서.
그런데 "스폰지"랑 무슨 관계가 있으신거 아닌가요?
옛날 포스팅 중에 뇌의 가소성에 관련된 내용이 있었는데
스폰지에는 비교적 최근에 그 내용을 주제로 방송이 나왔거든요 ㅋㅋ